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파리코뮌의 현대적 의의
파리코뮌이 많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하지만 코뮌이 가진 역사적 의미가 퇴색되거나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본과 권력이 결합하여 역사상 그 유래를 찾지 못할 정도로 부르주아계급의 지배와 독점력이 강화되고 있는 오늘날 파리코뮌이 지향하던 가치와 이념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주고 있다.
칼 샌드버그는 <나는 민중이다, 폭도다>라는 시에서 웅장한 목소리로 민중의 봉기와 저항을 노래한다.
나는 민중이다, 폭도다, 군중이다, 대중이다
이 세계의 모든 위대한 작품들이 나를 통해 이뤄졌음을
그대는 아는가?
나는 노동자요, 발명가요, 이 세계의 음식과 옷을 만드는
사람이다.
(중략)
나, 민중이 기억하는 법을 배울 때,
민중인 내가 어제의 교훈을 이용할 때,
작년에 누가 나를 강탈했는지,
누가 나를 바보로 만들었는지
더 이상 잊지 않게 될 때,
경멸이나 비웃음을 담아 ‘민중’의 이름을 말하는 자는
온 세상에 단 하나도 없게 되리라.
바로 그때,
폭도, 군중, 대중이 도래할 것이다.
샌드버그가 노래한 “폭도, 군중, 대중이 도래”하는 사회현상을 조치 카치아피카스는 ‘민중봉기’라고 부른다. 그는 『한국의 민중봉기』와 『아시아의 민중봉기』, 두 권의 역저를 썼는데, 파리코뮌을 민중이 주체(주인공)가 되어 일어난 봉기, 즉 ‘민중권력’(People Power)으로 파악한다. 파리코뮌이 끝난 후 잠시 주춤하는 양상을 보이던 민중봉기는 1968년을 기점으로 되살아난다. 이에 대해 카치아피카스는 이렇게 말한다.
“집단적 풀뿌리 봉기가 사회 발전의 핵심 요소라는 개념에 기초하여, 역사의 논리는 혁명적 상황에서 수천 명 민중의 자기 지향적 행동으로 전개되는 합리성 내에서 추적할 수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우리는 18세기의 미국과 프랑스 혁명의 지구전에서 1848년 무장한 노동자계급의 도시 봉기로, 20세기 초반 집중화된 당이 주도하는 권력 장악에서 1968년 분산된 전지구적 반란으로 이행한 것을 목격할 수 있다. (…) 민족 독립에서 노동과 빈곤으로부터의 자유까지, 자유에 대한 민중의 비전은 지속적으로 전진해왔다. 민중 투쟁은 점점 더 자기조직화되고 자율적으로 총명해졌다.”(카치아피카스1, 54-55쪽.)
이런 입장에서 그는 파리코뮌을 다시 호명하고, 1968년운동(68운동)으로 곧바로 연결한다. “1968운동은 자주관리와 국제주의라는 한 쌍의 열망을 바탕으로 하며, 이는 1968년 5월 프랑스와 1970년 5~9월 미국의 신좌파 총파업에 분명하게 드러난 특징이었다.”특히 프랑스와 미국에서 일어난 이 봉기는 중앙위원회의 ‘지도’나 엘리트 집단의 허가 없이 일어났다(카치아피카스1, 55쪽). 민중은 스스로 학습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했다. 위로부터의 ‘지도’나 ‘허가’를 거부하고, 아래로부터 ‘자주적으로’ 봉기한 것이다.
카치아피카스는 1894년 농민전쟁부터 2008년 촛불시위까지 한국에서 일어난 민중봉기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광주5·18민주항쟁을 ‘20세기의 파리코뮌’, 즉 ‘광주코뮌’으로 규정한다. 그는 5·18을, ‘영웅의 역사가 아닌 민중의 역사’이자 ‘조직과 엘리트를 넘어서는 민중봉기 혹은 민중운동’으로 보고, 이렇게 평가한다.
“자발적으로 결성된 그룹들이 모든 봉사를 조직하고, 사전 계획도 없이 도청 주위로 모인 사람들이 의견을 나눈 광주는 우리가 보통 꿈만 꾸는 방식으로 서로 자유롭게 협력했다.”(카치아피카스3)
일찍이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는 물론 크로포트킨 등 아나키스트는 한목소리로 권력을 쟁취한 ‘직업적 혁명가’들의 현상유지가 코뮌의 패착이라고 비판하였다. “정치혁명과 경제혁명을 사회혁명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크로포트킨의 말이 호소력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크로포트킨의 말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국가주의는 더욱 강화되고 막강한 시장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세례를 받은 부르주아계급은 막강한 위세를 뽐내고 있다. 세계는 더욱 평평해진 반면,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격차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해 너무 낙담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를 가로막는 이 거대한 장벽이 오히려 우리를 살리는 숨구멍이기도 하니까.
20세기 후반 인터넷과 웹기반이 구축되어 활성화되면서 국경을 초월한 상품과 자본, 서비스는 물론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브라질에서의 한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에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는 세상”(‘나비효과’)에 살고 있다. 우리는 혼동과 혼란의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반대로 그 어느 때보다 연대와 협력이 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기도 하다. 인터넷을 매개로 하여 특정 집단이 독점하던 방대한 양의 지식과 정보가 개인들 사이에서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전파된다. 오늘날 ‘어리석고 멍청한 군중’(愚衆)에서 벗어나 ‘지혜롭고 똑똑한 군중’으로 진화와 진보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카치아피카스는 파리코뮌이 1968년을 거쳐 5·18 등 전세계의 숱한 민중봉기로 이어지는 역사적 현상을 ‘에로스 효과’라고 말한다. 에로스 효과란 “특정한 지도자나 조직의 이성적 동원 없이 민중이 스스로 역사를 바꿔야 하고, 바꿀 수 있다는 직관적, 감정적 믿음으로 일시에 봉기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허버트 마르쿠제가 그의 저서 『에로스와 문명』에서 사용한 ‘에로스’를 차용하여 파리코뮌의 이상을 5·18에서 발견한 것이다.
마르쿠제는 그의 저서 『일차원적 인간』에서 현대사회를 ‘기술적-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본다. 이런 사회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효율성’이다. 심지어 ‘비판적-저항적 시민의 태도’마저 비효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물질적 풍요는 개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무비판적이고 체제순응적인 ‘1차원적 인간’을 양산한다. ‘비판적-저항적-부정적 사유’를 하는 ‘2차원적 인간’이 설 자리는 부정되고, 그 가치는 평가절하되고 만다. 마르쿠제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1차원적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억압적인 전체의 지배 아래서 자유는 강력한 지배도구로 바꾸어질 수 있다. 개인에게 개방된 선택의 폭은 인간이 자유와 정도를 결정하는 데 있어 결단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무엇이 선택될 수 있으며 무엇이 개인에 의해서 선택되는가를 가리킨다. 주인을 자유로이 선출한다는 것은, 주인이나 노예를 폐지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 속에서의 자유 선택은 이들 상품과 서비스가 고통과 공포의 생활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지속시키는 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마르쿠제가 말한 ‘2차원적 인간’을 부정당하고, ‘1차원적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1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파리코뮌을 잊지 않고 되살려야 하는 이유이다. 1871년 4월 19일 발표된 <프랑스 민중에게 보내는 파리코뮌 선언>은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다.
“… 파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민중의 권리와 사회의 규칙적이고 자유로운 발전과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형태인 공화제의 승인과 강화.
프랑스의 모든 지구에 확대되어 각 지구에 그 권리의 보전을, 프랑스 전체에 인간, 시민, 노동자로서의 기량과 능력을 완벽하게 행사하는 것을 보증하는 코뮌의 절대적 자치.
코뮌의 자치는 그 한계로서 계약으로 확고하게 맺어지고, 그 결합이 프랑스의 통일을 보장해야 할 다른 모든 코뮌과 대등한 자립권 이외의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 …“
코뮌선언은 “모든 지역의 창의와 자주적 결합, 공동의 재산, 만인의 복지, 자유, 안전을 목적”으로 “개인의 모든 에너지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협력”으로서 ‘정치적 통일’에 관한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한다. 아래에서 인용하는 코뮌선언의 마지막 문단은 잊지 말고 기억하며, 현실 속에서 실현해야 할 아나키스트들의 의무이다.
“파리의 시민인 우리들로서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비춘 모든 혁명 가운데 가장 광범위한, 가장 결실이 풍부한 근대 혁명을 달성할 사명을 갖고 있다.
우리에게는 싸워서 승리를 거둘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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