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전면에서 국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소성리로 가는 길, 연이틀 내리던 비가 멎었다. 소성리로 가는 길옆에는 비 온 뒤의 물소리가 맑았고, 양봉농가의 벌통들이 즐비했다. 참외하우스와 마을을 감싼 안개들이 포근했다. 산들이 마을을 감싸 안았다.
원불교 정산종사가 탄생한 이 마을에는 70가구 8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소성리 주민의 가장 젊은 나이가 50세, 평균 나이가 85세다. 참외와 벼농사 그리고 과수를 재배한다. 소성리 마을회관 앞엔 사드를 반대하는 현수막이 즐비했는데, 원불교의 현수막들도 드문드문 눈에 보였다. 마을회관과 같은 건물을 쓰는 소성 편의점 앞에는 비닐로 둘러친 천막이 있었는데 1인 시위를 지원하는 간이 천막인 듯했다.
마을회관에서 롯데골프장으로 가는 진입로에는 ‘사드배치 결사반대’의 피켓을 든 초전면에서 나온 김정수(38세)씨가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하루에 아침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1시간씩 4번을 교대로 시위를 한다고 했다. 골프장을 드나드는 차량의 시간대가 이 시간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시위를 지원하러 온 초전면민 김동찬(46세)씨가 사흘 전에 국방부 직원들이 이 길을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일러주었다. 국방부 직원들이 아마도 염속산을 들리기 전에 이곳부터 다녀간 것 같다고 했다.
‘평화나비광장’에서 열리는 촛불문화제에 부인과 교대로 나간다는 소성편의점 바깥주인 강희성(70세)씨는 우리를 만나자마자 군수부터 성토했다.
“군수는 처세를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여기 소성리 주민 수가 적다고 이리로 사드를 던지는데 여기도 성주예요. 군민이 선출한 군수가 그런 망동을 한다면 군민들이 소환해서 옷을 벗겨야 해요. 물 맑고 공기 좋은 이 동네에 미군이 왔다 갔다 하는 꼬라지를 볼 생각을 하면 박근혜 대통령을 찍은 내 손가락을 끊고 싶어요. 대한민국 75%가 산악지대인데, 꼭 배치해야 한다면 사람의 피해가 없는 곳, 무인지역에 해야지 왜 이 청정지역에 사드가 들어온단 말입니까? 그 사람들은 한마디로 우리를 인간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지요. 소성리는 수천 년을 살아온 주민들의 보금자리예요. 원불교의 성지가 있는 곳이어서 만일 여기에 사드가 온다면 원불교의 신도 분들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미군들과 국방부 트럭에 깔려 죽을 각오를 하고 결사반대로 싸울 거예요. 참여연대에서 오셨다고 하니 부탁인데, 제발 강하게 써주세요.”
젊은 분들이 없어서 싸우는 데 애로가 없느냐고 물으니 “우리 힘이 모자라면 초전면의 젊은 며느리들이 워낙 똑똑하니 우리와 힘을 합쳐 똘똘 뭉쳐 싸워줄 것이다”며 “여기서 우리가 사드를 물리치지 않으면 이 싸움이 또 어디로 가서 백성들을 괴롭힐 것이냐”고 반문했다.
마을회관 안에는 늦은 점심식사를 마친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1070 학교종이 땡땡땡 어르신 한글학교’ 동기생분들이었다. 어디서 왔는가? 뭐 하는 사람인가? 이름은 왜 묻는가? 우리 한글선생님이 낯선 사람들이 이름을 쓰라고 하면 절대로 쓰지 말라고 했다며, 우리의 신상을 오히려 꼬치꼬치 캐물었다. 우리는 초전의 하나로 마트에서 사 온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펼쳐놓았다.
성주에 귀농하려고 성산리에 집터를 사놓았고 군청에도 촛불을 들러 자주 간다고 했더니 그제야 할머니들이 안심하신다. 이호기 할머니가 84세로 가장 젊었고 성영낙 할머니가 92세로 가장 연세가 많았다. 96세의 할아버지가 최고령인데 회관에는 나오지 않으셨다. 할머니들이 ‘사드 결사반대’의 푸른 머리띠를 능숙하게 질끈 동여매고 목소리를 높였다.
“머 쓰러 왔다고 카지만 저 사람들 믿지 마래이. 어떤 놈이 암까마구인지 숫까마구인지 알끼 머고. 이름 적어달라 캐도 적지 마래이.” (뭘 쓰기 위해서 왔다지만 저 사람들 믿지 말자. 어떤 놈이 암까마귀인지 수까마귀인지 알 것이 뭐고. 이름 써달라고 해도 적지 말라.)
사진에 캡션을 달 때 쓰려고 할머니들 이름을 물으니 우리에게 되돌아온 말이다. 언론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
“군수님도 돌아섰다 카던데 군수는 이제 ‘님’이 아니고 ‘놈’이다. 생각해 보소. 이제 ‘놈’ 아니요. 우리로 봐서는 이제 적이라 카이.” (군수님도 돌아섰다 하던데 군수는 이제 ‘님’이 아니고 ‘놈’이다. 생각해 보소. 이제 ‘놈’ 아니요. 우리로 봐서는 이제 적이에요.)
“우리는 고마 이제 대가 끊기는 기라. 여기에 그런 괴물이 들어오면 손주고 자식이고 언가이 오겠다.” (우리는 그만 이제 대가 끊기는 거야. 여기에 그런 괴물이 들어오면 손주고 자식이고 어지간히 오겠다.)
“저기 저 할마이는 얼매나 점잖았는데, 사드 온다 카고 나서부터는 욕쟁이가 다 됐는 기라. (웃음)”
“박근혜 대통령이 이럴 줄 알고 뽑았겠소? 저거 조상 묘 옆에 사드를 세우든가 청와대로 갖고 가서 지 혼자 끌어안고 죽든가.”
“까막눈으로 한평생 살다가 이제사 한글을 배우는데, 한글도 모르는 내가 촛불집회는 꼬박꼬박 나간데이.”
“여기는 물이 얼매나 좋아서 옛날에는 가재도 잡고 고디도 많이 잡았어. 시집와서부터 여서 쭉 살았는데, 인제는 여기서 죽지도 못하게 한데이.”
“10년 전 골프장 올 때도 우리가 싸웠는데, 독한 농약 때문에 그 맑은 샘물도 못 마시고 빨래도 못 해. 우리가 골프장에서 보상받은 건 먼지뿐이다. 이제는 싸드 문디가 온다하니 죽기 살기로 싸울 끼다. 우리는 골프장 반대하면서 데모 마이 배웠다 아니가.”
다음 주쯤에 이곳 소성리로 사드배치가 확정되면 어쩌실 것인지 할머니들께 물었다.
“이 만데이 저 만데이에 있는 양짝 질만 막으면 사드는 못 간데이. 그래도 갈라 카만 고만 내가 질에 들누불끼다. 슬마 지도 지 애비 애미 있을 낀데 우짤 끼고. 고마 여 있는 할매들 다 질까에 들누불끼다. 이 말 단디 쓰소.” (이 꼭대기 저 꼭대기에 있는 양쪽 길만 막으면 사드는 못 온다. 그래도 가려 하면 그만 내가 길에 드러누울 거야. 설마 지도 지 아비 어미 있을 건데 어쩔 것이야. 그만 여기 있는 할매들이 다 길가에 드러누울 것이야. 이 말 꼭 써주소.)
시집와서 한평생 소성리에 살며 소성리의 흙으로 돌아갈 할머니들의 원성은 드높았고 투쟁에 대한 결기도 놀랄 만큼 뜨거웠다.
뼈에 살가죽만 남은 소성리 할머니들이 머리띠를 묶고 야윈 팔뚝을 들며 ‘사드반대 결사반대’를 외쳤다. 눈물이 났다. 마을회관 방 정면에 걸린 1960년대의 소성리 전경 사진이 할머니들과 <작당> 당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글쓴이
대구참여연대 글쓰기 모임 <작당>
김성경/손영호/황순오
기사 작성 에디터 김수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