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054] 다시 만난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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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다. 12.3 윤석열 내란 사태 이후 나흘만인 12월 7일 대구 동성로 한일극장 앞에는 2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고, 일주일 뒤인 14일 공평네거리 앞 왕복 6차선에는 4만 5,000여 명이 모였다. 4월 4일 마지막 시국대회까지 26차례의 집회에서 분노와 미래가 이야기될 수 있었던 건 모두 실무진의 노동 덕분이다.

광장이 열린 초기부터 무대 기준 왼쪽에는 깃발과 휠체어석을 배치하고 취재진이 무대를 가리지 않도록 안내됐다. ‘서로 평등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존중할 것’, ‘청소년에게 기특하다, 대견하다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것’, ‘여성, 청소년,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를 비하하는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내용이 적힌 집회 참가수칙이 매번 공지됐고 수어 통역사와 경사로가 배치됐다. 주황색 조끼를 입은 실무진과 자원봉사자들은 집회 참가자들이 안전하게 응원봉을 흔들 수 있도록 겨우내 뛰어다녔다.

윤석열퇴진 대구시민시국회의에 모인 대구경북 91개 시민사회단체와 민주노총, 진보정당의 명단을 정리하고 이들 간 이견을 조율하며 급변하는 상황에 맞춰 집회 일정을 잡고 공지한 것도 만만찮은 노동이었을 것이다. 매 집회에 쓰일 홍보 웹포스터와 피켓을 제작한 뒤 현장에서 나눈 것도, 무대·트럭·음향을 섭외한 것도, SNS에서 참가자 반응을 유심히 살펴 다음 집회에 반영한 것도 물론 이들이다.

엘도라도(삼성라이온즈 응원가), 바나나차차(뽀로로), 다시 만난 세계(소녀시대)부터 아파트(윤수일·로제 리믹스), 그대에게(신해철), 주문(꽃다지)까지 폭넓은 선곡 스펙트럼도 집회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지역 아티스트들의 공연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것도 이들이다. 개인적으로 대명동 록밴드 시나몬잼의 신곡을 무대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시나몬잼 멤버들은 공연이 없는 날도 광장에서 깃발을 흔들었다. 실무진의 빠르고 예민한 정세 판단이 꽉 찬 집회를 만들었다.

행인의 시비가 집회 참가자들에게 닿지 않도록 무대 앞뒤, 양옆에서 제재한 것도 이들이다. 과격하게 욕설을 하며 집회 대오 속으로 들어오려는 어르신을, 경찰보다도 먼저 조끼 입은 실무진이 안아서 멈춰 세운 장면이 기억난다. 행진 중에도 도로 위의 자동차가 경적 소리를 반복해서 내거나 운전자가 욕설을 하면 진행자는 오히려 목소리를 크게 냈다. ‘우린 그 정도에 물러서지 않는다’는 마음을 전달받은 듯 참가자들도 야유를 보내고 구호 소리를 키웠다. 실무진의 용기로 참가자들은 ‘함께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었다.

시민단체·노동조합 관계자, 성소수자, 장애인, 농민, 투쟁사업장 노동자 등 많은 시민이 무대와 트럭에 올라 발언했다. 사전에 신청자로부터 내용을 받아 혐오표현이 없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들의 일이었다. 전국적으로 이슈가 된 ‘TK의 딸’ 대자보 글쓴이가, 남태령 대첩 직후 경북 농민이,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직후에는 대구4.16연대가 무대에 올랐다. 농인유튜버의 발언도 기억난다. 수어통역사가 무대 밑에 앉아 마이크를 들고 농인유튜버의 손말을 전했다. 이 모든 게 가능토록 한 건 실무진의 상상력이다.

이들의 카메라는 모든 집회에서 참가자의 얼굴을 담았다. 핫팩과 먹거리를 나누고 집회 시작 전후 준비하고 정리하는 모습, 응원봉과 피켓, 깃발 등 취재진이 보지 않는 곳까지 구석구석 담았다. 취재진의 카메라가 ‘얼마나 많은 시민이 모였는지’에 주목했다면 이들의 카메라는 표정을 쫓았다. 광장에 온 그 어떤 언론사나 유튜버보다도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덕분에 분노하고 환호하고 상상하고 외치는 표정들이 생생하게 담겨 공유됐다.

▲4월 4일 저녁 7시 마지막 대구시민시국대회가 열렸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남은 참가자와 실무진, 자원봉사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민주노총 대구본부)

123일간 이어진 내란의 밤이 끝난 날 저녁, 공평네거리에서 열린 마지막 시국대회는 축제처럼 꾸려졌다. 서로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말하는 이 자리에서도 실무진과 자원봉사자들은 조끼를 입고 뛰어다녔다. 지난 4개월 집회를 만든 이들의 노동, 예민함, 용기, 상상력의 일부나마 기록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대구’는 이들을 빼곤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윤석열 탄핵 이후 세상이 하루아침에 변할 것 같았지만 나의 일상은 그대로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퇴임한다지만 아직 대구의 일상도 그대로다. 일상의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하는, 지난한 과제는 이제 시작이다. 어쩌면 이들의 노동을 되짚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광장은 여전히 열려 있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