보라, 여기 한 시민이 있다
-故 백남기 선생을 위한 미완성 레퀴엠
1.보라, 여기 한 시민이 있다.
보라,
여기 한 시민이 있다.
보라 여기,
이제야 생의 마지막을 마른 성자(聖者)처럼 건너가는
사막 위의 한 사람이 있다.
보라,
여기 한 아버지가 있다.
보라 여기,
이제야 울 수 있는 아이들이 미는 수레에 누워
생의 마지막 사막을 건너는 얼어붙은 기도(祈禱)가 있다.
지나가는 그대들,
지금 그의 이름 모를지라도
늙은 석류나무처럼 경건의 무릎을 꿇어라.
지금 그가 떠나가는 곳 모를지라도
가을바람의 갈대처럼 흰 머리를 풀고 손을 모아라.
그렇다, 죽음은 늘
키 큰 청동 메타세쿼이아처럼 길 가에 서 있었다.
그리하여 죽음보다 삶이 더 낯 선 사막이라 해도
성자(聖者)보다 등 구부린 낙타가 이 사막의 미덕이라 해도
지금은 여기 한 시민이 누워있다.
지금은 여기 한 아버지가 누워있다.
그러니 와서 보라, 해의 형제들이여
와서 보라, 달의 자매들이여,
그로 하여
어떻게 우리의 노래가 시작되는지
어떻게 우리의 울음이 푸른 강이 되는지
어떻게 우리의 봉기가
이곳에서 뜨겁게 불 타 오르는지를.
2.불쌍히 여기소서, 여기 황금 밀밭에서 무릎을 꿇느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봄바람을 만나 노란 나비가 되지 못한 죄
여름 소낙비 속에서 무지개를 찾지 못한 죄
가을꽃들에게 붉은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죄
흰 눈의 무게로 겨울나무 가지를 꺾은 죄
그리고 또,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
여기 황금 밀밭에서 무릎을 꿇느니 부디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모든 기대는 바람 너울처럼 헛되다고 믿었으며
모든 미래는 모든 과거라고 믿었으며
어두운 강가에 서서
모든 사랑은 끝나지 않는 울음일 뿐이라고 믿었으니
노을에 물든 밀밭에서 붉은 노래를 합니다
자본에 피투성이가 된 붉은 염소가 마지막 노래를 합니다.
오,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모든 사랑은 끝나지 않는 죽음일 뿐이라고 믿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 황금 밀밭에서 무릎을 꿇느니
우리가 우리를 용서하게 하소서.
3.가련하여라, 저 쓰러진 붉은 염소여
가련하여라, 저 쓰러진 붉은 염소여
가련하여라, 저 머리가 부서진 농부여
가련하여라, 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화염이여
가련하여라, 저 숨 쉴 수 없는 초록의 강이여
가련하여라, 저 길 위 저 철탑 위 노동자들이여
가련하여라, 저 입 없는 검은 돌멩이들여
가련하여라, 저 새끼 잃은 어미의 푸른 이마여
가련하여라, 저 성 밖 죽게 내버려진 잉여들이여
가련하여라, 죽은 농부를 부르는 시민들의 북소리여
가련하여라, 만장(挽章)을 든 분노의 손들이여
이 노래가 밥이 되고
이 눈물이 술이 되어
오늘 그대들과 나누느니
이 노래가 살이 되고
이 눈물이 피가 되어
내일 또 그대들과 나누느니
가련하여라,
내 죽음을 업고 가는 가을바람이여
오 가련하여라,
울음과 분노의 강 위에 내려앉은 가을하늘이여.
4.시민들이여, 북소리 울리며 거리로 나서자!
황금 밀밭 한 가운데
당신은 오래된 느티나무나무처럼 서 있습니다.
강 안개가 겹겹의 흰 옷자락처럼 나부껴
당신은 강물 속 청동빛 버드나무처럼 서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을 당신의 나라로 보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나라로 돌아갑니다.
다하지 못한 당신과 우리의 말들이
노란 낙엽처럼 수북하게 발밑에 쌓입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은 죽은 그 모든 이들이고
우리는 죽은 그들을 떠나보낸 그 모든 눈물들입니다.
미처 다 닦아주지 못한 핏자국들은
저 불의(不義)의 짐승들과 함께 들판에서 태워질 것입니다.
황금 밀밭 한 가운데
당신은 오래된 느티나무나무처럼 손 흔들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의 나아감이 또 다시 실패할지라도
당신은 강물 속 청동빛 왕 버드나무처럼
견디며 서있으라 말하십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안녕히 계십시오. 형제여,
우리는 당신의 목소리로
다시 저 찬란한 나라로 진군해 나갈 것이니
자 이제 시민들이여,
북소리 울리며 거리로 나서자!
시민들이여,
북소리 울리며 거리로 나서자!
오 시민들이여,
북소리 북소리 울리며 우리의 거리로 나서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