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김수영-되기] (끝) 거대한 뿌리

20:43

거대한 뿌리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 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 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强者)다

나는 이자벨 버스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당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거대한 뿌리’는 <김수영 전집 1(시)>에서 인용했습니다.

혁명의 타락이 불러온 반혁명인 5·16쿠데타 이후 김수영의 시적 인식은 깊은 침잠을 거친다. 변화는 끝났다며 어서 일을 하자, 는 1961년에 쓴 「시」는 생활의 세계로 돌아가자는 무력감을 포함하고 있다. 김수영 자신도 4·19혁명에 대해 냉철하지 못했음을 어느 산문에서인가 자조한 적이 있지만, 시적 인식의 침잠과 생활로의 몰두가 산문정신의 퇴락까지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문학 제도 내부에 “만성이 되어버린 사기와 협잡의 구악(舊惡)”에 대해서 독설을 뿜어내기 시작한 것도 생활의 세계에 대한 몰두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이것은 그의 산문정신과 “지성의 화염”은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 꺼지지 않은 산문정신은 드디어 「거대한 뿌리」에 와서 눈부시게 작열하게 되며, 이 시는 김수영의 마지막 4년의 시를 여는 문에 해당된다. 혁명 이후 희미하게 발아하기 시작한 ‘민중’에 대한 인식은 「거대한 뿌리」에 와서 “뿌리”를 박으려는 힘찬 몸짓을 보여준다. 물론 이 시에 등장하는 민중은 신동엽이 인식한 대지적 민중과는 다르다. 시에서도 드러났듯이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같은 민중은 대지적 민중이라기보다는 공동체 내에서도 소수자의 위치를 갖는 민중이다.

어쩌면 모더니스트로서의 김수영이 인식한 이 리얼리티가 김수영의 시를 아직도 생기 있게 하는지도 모른다. 김수영이 신동엽에 대해서 “모더니즘의 해독을 너무 안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때, 여기서 “해독”은 “모더니즘”을 통한 의외의 득의, 즉 “모더니즘”을 통해 얻은 새로운 리얼리티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임과 동시에 신동엽의 대지적 민중에는 가 닿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1연은 시 전체 내용에 비춰봤을 때 도리어 이례적인 것이어서 우리의 기억에서 자칫하면 빠져나가기 십상이다. “나는 이자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로 시작되는 2연 이하의 폭포수 같은 장광설이 워낙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읽어보면 “앉는 법”에 대해서 말하면서 여지껏 정초되지 않았던 민중에 대한 자기 인식의 허술함을 반성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런데 그것은 김수영 특유의 자기성찰을 통해서이지 민중에 대한 직접적 실감으로서는 아니다.

다시 말해 “두 발을 뒤로 꼬고/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는 김병욱의 앉는 자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 제철회사에서/노동을 한” 삶에서 나왔다는 설명은 김수영 자신의 어떤 경험의 부재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1연 마지막에서 김병욱은 “노동을 한 강자다”고 힘주어 말한다. 즉 김병욱의 특이한 앉는 자세는 김병욱의 구체적 삶의 경험에서 유래하지만, 자신은 아직도 현실을 대하는 자세에서 어중간한 자세밖에는 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고백인 것이다. “셋이서 술을” 마실 때 “남쪽식으로/도사리고” 앉긴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앉음새를 고친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자신의 어떤 부박함을 고백하는 대목이다. 이 반성은 아마도 앞에서 말한 5·16 이후 벌어진 자신의 무기력에 대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전체 내용과 조금 동떨어진 것 같은 내용을 1연에 배치한 것은, 드디어 자신의 고쳐 앉기만 하는 자세를 후련히 떨쳐버렸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다. 김수영은, 다른 산문에서도 고백했듯이, 다른 시인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추레한 모습을 확인할 때 기어코 시적으로 극복하고 가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은 「이혼취소」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에 의하면,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대학에 다니는/나이 어린 친구한테서 받은” “블레이크의 시” 일부를 끝내 체득하고 희열에 찬 소리를 치는 것과 같은 심리 상태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을 지금 완성했다 아내여 우리는 이겼다/우리는 블레이크의 시를 완성했다”. 따라서 1연은 자기고백인 동시에, 지난날의 ‘나’를 넘어섰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이렇게 읽었을 때 1연과 다른 연들 사이의 유기적 구조는 ‘완성된다’.

이자벨 버드 비숍이 쓴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을 읽고 고무되어 쓴 이 시는 단순한 충동에 의해서 써진 시가 아니다. 김수영의 산문정신은 생활의 몰두 속에서도 끊임없이 에너지를 모으고 있었다는 것을 그 시간 동안 쓴 산문‘들’이 증명해준다. 시가 써지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변증법적이어서 단순한 공식으로는 해명되지 못하며, 시의 성패는 시가 발생하는 이 변증법적 과정에서 대부분 결정된다. 이런 시작 과정의 복잡성은 5·16 이후의 김수영이 무엇을 무의식적으로 노리고 있었는지 어렴풋하게 설명해준다. 시에 있어서의 침잠과 강렬해지는 산문의 비대칭이 말이다.

시가 언어 양식이라는 점은, 단지 시가 언어로 조직되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가 존재적 층위를 감당하기 때문에 제시된 명제이다. 김수영이 맥락 없는 난해시를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시 이전의 “사상”을 그렇게도 강조한 것은 어떤 이데올로기를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이 언어 작용을 통해 진행되는 사유 과정을 가지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시의 형식은 밖에서 즉 의식적으로 어떤 의도를 통해서 창출되지 않고, 자유의 이행이라는 모험을 통해 얻게 된 “온 몸”으로 안에서 밖으로 밀고 나가며 결정되는 것이다. 즉 이 시는 “변화는 끝났소”(「시」)라는 무기력한 자조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추정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것을 다만 이자벨 버드 비숍과의 만남이 터뜨려준 것이다.

2연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의 내용에서 발견한 19세기 말 조선 민중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을 옮겨놓은 것이며 4연부터 터지게 될 천둥소리의 전조에 해당된다.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 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펼쳐지는 거리의 장면과 대비된다.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은 김수영의 인식을 충분히 흔들어 놓았던 것 같다. 그 “극적인 서울”을 “아름다운 시간”이라고 말한 것은 단지 시적인 수사만은 아니다. “천하를 호령한” 권력이 사라진 그 길지 않은 시간에 대한 흥분이 그를 “더러운 전통”에 대한 긍정으로까지 인도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래서 3연에서 “시구문의 진창”이나 “아낙네들이/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우울한 시대”이지만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하는 것은 역사와 민중의 삶에 대한 통념적인 사고를 물구나무 세웠음을 의미한다. 김수영이 직접적인 언표로 지적한 것은 아니지만 근대 문명이 말살한 “파라다이스”적인 삶의 요소가 전통 사회에서는 일부 존재했다는 깨달음은, 4연에서, 한국의 근대시사에서 다시없을, 그 요소들을 파괴한 것들에 대한 독설과 욕지기를 쏟아내게 한다.

하지만 이 시에서 핵심은 바로 3연이다. 인식의 강렬함을 넘어 기이한 아름다움까지 띠는 3연은 지난 역사에 대한 대긍정의 파토스를 갖는다. 긍정은 물론 기회주의적인 용인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긍정은, 망국과 식민지, 전쟁으로 점철된 역사 그리고 김수영이 직접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에 대한 뼈아픈 긍정이다. 부정으로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고 말한 이는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이다. 그러나 피비린내는 역사를 긍정할 수 있는 토대 혹은 근거가 없다면 여기서 긍정이란 하나의 자기기만일 것이다. 김수영이 발견한 “황송한 역사”는 “왕궁의 음탕”(「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과는 관계없는 민중의 역사였던 것이다. 이자벨 버드 비숍의 책을 읽으면서 김수영이 경험한 희한한 시간은 (민중의 삶이 구성하는) 지속적이면서 동시에 비선형적인 시간이다. (민중의 삶을 선형적으로 재단하고 성립한 것이 바로 근대문명이다.)

“진보주의자와/사회주의는 네에미 씹”이고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라는 욕설은 바로 단절과 선형적인 시간에 대한 비판의식을 감안해야 이해할 수 있다. “진보주의자와/사회주의”는 단절적이면서 선형적인 시간관념을 현실에서 표상한다. 그들 역시 근대주의자였던 것이다. 이 단절적이면서 선형적인 시간은 (민중의 삶이 구성하는) 지속이면서 비선형적인 시간에 대립하며, 나아가 그것은 민중의 구체적인 삶을 식민화시켜야만 성립 가능하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치안국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는, 김수영의 이런 인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덧붙여 그는 「물부리」란 산문에서 “시단에서까지도 외국에나 갔다 온 영어 나부랭이나 씨부리는 시인에게는 점수가 후”한 식민 근성을 강력히 비판한 적이 있는데, 이런 매판성에 대한 극단적인 분노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라는 극언의 배경이 된 것도 참고로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시가 산문과 시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것은 김수영의 산문정신이 시의 형식을 강력하게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의 형식에 대한 도발을 아무렇지 않게 감행하는 것은,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형식>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는 자신의 시론을 유감없이 발휘한 탓이다.

김수영에게 시의 형식은 언제나 현실에 의해 유동적이다. 이제 선험적인 시의 양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시에 대한 정의는 정언명령 식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사실은 상식에 속한다. 여기에 시에 대한 정의는 부정적인 어법으로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시는 오로지 현실에 능동적으로 응전하며 그 몸을 계속 변형시켜 나갈 뿐이다. 이럴 때 시에 대한 정의는 “~이 아니다”가 아니라 “~이다”라는 긍정문으로만 가득하게 된다. 「거대한 뿌리」는 그 생생한 사례가 되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다.

아무튼, 이 시에서 김수영이 불러들이는 것은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같은 이 땅의 “무수한 반동”들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다 보내고 불러들이는 “무수한 반동”들은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벌어지는 서울의 “기이한 관습”의 유비다. 그 “기이한 관습”을 통해 다시 근대문명이 추방한 “파라다이스”를 불러들이는 것 자체가 일테면 “반동”에 해당되지만, 이미 그는 4연에서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는 지점을 통과해왔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억이 현재를 구성한다는 이 베르그송적인 깨달음은,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하게 한다.

“시적 인식이란 새로운 진실(즉 새로운 리얼리티)의 발견이며 사물을 보는 새로운 눈과 발견의 각도”(「시적 인식과 새로움」)라는 훗날의 주장도 바로 이런 경험들이 누적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눈과 발견의 각도”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시에서 김수영이 “무수한 반동”이라고 강력한 반어를 통해 명명한 존재들의 발견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이미 그 자신이 “반동”적인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들뢰즈는 어떤 글에서인가 니체의 ‘반시대성’을 해석하면서, 철학이란 영원을 추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오로지 반시대적일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만일 어떤 철학이 영원을 보여줬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반시대적이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시가 영원과 초월에의 포즈를 취하는 순간 전락이 이루어지는 사례들을 우리는 숱하게 목도해왔다. 시는 오로지 반시대적일 뿐이며, 반시대적이지 않은 시는 없다. 뒤집어 말하면 반시대적이지 않은 시는 시가 아니라는 말도 된다. 반시대적인 것은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시대정신’을 물구나무 세우는 “사물을 보는 새로운 눈과 발견의 각도”와 진배없다. 김수영의 시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면 그것은 그가 평생에 걸쳐 이 반시대적인 ‘자유의 이행’을 끊임없이 감행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김수영에게서 배워야 할 핵심은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품 전문은 저작권자와 협의하에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