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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0살 때 6.25 피난을 갔었는데, 그때 이후로 이렇게 대피한 거는 처음이지. 1963년에 노곡동으로 시집와서 60년을 여기서 살았는데. 버스가 동네 사람들 실어나르고, 나는 작은아들 친구 트럭을 타고 여기 대피소까지 어제 저녁 8시쯤 왔어.”
29일 오전 다리가 불편해 한 손엔 지팡이를 짚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있던 곽화자(85) 씨가 담담하게 어제 대피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게 대구 북구 팔달초등학교에 마련된 대피소로 온 곽 씨는 저녁 8시 30분쯤 대피소에서 나눠주는 컵라면과 빵으로 늦은 저녁을 먹고, 텐트에서 잠을 잤다. 인근 동네에 사는 며느리도 들러 곽 씨를 살피곤, 대피소 자원봉사를 하다가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갔단다.

대구시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 기준 노곡동, 조야동, 서변동 등 지역 주민 3,514세대 6,500명에게 대피를 안내했다. 또 팔달초와 매천초, 동변중, 연경초, 동평초, 문성초, 북대구초 8곳에 661명이 대피했다고 밝혔다. 대구 북구청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20년 사이 산불로 주민들이 대피해야 하는 상황은 지역에서 처음이다. 북구청 산불 담당부서 과장은 “자세한 기록은 검토를 해야겠지만, 최근 20년 새 이런 일은 없었다”며 “21년도 관문동 태복산 산불이나 22년도 읍내동 야산 산불 정도가 큰 산불에 든다. 그때도 지금처럼 바람이 불었다면 커졌겠지만 그러진 않았다”고 전했다.
곽 씨에게 함지산 산불을 먼저 알려온 것은 곽 씨의 둘째 자녀였다. 노곡동에 있는 한 주택에 사는 곽 씨는 “그날 첫째 아들이랑 병원에 갔다왔는데, 둘째가 어제 오후 3시쯤인가 전화가 와서 불이 났다고 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산소 괜찮냐고 했다”며 “첫째랑 바로 산소로 가봤더니 반대쪽이라 다행히 괜찮더라. 그때만 해도 집이 위험해서 대피해야 할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다”고 했다.
곽 씨는 금방 진화될 줄 알았던 산불이 어느새 마을 전체로 뿌연 연기가 보이기 시작했고, 소나무 탄내도 났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곽 씨는 얼마 전 경북 의성 일대에서 시작한 산불이 동해안으로 번지는 걸 뉴스로 봤던 일이 떠올랐다.
곽 씨는 “며느리가 우리집 마당에 묶여있던 똥개도 데리고 왔다. 얼마 전에 경북에서 산불이 났을 때 엉덩이가 불탄 개 이야기를 하면서 얘도 생명인데 하더라”며 “개도 사람들 보고 좋아서 배를 까고, 요즘은 개 세상이라 데려왔다고 나쁘게 뭐라 하는 사람이 없더라. 나중에는 저기 앞에 묶어뒀다가 지금은 며느리가 다시 집에 데려다 놨다”고 말했다.
조야동 주민들은 노곡동 보다 먼저 대피에 나섰다. 주민들은 봉사자와 경찰, 공무원들이 가가호호 방문해 주민 대피에 힘을 쏟았다고 전했다. 전날 오후 4시쯤 경찰들 손에 붙들려 집을 나왔다는 구말저(88) 씨는 혼자 사는데다 거동이 불편해 대피 생각을 미처 못했다. 구 씨는 “연기가 많이 나서 사람이 안 보일 정도였다. 마당에 나와 있는데 경찰들 여럿이서 나를 붙들어서 차를 태워서 여기에 데려다 줬다”고 했다.
구 씨는 “나는 산골짜기 오두막에 사는데, 불이 나서 재실(제사를 지내는 곳)이 탔다. 집은 괜찮은데, 어떨지는 집에 다시 가봐야 알 것 같다”며 “또 불날지 어떻게 알겠냐. 사람 일은 한치 앞을 모른다. 내가 이렇게 대피할 줄 어떻게 알았겠냐”고 반문했다.

텐트 안에서 반려견 루비(4)와 함께 휴식을 취하던 이경운(37) 씨는 전날 저녁 8시 30분쯤 부모님과 함께 대피소로 왔다. 조야동 한 주택에 사는 이 씨는 “어머니 퇴근을 기다려서 가족끼리 차를 타고 함께 이곳으로 왔다. 오후에 문자를 받고 (불이 난 걸) 알았는데, 밖에 나와보니까 연기가 많이 났고 냄새도 엄청 심했다”면서 “그래도 이렇게 대피할 줄은 그때만 해도 생각 못했다. 일단 저희 집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는데, 집으로도 연기가 많이 와서 놀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또 산불이 발생할까 불안한 마음도 토로했다. 이 씨는 “저희 동네에는 주택과 빌라만 있다. 저희 집도 산이랑 인접해 있어서 불안한 마음이 크다”며 “오늘 쉬는 날이라 출근을 안 했는데 문자로 동료들에게 대피 알리니까 깜짝 놀라더라. 대구 살면서 이렇게 대피한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했다.
가족들 사이에 파고드는 루비를 바라보면서, 이 씨는 “개를 놔두고 와야 하나 고민을 했다. 대피소 생활은 불편한 것은 없는데 사람들이 많으니까 강아지가 좀 놀랬다. 지금 얌전히 있는 것도 무서워서 그렇다”며 “다시 이렇게 불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화재 경위 조사도 잘 이뤄져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현장지원에 나선 이미윤 북구 희망복지과 팀장도 이곳에서 밤을 지샜다. 이 팀장은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산불로 인해 이렇게 대규모 주민들이 대피한 것은 처음이라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팀장은 “수해로 몇 번 주민 대피가 이뤄진 적은 있지만, 이렇게 화재로 많은 주민이 대피소 생활 한 것은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처음 본 것 같다”며 “금방 꺼질 줄 알았는데, 어제 대피소에서도 새벽까지 연기가 보이고, 매캐한 공기가 심했다. 지금은 좀 괜찮아졌는데 조금 더 상황을 봐야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적십자사와 봉사센터, 주민자치위 등 관변단체, IM뱅크 등에서 식사 등 먹거리와 물품 제공과 현장 봉사로 애를 많이 써주고 계신다”며 “그렇지만 대피한 주민들은 얼마나 불편하시겠나.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들썩이고 계신다”고 상황을 전했다.
한편, 소방당국은 이날 낮 12시 55분께 주불을 진화했다고 밝혔다. 산불 발생 23시간 만이다. 인명 피해는 없었다.
장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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