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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2.3 윤석열 내란 사태는 시민의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윤석열 탄핵 심판이 지연되는 동안 대통령은 구속됐다가 풀려났고, 대통령실과 여당은 극단주의적 지지층과 거리를 두지 않고 오히려 자극하면서 우리 사회의 혼란과 갈등은 더욱 심화하고 있다. 극우적인 집단은 법원 폭동과 같은 사례에서 확인 했듯 사회 전면에서 가시화됐다. 윤석열이 4월 4일 비상계엄 선포 123일 만에 마침내 파면되면서, 내란 사태의 1막은 내려갔다. 이제부터 펼쳐질 2막에서 광장의 목소리는 어떻게 이어질까?
<뉴스민>은 시민의 이야기를 스스로 기록하고, 또 윤석열 파면 이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나아가야할 방향을 담기 위한 기록 모임 ‘윤석열 내란에 맞선 기록, 광장 해방일지’를 기획했다. 신청을 받아 뉴스민 광장통신원(시민 기록자) 7명을 모집했고, 이들의 이야기를 4월 2일부터 하루 1편씩 공개한다. 광장통신원으로 활동하진 못했지만 스스로의 기록을 남기고 싶은 시민도 환영한다. 문의는 nahollow@newsmin.co.kr.
1) 김민지: 광장에 나온 우리,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었다
2) 김아영: 나를 살게 한 ‘광장’
3) 권지현: 대구 광장에서 뿌린 씨앗, 과실은 모두의 것
4) 박다연: 대구 광장에서 혼자가 아닌 우리
5) 원하다: 경상도 K-장녀가 딸과 함께 윤석열 퇴진 광장 향한 이유
6) 유경진: 귀로 기록하는 윤석열 퇴진 광장
7) 김나경: 외롭지 않아, 동지들과 함께라면
소속: 없음
지난해 첫 수능이 끝나고서 나는 참 외로웠다. 수능을 망치고 나니, 수능 전까지는 잘만 놀았던 친구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벽을 친 것인지도 모른다. 3월이 되고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은 학교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다. 논술학원에 갔더니 원고지에 학교를 적으라고 하는데, 적을 곳이 없어서 비워 두었다. 친구들은 다 대학에 가고, 나만 ‘고등학교 4학년’이 되어 덩그러니 남겨졌다.
하지만 제일 친한 친구와 사이좋게 재수하니까 괜찮다. 이런 식으로 사이좋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정말로 그 친구만 있으면 된다. 모의고사를 친 날에는 시험이 어땠는지 종일 떠들고, 우울해질 시기엔 만나서 같이 밥을 먹고, 운이 좋으면 같은 학교에서 수능을 칠 친구. 그 친구 하나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재수도 힘들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실 친구도 재수하는 친구가 나밖에 없다고 했다. 우리는 하나라도 대학 가버렸으면 어쩔 뻔했냐며 웃었다.
내게는 대구에서 사는 것 또한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 이야기를 할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다.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내 편’하나가 없다. 계엄 당일 내 가족들은 계엄군이 국회를 짓밟는 모습을 보면서도, 민주당이 예산을 삭감했으니 계엄을 선포하고도 남는 것 아니냐고 했다. 엄마는 내가 너무 왼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자신은 다른(극우) 유튜브를 찾아봐야겠다고 했다. 항상 온화하던 고모는 계엄 선포가 정당했다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화를 냈다. 다른 친척들도 집회에 나가는 나를 빨갱이냐며 비웃었다.
친척들은 내게 탄핵의 근거를 대보라고 했다. 얼마든 삼권분립 이야기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편 하나 없이 5:1 정도로 공격을 당하면서 느낀 피로감은 선거철과 비슷했다. 비상계엄 절차니, 내란죄의 구성요건이니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날 밤 똑같은 장면을 본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비상계엄을 겪고 나서 조금이라도 변하길 기대한 내가 잘못이었을까.
대구 밖으로 나오면, 답 없는 수구 꼴통 동네 소리를 듣는다. 조선의 모스크바라는 옛 별명이 무색하게도 ‘보수의 심장’으로 불리는 곳. 선거가 끝날 때마다 정당별로 색칠 놀이를 해놓은 지도에서 TK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새빨갛고, 그 안에서 국민의힘을 뽑지 않은 20~40%의 존재는 깔끔하게 지워진다. 그것만으로 TK는 욕해도 되는 지역이 된다.
대구에는 ‘TK 콘크리트’를 부수겠다고 광장으로 나온 사람들도 있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을 싸워온 선배들이 있다. 민중가요를 외워서 나온 우리, 후배들도 있다. 간식을 이것저것 챙겨와서 주변에 나눠주고, 추운 날엔 따뜻한 커피를 선결제해 놓는다. 행진 중 도로에 장애물은 물론이고 커피만 쏟아져 있어도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조심하라고 외친다. 이곳의 광장도 서울과 다르지 않다.
나는 한겨울 날씨에도 광장이 집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다가와서 시비를 걸거나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는 사람이 있어도 집보다 편안했다. 서로 이름도 나이도 모르고 정체성도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똑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광장으로 나왔다. 그렇기에 서로를 의심할 필요가 없다. 혼자 실망할 걱정도 없다. 그동안 혼자 참 춥고 외로웠지만, 광장에 나가면 ‘내 편’ 수천 명이 있다. 그 사이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그래서 동지들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힘들지 않다.
책이 아닌 몸으로 배운 정치와 법
이론보다 실전을 먼저 배우게 됐지만
나의 첫 광장은 평생 잊지 못할 것

‘정치와 법’이라는 과목에 대통령의 계엄 선포권과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권이 나온다. 사실 시험에서 중요한 개념은 아니다. 시험에 나온 적도 없던 것 같다. 작년 초에는 이 부분을 필기하면서 영화 ‘서울의 봄’ 장면이나 떠올렸다. ‘전쟁이 나지 않는 이상 쓸 일이 없는 권한이네. 내 인생에선 계엄령 같은 건 안 겪어도 돼서 다행이야.’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분명 그래야 했는데···.
21세기 대한민국에, 2006년생인 내 인생에서 계엄령이라니. 카메라는 국회 창문을 깨는 계엄군과 본회의장 내부에 모인 국회의원을 번갈아 비추었다. 시민들은 국회 앞에 모여 ‘계엄 해제 독재 타도’를 외쳤다.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된 후, 국회의장이 안심하라고 했지만 나는 안심할 수 없었다. 계엄 해제는 대통령이 하는 거니까. 결국 생방송을 보면서 밤을 꼬박 새웠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법을 좋아했고, 법학과를 목표로 하면서 나름대로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행동은 서명 운동 참여 정도에 그쳤다. 정당 활동이든 노조 활동이든, 대학에서 관련 교양이나 들어본 후에 할 생각이었다. 대학도 못 갔는데 갑자기 실전이 찾아왔다. 박근혜 퇴진 시위 때는 초등학생이라 나가지 않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지난밤의 공포는 아직 생생했다. 하지만 안전한 집에 있었던 나보다 국회로 달려간 사람들이 훨씬 무서웠을 것이다. 나가야 할 이유는 많았고 나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4개월 전인 12월 4일, 이제는 익숙해진 동성로 길바닥에 앉았던 첫날을 떠올려 본다. 나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연락처를 저장하고, ‘대구가 보수의 심장이라고? 그럼 더 아득바득 나와서 그 심장을 멈춰주마’라고 다짐하며 지하철에 탔다. 내 맞은편에 민주노총 조끼를 입은 세 분이 앉았다. 중앙로역에 같이 내리고 나서, 길을 찾아보기 귀찮은 나머지 그분들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랬더니 자연스럽게 광장에 도착했다.
행진 중에 경찰이 계속 불법 집회를 해산하라고 시끄럽게 외쳤지만 별로 무섭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민주노총이 지켜준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경찰보다 이틀 뒤에 나올 수능 성적표가 훨씬 무서웠다. 그날 첫 집회에서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생각보다 집회는 무서운 게 아니었다.
12월 말, 트위터에서 피켓 하나가 꽤 유명해졌다. 윤리와 사상 수능 완성 교재에 ‘로크 오빠 보고 있지, 우리 그날 이후로 저항권 절대 잊지 않아’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것이었다. 그런데 배경이 동성로였고, 아무리 봐도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은 내 친구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인스타를 보니 친구의 스토리에 피켓 사진이 있었다. 나도 따라 하고 싶어서 친구에게 이런 문구로 피켓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결과물에 아주 만족했고 매번 열심히 들고 나갔다. 책이라 다른 피켓처럼 흔들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라이브를 하던 분이 다가와 저번 주에 ‘로크 오빠’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로크 오빠’ 친구라고 말했다. 맹자는 알겠는데 로크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분도 있었다. 친구와 함께 지역 뉴스에 자료화면으로 나가는 일도 생겼다. 응원봉이 없어도 괜찮았고, 생각보다 광장은 즐거웠다.
주변에서 동지를 다시 발견하다
긴긴 겨울 동안 외로웠을 사람들
12월의 어느 토요일, 행진 중간중간에 어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할 만큼 정말 격하게 화를 냈다.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나는 극우 세력이 따라다니며 시비를 걸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주변에서도 할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웅성거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할아버지의 외침이 귀에 꽂혔다.
“내가 박정희 유신 때도 나와가지고 반대운동을 했는데, 으이!“
내 외할아버지의 막내 동생 되시는 작은할아버지는 경북 농촌에 사신다. 몇 년에 한 번 뵐까 말까 하는 사이였기에 그분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었다. 그러다 설 연휴 첫날 작은할아버지 댁에 가게 됐다. 방에 둘러앉으니 역시나 윤석열 얘기가 나왔다. 작은할아버지는 광화문까지 가서 집회에 참석하셨다고 했다. 당연히 극우 집회라고 생각한 나는 속으로 실망하면서도 정치에 관심 없는 척하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 쪽 집회란다. 마침내 친척 중에 동지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활짝 웃으면서 내 피켓 사진을 보여드렸다. 헤어지기 전에 할아버지께서 허허 웃으며 내게 말해주셨다.
“내가 젊을 때 농활도 가고 했었는데, 너무 열심히는 안 나가도 돼.”
자유발언에서 어느 20대 남성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학교와 군대로 이어지는 또래 남성 집단의 반페미니즘과 혐오 문화를 지적하며, ‘우리의 분노는 동료 시민이 아니라 권력을 향해야 한다’고 외쳤다. 온갖 혐오를 쏟아내는 이들과 또래라는 이유로 묶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뽑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냐고 불평하면서도, 정작 광장에 나와 있던 동지들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중·노년으로 대표되는 ‘TK 콘크리트층’과 반페미니즘으로 뭉친 ‘이대남’을 경계하느라, 그 사이에서 견디고 있는 동지들을 가끔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123일 동안 기다린 한 문장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나는 법학도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6월 항쟁이 만든 헌법을, 느리더라도 조금씩 변화하는 법률을 사랑한다. 기본권을 보호하고 헌법을 수호하는 헌법재판소를 신뢰한 것은 물론이다. 주심이 윤석열과 어떤 관계든, 각자 정치 성향이 어떻든 공정하게 결정을 내릴 것이라 믿었다. 당연히 박근혜 때처럼 만장일치로 인용일 거라고, 모두가 목격한 내란의 밤을 부정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다림의 끝은 기약이 없었다. 한순간이라도 헌재를 의심한 적은 없었지만, 온갖 비관적인 추측이 쏟아지니 괜히 나도 불안해졌다. 집회에서 힘이 아니라 피로만 얻어오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던가. 행진 중에 경적을 울리며 위협하는 차량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다음주에 보자던 인사는 3월 중순쯤부터 다음주에는 보지 말자는 인사로 바뀌었다. 시국대회가 열리는 곳엔 이제 눈 감고도 가겠지만, 윤석열 파면으로 제발 그만 나오고 싶었다. 재수생의 빈약한 지갑 사정으로 교통비까지 한계일 무렵,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선고 기일이 정해졌다. 나는 지친 김에 광장에 나가는 것은 잠시 쉬고 새 피켓을 만들었다.
4월 4일 오전 11시. 언제나처럼 우리는 광장에 모였다. 나는 새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결정문 낭독이 시작되고, 20분 넘게 가슴 졸이며 기다렸다. 박근혜 때와 겹치는 내용이 나오자 파면을 확신한 사람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23일간 간절하게 기다린 한 문장.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중간중간 찝찝한 보충 의견이 있긴 했지만 8년 전과는 달리 모든 쟁점이 인정된 완벽한 승리였다. 만장일치 인용을 확신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환호가 아니라 울음이 터졌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주최 측이 ‘헌법 제1조’를 틀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눈물을 줄줄 흘리느라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목이 메었다. 옆에 있던 민주노총 동지가 우는 나를 안아주었다.
광장에서는 축제가 열렸다. 우는 사람은 나 말고도 많았지만 하나같이 입은 웃고 있었다. 기수들은 깃발을 신나게 흔들었다. 나는 둥글게 모인 사람들 사이에 껴서 다만세를 열창했다. 구호는 ‘윤석열을 파면하라!’에서 ‘우리가 승리했다! 사회대개혁 실현하자!’로 바뀌었다. 다들 4개월 동안 본 것 중에 제일 밝은 얼굴이었다.

저녁 7시 마지막 시국대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주변 카페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마트노조에서 나눠준 ‘윤석열 탄핵’ 배지였다. 분명 단단하게 달아둔 것이 어쩌다가 빠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안 그래도 극우들에게 공격당할까 봐 떼려고 했는데 알아서 떨어졌다. 자기 역할은 이제 끝났다는 듯이.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다시 만들 세계
다시 힘차게 전진할 수 있으리
동지들과 함께 선다면
26차 시국대회를 끝으로 윤석열 퇴진의 광장이 끝이 났다. 나는 시국대회에서도 두 번 정도 울었고, 끝나고 나서 아쉬운 마음에 한참 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토요일마다 허전한 기분은 아마 오래갈 것 같다. 이제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깃발을 집어넣고, 피켓을 모아두고, 응원봉을 소중하게 보관할 것이다. 지난 4개월이 영화라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이건 현실이다.
나는 박근혜 퇴진 시위에는 나가지 않았으므로 그때의 광장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박근혜가 파면됐는데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5년 만에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안다. 다음 정부에서 국민의힘이 위헌 정당으로 해산되면 속은 시원할 것이다. 하지만 내란을 옹호하며 혐오를 퍼트리는 다른 정당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제2, 제3의 윤석열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게다가 고공농성 중인 동지들은 아직 땅을 밟지 못했고, 전국에 투쟁사업장이 있다. 윤석열은 3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사회 이곳저곳을 망쳐놓았다. 노동, 인권, 교육, 복지, 문화 등 각자 한 가지 의제만 꺼내놓아도 머리 아플 만큼 많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12월 3일 이후 조금씩 달라졌다. ‘동지’와 ‘투쟁’이란 말도, 민중가요도, 붉은 머리띠도 익숙해졌다. 지하철역 세 개 거리쯤은 교통비를 아낄 겸 걸어갈 수 있는 다리를 얻었다. 우리가 이렇게 바뀌었는데 세상이 그대로여선 안 된다. 아직 우리가 필요한 광장이 수없이 많다. 그러니 언제든 깃발을, 피켓을, 응원봉을 들고 다시 광장에 모이자. 더 이상 서로가 외롭지 않도록, 우리 모두를 위해 이번엔 반드시 세상을 바꾸자. (연재 끝)
김나경 광장통신원
nahollow@newsmi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