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림 시인의 시집 <대가리> 출판기념회에서, 해설을 쓴 홍승용 현대사상연구소 소장은 “포스트주의에 더 이상 주눅 들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자제하지 말자”는 요지의 인사말을 했다. 평소 그의 ‘너무나’ 차분한 성격과는 달리 그날 목소리와 논리에는 ‘선동가’의 ‘흥분’이 서려 있었다. 아마 고희림 시인에게서 포스트주의의 먹장구름을 걷어낼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또, 그 자리에 참석한 시인들, 특히 젊은 시인들에게 다시 리얼리즘으로 돌아가 현실비판을 서슴지 말자고 외친 셈이다. 필자도 그 자리가 대구경북 진보시단의 전환 마당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시단의 포스트주의는 ‘언어유희’, ‘유미주의’, ‘자기연민’으로 보여진다. 뭉뚱그리면 ‘사회적 주체’로서의 자기보다는 ‘개별적 주체’로 나타나며, 현실과 분리된 표현의 현란함은 ‘말잔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사회에 대한 비판 기능을 지닌 리얼리즘과 배치된다. 시가 현실에 눈감으면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데 기여한다.
사회변혁, 사회과학의 죽음에서 성장한 인문학 열풍의 환상
‘인문학 열풍’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적 자아정립보다는 개별적 자아, 처세, 개인윤리를 강조하여 억압자인 자본주의를 불가피한 것으로 수용하고 개인이 ‘잘 참고’, ‘처세를 잘하여’, ‘잘살아 보자’는데 주목한다. ‘정신’과 ‘교육’, ‘자유’를 떠들어대던 유럽의 인문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 인문학 열풍은 소시민적 경향의 창궐에서 비롯한다. 변혁이 아니라 소시민적 사랑과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게 된다. 이는 프롤레타리아를 주체로 하는 사회변혁의 좌절과 사회과학이 죽은 토양에서 성장해 온 것이다.
문학과 예술 그리고 인문학 열풍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경향은 세계사적으로 어떤 사상현상과 연관하는가? 그것을 하나로 환원시킨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물론, 단일한 개념으로 지난 60~70년 세계 사상 경향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반대로 그러한 환원적 정의가 사태를 잘 설명하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탈주체’, ‘탈중심’이다.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사회주의와 격돌한 시대는 주체가 강조되던 ‘근대’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근대’이기도 하다.
노동주체성만을 해체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주의를 해체하고 자본주의를 공고히 하다
탈주체는 탈 ‘자본-노동’관계이다. 그러나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두 주체 중 투쟁의 주체인 노동주체성만을 해체한다. ‘탈 남성 중심’, ‘탈 유럽 중심’, ‘탈 식민주의’ 등으로 표현되는 탈 주체는 사실상 ‘옵션’에 불과하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듯한 ‘탈’은 새로운 지배관계를 구성하는 데 이용되는 기만적 성격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2차 대전은 제국주의 간 전쟁이라는 특징도 갖고 있지만, 핵심은 제국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투쟁이다. 2차 대전의 정점은 독일-소련전쟁이다. 히틀러는 소련을 제압하여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한 정치적, 도덕적 패권을 잡고 싶어 했다. 흔히 2차 대전을 미국 중심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미국 할리우드 문화산업의 승리일 뿐이다. 돈 많은 미국은 참전 시기를 저울질하며 돈으로 ‘장난’ 치다가 막판에 소련을 지원하여 ‘얍삽하게’ 성과를 싹쓸이했을 뿐이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진영은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파기하고 다시 대립한다. 이것이 냉전이다. 소련과의 효과적인 전쟁을 위해서는 제국주의 국가 내 안정과 그들 국가 간 안정이 필요했다. 전자는 사회복지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소련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동맹을 이룬다. 계급동맹이란 사실상 부르주아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주의 개량을 의미한다. 이 계급동맹은 베른슈타인, 카우츠키 등 기회주의 노동운동의 전통에 바탕한 사회민주주의가 자본과 애국주의에 투항함으로써 이루어지며, 동시에 소련을 비롯한 현실사회주의를 배격하는 반공주의에 토대하고 있다. 후자는 국제연합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나토를 결성하여 소련을 포위 압박하는 반공반소동맹을 형성한다. 이것이 서유럽 사회복지체제이자 나토체제다.
50년대 이후, 서유럽 복지체제는 신식민지 수탈과 제국주의 간 협력을 통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든다. 그러면서 미국을 필두로 소련사회주의를 붕괴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낮은 수준의 경제 상태에서 혁명에 성공한 소련은 미국의 냉전 압박에 휘청이고, 국내적으로는 억압되었던 자본가 경향이 도처에서 성장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권력재편이 이루어지는데, 스탈린 사망 후 흐루쇼브가 등장한다.
그는 냉전 종식과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체제이행이 가능하다고 선언한다. 1953년, 그는 프롤레타리아독재 체제인 스탈린주의를 비판한다. 이러한 흐루쇼브의 기회주의 탓으로 사회주의 진영은 소련의 혁명수출이 중단되고, 중-소 이념분쟁에 직면한다. 이때부터 현저히 약화한다. 마침내 자본가 경향이 보다 강력해진 소련이 스스로를 해체한다. 세계는 경제·정치·군사 면에서 재편되기 시작했으며, 사상적으로도 재편될 토대가 형성된다.
소련 내부에서는 흐루쇼브의 스탈린 비판과 지식인 집단의 자유주의 경향의 증대, 그리고 소련 지도부의 투항주의 경향으로 인하여 현실사회주의는 ‘찌질한’ 집단으로 매도되고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다. 특히 흐루쇼브의 스탈린 비판은 소련사회주의의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혔다. 이때부터 서유럽의 이론가들은 사상적으로 현실사회주의 이론을 해체하기 시작한다. 이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상체계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맑스주의를 해체하는 탈주체·탈근대 이론의 철학적 토대는 데리다가 제시하는 해체론이다. 서유럽 중심, 남성중심, 자본과 노동 중심의 거대담론 등 근대 담론을 해체하여 인간의 자유를 더욱 확대하려는 철학자의 노력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해체 유행이 확산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이론으로 발전한다. 결국, 해체론의 ‘진리의지’(니체)는 사회주의를 해체하고 자본주의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부정하는 알튀세르
국가 중립성을 주장하고 나선 발리바르
저항을 해체하는 문화주의, 제국주의를 돕다
사회과학에 포스트주의가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맑스주의를 라깡의 구조주의와 접목한 알튀세르르다. 그는 노동주체성을 해체하는데, 경제적 토대의 산물인 주체를 부정하고, 라깡 심리학의 구조주의 이론을 접목한다. 맑스의 심장인 변증법을 도려내고 라깡의 구조주의를 끌어들여 주체를 구조에 ‘호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주체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데올로기 구조에 의해 ‘호명’된다. 그 호명의 주인이 바로 이데올로기 국가다. 즉, 개인 주체는 국가에 부름을 받는다.
맑스주의 이론에서 국가는 시민사회 내의 자본과 노동의 대립에서 자본이 노동을 통제하기 위한 기구에 불과하다. 그런데 알튀세르에 있어서는, 시민사회 내부 투쟁의 산물에 불과한 국가가 주인의 자리에 서고 시민사회 내의 자본과 노동의 대립투쟁은 결정적 의미를 상실한다. 그는 상부구조의 중요성을 밝혔지만 이를 과장한다. 지배이데올로기의 강력한 작동원리만 강조하여 계급투쟁은 항상 지배계급의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는 자본주의 극복 불가능론이다. 즉, 자본주의 옹호론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스스로를 맑스주의로 자처하는 이론가들이 한때 알튀세르 맑스주의에 경도되었다가, 이를 적절히 비판함 없이 대개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으로 변화해간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이론의 철학적 측면의 핵심은 ‘이항대립’과 ‘동일성’의 부정이다. 그는 헤겔을 비판하는데, 헤겔은 단순한 동일성과 이항대립이 아니라 ‘변증법’적이라는 사실은 눈감는다. 즉 대립물 간의 상호전화와 부정의 계기를 우선시하며, 이는 맑스에 계승되어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으로 발전한다. 이로 볼 때, 알튀세르의 진리의지는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부정하는 것이며, 계급화해를 주창하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제자인 발리바르는 한발 더 나아가 국가의 중립성을 주장한다. 그는 자본주의 국가가 나서서 시민사회 내의 갈등을 상당히 치유할 수 있으며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임을 강조하여 사회주의혁명을 배격한다. 맑스의 사회 이론의 핵심이 시민사회 내의 갈등과 이의 반영으로서의 국가인데, 그리고 국가를 부르주아들의 집행기관이라고 불렀는데, 맑스주의를 해체하는 이론을 전개하면서도 자신을 맑스주의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으로 자임한다.
르페브르는 아예 국가와 이데올로기를 경제적 토대에서 바라보지 않고 국가가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규정한다는 ‘국가생산양식’을 주장한다. 이는 국가가 생산양식을 결정한다는 것으로 사실상 국가를 계급투쟁과 완전히 분리하고자 한다. 이는 부르주아 체제의 영원성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맑스주의자라고 강변한다.
탈식민주의의 대표 이론가인 알박스는 유럽과 미국의 주체성을 해체하고 식민지 국가와의 평등을 주장하지만 사실상 자본주의의 신식민지 ‘재편’의 수단으로 이용당할 진리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제3세계의 맑스주의 민족해방론을 해체하는 역할을 한다. 아예 민족이란 상상공동체라고 하는 앤더슨도 있다. 그의 이론의 결과는 ‘본의와 다르게’ 저항적 민족주의를 해체하여, 간접으로 제국주의 돕기에 나선 것으로 기능할 수 있다.
주체의 해체는 문화주의자들을 양산한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비롯한 영국문화주의 등 그 밖에도 많은 이론가가 이러한 경향을 보인다.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계급투쟁에서 중요하다는 점은 그람시에 의해 잘 설명된다. 그는 진지를 구축하여 헤게모니 투쟁에서 승리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를 왜곡 발전시켜 아예 경제적 토대와 그에 따른 시민사회 내의 갈등은 부차화하고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라는 이론을 제기한다. 국내에도 심광현 등 몇몇 이론가들이 있다. 이들은 노동자의 투쟁과 이의 토대인 경제적 사회구성보다 관념적 문화이론에 우선성을 둔다.
맑스주의자를 자임하며 맑스주의를 해체하는 이론적 아이러니
아나코생디칼리즘 경향의 이탈리아 자율주의자 네그리는 <제국> 등의 저서에서 목적의식적 운동을 해체하고 ‘우리(노동)가 앞서고 그들(자본)이 뒤 따른다’는 황당한 주장을 한다. 패배한 우리가 실제로는 자본에 승리하고 있다는 현실해석으로 우리의 ‘분투’를 무력화한다. 이러한 경향은 촛불시위에서 조직된 운동의 개입 없는 자발적 형태의 대중운동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착각까지 일으킨다. 이는 사실상 조직‘해체론’이다.
마침내 들뢰즈에 이르면 이러한 패배적 이론들의 철학적 개념화로 나아간다. ‘천의 고원’ 등 화려하고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지만, 그 귀결은 ‘낭만주의’이며 변혁이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된 시대의 패배주의 이론이다. 대표적으로 ‘모순’과 ‘계급투쟁’ 대신 ‘차이와 반복’을 역사발전의 계기로 설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부르주아 체제를 해체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를 옹호하는 철학이론을 완성해간다. 이제 데리다에서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은 반변혁적 이론주의를 완성했다.
맑스주의자를 자임하면서 결과적으로 맑스주의를 해체하는 이러한 이론적 아이러니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전유’(apporiation)라는 이론 과정이다. 전유란 맑스주의 전체를 계승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를 계승하여 이를 자기 이론에 활용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맑스주의를 ‘파편화’하여 자신의 이론에 유리하게 사용하며, 그러면서 자신을 맑스주의자로 ‘사칭’한다. 이들에게 공통한 것은 소련 등 현실사회주의를 배제하는 것이다. 레닌의 볼셰비키혁명 이후를 배제하는 것이며 맑스주의를 실천투쟁이 아닌 관념의 담론으로 전락시키는 것이고 궁극으로는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옹호하는 이론이다.
맑스를 표방하며 반맑스를 행하는 그들, 정말 ‘주여, 그들은 모르고 하는 일입니다!’일까? 아니다. 알고 하는 일이다. 안락한 교수 자리, 유명인이 되고 싶은 욕구, 책 많이 팔기에 목을 건 이론 장사꾼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론 상혼’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2류 진보이론이나 피케트 이론을 무슨 대단한 발견인 양 상품화하여 팔아먹을 수 있는 비양심을 지녔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를 소비하는 자본주의 ‘우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중들은 내용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갑’들의 문화를 모방 소비할 뿐이다. 그들은 보디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시옹’(가상현실)의 세계에 살고 있다.
세계적 이론 경향은 국내에 조금 늦게 그러나 전격적으로 수용되었다. 90년대는 그야말로 알튀세르의 시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연출되었다. 국내 이론 상황을 일부 살펴보자.
여성운동과 생태운동에 미친 포스트주의
주체의 해체는 여성운동에 이르러 더욱 실천적이다. 맑스주의 여성해방운동은 사라지고 포스트모더니즘 경향과 결합한 부르주아 여성운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가부장제’의 억압성을 경제사회구성체의 모순보다 우위에 두는 ‘이론적 과감성’을 발휘하여 사실상 노동주체성을 해체한다. 자본주의 틀 속에서 먼저 여성의 지위를 높이자는 전략은 부분적 성과를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실제로도 여성 억압문제를 전면화하여 여성을 주체화하는 성과도 있지만-반대로 부르주아 지배 체제를 넘어설 수 없다는 진리의지를 전파하는 역기능도 한다.
김종철류의 생태운동 역시 포스트주의의 영향 아래 있다. 서유럽에서는 노동주체성이 해체된 가운데 대안으로 등장한 신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생태운동이 활성화한다. 그는 이 이론들을 수입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국내에 있는 장일순 이론, 아나키즘 이론, 심지어는 김지하의 생명사상 등 민중주의 이론들과 접목한다. 생태문제를 일으키는 근본 구조는 자본주의임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극복할 대안을 찾지 못한 채 낭만주의 경향, 자기만족의 사고에 머문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방안을 포기하고 개량적 생태주의에 머무는 것이다. 물론 삼평리에서 싸운 생태주의자들은 이와는 다른 비전을 가꾸어 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들에게 큰 기대를 건다.
국내 강단과 연구소 이론가들은 대부분 포스트주의 경향인데, 심지어는 직접 운동진영에 연관한 이론가조차 그런 경우가 많다.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고 자부하는 연구자 다수가 알튀세르 맑스주의자이거나 알튀세르를 거쳐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으로 나아간다. 윤소영, 이진경, 조정환, 그리고 김세균을 비롯한 맑스코뮤날레 연구자들이 대표적이다. 이진경은 심지어 ‘기계적 잉여가치’를 주장한다. 맑스주의 잉여가치 개념을 전유하여 부르주아 이론에 복속시키고 있다. 이들은 사회주의‘운동’을 해체하고 ‘코뮌’을 주장하기도 한다. 계급투쟁에 의해 쟁취하는 코뮌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구성되는 그야말로 황당한 주장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운동 이론을 1849년 공산당 선언 이전으로 되돌려 버렸다. 김세균을 비롯한 맑스코뮤날레 연구자들은 적-녹-보 전략을 주장한다. 이 전략은 적(노동)과 여타 과제를 동렬선상에 놓음으로써 노동주체성을 해체하고 사민주의 경향을 이론화한 것이다. 국내외의 이러한 이론경향은 맑스주의운동의 ‘현실화’가 공백인 상태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여 보완하고자 하는 개량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붕괴 속에 등장한 아나키즘 현상
20세기 사회주의 붕괴 이래 아나키즘 경향이 대안으로 폭넓게 제시된다. 아나키즘 현상은 몰리뉴가 지적하듯이 ‘좌파의 정치적 공백이 있을 때 두드러지는데, 이런 공백은 옛 공산당의 역사적 쇠퇴와 소멸,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우경화에서 비롯’한 것이다. 바쿠닌, 노엄 촘스키, 엠마 골드만, 머레이 북친 등 이름만큼이나 매력적이다. 아나키즘이 지니는 쁘띠부르주아적인 자유지상주의는 그 이상의 높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의 타협이며, 역으로 사회주의를 해체하는 기능을 가진다. 홉스 봄은 ‘아나키즘 이데올로기의 쇠퇴는 그리 극적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럴 정도로 성공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다시, 몰리뉴는 ‘아나키즘의 기본사상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고, 이 때문에 실천에서는 해방투쟁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한다.
아나키즘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친화성이 있다. 변혁주체성, 노동주체성을 해체하고 개인주의적 경향을 취한다. 바쿠닌은 ‘해방은 오로지 개인을 통해서 아래로부터 온다’고 한다. 이는 자유지상의 낭만주의이다. 그건 자본이 진정 원하는 것이다. 개인화한 세력들은 결코 자본을 위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본을 ‘미워’하지만 ‘위협’할 수 없는 존재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50년 흐루쇼브 등장 이후 그리고 1991년 소연방 붕괴 이후,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상이 압도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아나키즘, 네그리 류의 자율주의, 해체론과 구조주의, 들뢰즈 철학 등은 서로 모두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경향에 영향받은 부문운동론들, 즉 노동주체성 없는 경제주의적 노동운동, 생디칼리즘, 생태주의, 가부장제를 구조의 축으로 보는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신사회운동 등은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의향이 없는 파편화한 실천에 불과하다. 또한 전략으로서 ‘급진민주주의전략’(라클라우·무페), ‘적-녹-보’(한국의 맑스 코뮤날레 경향), 풀뿌리운동 전략 등도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의 귀결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아나키즘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사회주의운동에서 ‘전위당’과 ‘노동주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두 개념이 해체되면 사회주의운동은 이빨이 빠진다. 경제주의운동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한마디로 루카치가 말하는 ‘사물화’한 노동운동이 된다. 맑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 이전의 공상적 사회주의, 아나키 사회주의 시대로 회귀된다.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우리나라 운동가들의 의식이 결코 자유롭지 않다. 노골적으로 혹은 자신도 모르게 포스트주의를 선망하는 시민운동 활동가들, 그 포스트주의의 영향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고 공존하는 노동운동 활동가도 같은 영향 아래에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1대 99사회를 만든 공범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 인류가 1대 99사회로 전락하는데 공동정범 역할을 했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치스러운 민낯이 드러났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백내장과 같은 것이다. 그걸 제거해야 사물이 보인다. 이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자본이 보낸 전령사인 포스트모더니즘에 포섭되어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길은 무엇인가? 맑스주의는 현실사회주의로 실현되었다. 하지만 그 약점과 오류가 드러났다. 우리는 그 흐름을 계승하면서도 매우 철저하게 비판해야 한다. ‘내재비판’이다. 변증법은 내부의 모순에 의해 운동하는 사물을 그린다. 내부의 운동을 살피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배제하는 해체론은 자본의 유혹이다. 하지만 철저한 비판 없이 계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그 또한 관념의 이론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아나키즘은 ‘외재 비판’에 불과하며 매우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론으로부터, 우리가 수행해야 할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작업에 많은 암시를 받을 수 있다. 오히려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과 아나키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한다.
비판에 둔감한 운동, ‘주체성’과 ‘총체성’을 인식하자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들여 자신을 비판해야 한다. 우리사회에서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변화를 해석하는데 매우 둔감하다. 당장 중요한 문제인 여성운동, 생태운동, 계급변동에 대한 이론적 이해조차 결여되어 있다. 자신을 보호하는 과거 이론을 펼칠 뿐, 자기를 비판하여 변증법의 정확한 의미인 ‘사태에 적합해지고자 하는’ 노력을 결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수적이다.
이러한 현상은 ‘상품 물신성’(맑스)을 주체적으로 해독하지 못하고 ‘사물화’(루카치)에 빠진 노동자·노동운동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노동주체성(루카치)이란 자신만의 이익이 아니라 전체를 생각하는 ‘총체성’(루카치) 있는 사고이며 그래서 현재로서는 자기희생적이다. 노동에게, 여성과 생태 등 과제들을 자기 문제로 대하고, 불완전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들과 함께하고 희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한 희생을 통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낙원으로 갈 수 있다.
먼 훗날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맑스주의라는 ‘본령’에 서서 포스트모니즘이 펼친 그 의도를 전체로 꿰뚫고, 그를 비판하면서도 그 문제제기의 긍정성을 종합해내어 이를 무기로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함으로써, 21세기의 ‘그의 본령’을 드러낼 것이다. 반드시 ‘주체성’과 ‘총체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백마를 타고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