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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2.3 윤석열 내란 사태는 시민의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윤석열 탄핵 심판이 지연되는 동안 대통령은 구속됐다가 풀려났고, 대통령실과 여당은 극단주의적 지지층과 거리를 두지 않고 오히려 자극하면서 우리 사회의 혼란과 갈등은 더욱 심화하고 있다. 극우적인 집단은 법원 폭동과 같은 사례에서 확인 했듯 사회 전면에서 가시화됐다. 윤석열이 4월 4일 비상계엄 선포 123일 만에 마침내 파면되면서, 내란 사태의 1막은 내려갔다. 이제부터 펼쳐질 2막에서 광장의 목소리는 어떻게 이어질까?
<뉴스민>은 시민의 이야기를 스스로 기록하고, 또 윤석열 파면 이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나아가야할 방향을 담기 위한 기록 모임 ‘윤석열 내란에 맞선 기록, 광장 해방일지’를 기획했다. 신청을 받아 뉴스민 광장통신원(시민 기록자) 7명을 모집했고, 이들의 이야기를 4월 2일부터 하루 1편씩 공개한다. 광장통신원으로 활동하진 못했지만 스스로의 기록을 남기고 싶은 시민도 환영한다. 문의는 nahollow@newsmin.co.kr.
1) 김민지: 광장에 나온 우리,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었다
2) 김아영: 나를 살게 한 ‘광장’
3) 권지현: 대구 광장에서 뿌린 씨앗, 과실은 모두의 것
4) 박다연: 대구 광장에서 혼자가 아닌 우리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듣고 처음 발걸음한 광장은 서울이다. 12월 3일,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속보 자막이 나왔다. 여느 때처럼 가족들과 거실에서 예능 방송을 보고 있을 때였다.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의원의 출입을 막고 국회로 침입하는 장면도 나왔다. 한국사 교과서, 영화에서나 본 계엄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국가를 지켜야 할 군인이 국회를 장악하고 국민에게 총을 겨누는 모습을 보며 국가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쌓였다. 그 주 주말인 7일, 서울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국회에서 윤석열 탄핵안을 심사하는 날이었다.
대구에서 국회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고 험했다. 지하철은 혼잡으로 인해 국회의사당역과 여의도역을 무정차 통과했고, 버스는 이미 꽉 차서 탈 수가 없었다. 빈 택시도 없어 샛강역에 내려서 30분을 걸었다. 어렵게 국회 앞으로 갔지만 국민의힘 의원들은 밤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 지역 국회의원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잘 울지 않는 편인데도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눈물이 났다.
사람들은 긴 싸움이 될 것이니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했다. 국회에 많이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첫 주와는 달리, 지역구에서 민심을 따르지 않는 국회의원을 압박하는 것이 중요한 상황으로 보였다. 지역구가 대구인 국민의힘 의원들은 대체로 탄핵 반대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모욕적이었다. 이곳 대구의 윤석열 퇴진을 외치는 광장, 대구시국대회에 더 자주 나가 힘을 보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구의 목소리가 더욱 무겁게 가닿기를 바랐다.

대구에서 탄핵을 촉구하는 목소리
어느 곳 보다 무겁게 다가왔을 것
아파트 창문 너머로 비친 불빛에
고립되지 않았다는 안도
12월 14일, 국회에서 재차 윤석열 탄핵안을 심의하는 날. 그날 대구에서도 윤석열 퇴진을 염원하는 인파가 쏟아졌다. 당초 집회가 이어지던 구 한일극장 앞에서 2.28 기념중앙공원 앞 도로로 집회 장소가 변경되었다. 편도 차선을 가득 채운 인파는 반대편 차도까지 넘쳤다. 경찰은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듯 뒤늦게 통제에 나서려 했지만 쏟아지는 인파를 막을 수는 없었다. 탄핵안이 가결된 순간의 환호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광장의 환호를 가슴에 안고 익명의 시민이 선결제를 해둔 식당에 들렀다. 가게 사장님은 미소를 가득 머금고 모든 테이블에 서비스로 술을 주었다. 참 따뜻한 겨울밤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윤석열 퇴진 광장이 4개월 넘게 이어지리라 상상하진 못했다. 따뜻한 겨울밤은 짧고, 광장에 나선 우리 앞에는 더욱 길고 어두운 밤이 기다릴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1월 11일은 시국대회를 마치고 4.3km 떨어진 국민의힘 당사까지 함께 행진했다. 우리를 향해 욕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조롱하는 사람도 있긴 했다. 반면 가게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드는 사장님도 있었고, 버스를 기다리다 행진 대오를 향해 환호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지나가시던 어느 할아버지는 젊은 사람들 그만 고생시키고 나오라고 소리치셨다. 국민의힘 당사에 도착한 우리는 구호를 외쳤다. 그때 당사 뒤에 있는 아파트의 한 집에서 창문을 열었다. ‘시끄럽다고 욕하려나 보다.’ 내 걱정은 빗나갔다. 창문을 연 집에서 무엇인가 반짝였다. 또 다른 집에서 창문 너머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더 잘 보이도록 거실 전등을 끈 집도 있었다.
마음속으로 품었던 의문이 있었다. 광장에 나온 사람들이야 윤석열 탄핵을 바라는 마음이겠지만, 광장 밖의 사람들은 어떨까. 혹시나 우리는 광장에서 고립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불빛을 본 순간,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저마다의 이유로 광장에 나오지 못했을 뿐, 같은 마음인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을 것이라고.
헌재 심판 지연되며 극단적 행동도 부쩍 목격
위기의 순간마다 광장을 채운 시민들이 희망

윤석열이 구속되는 날, 법원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부쩍 폭력적인 상황이 자주 발생하는 듯 느껴졌다. 대구에서 행진하고 있는데, 중년 남성이 욕을 하며 달려드는 모습도 봤다. 경찰에게 제지되긴 했지만, 이야기로만 들었던 상황을 내 눈으로 직접 보니 심란했다. 혼자였다면 무서웠겠지만, 행진하는 무리 속에 있으니 무섭지 않았다. 대오 밖의 시민들은 우리가 아닌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적극적으로 그를 말리는 목소리도 있었다.
3월 7일, 윤석열 구속이 취소됐다. 이날 이후 대구에서는 매일 아침저녁 선전전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회사가 멀어 선전전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지나가며 응원하는 시민들도 많고, 빵이나 음료를 주고 가시는 분도 계신다고 들었다.
이것이 대구의 모습이다. 함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위기의 매 순간 시민들이 여력을 내 거리를 채웠다. ‘대구의 민심’을 방패 삼아 내란에 동조하는 국민의힘에 묻고 싶다. 대구의 민심에 관심이 있기는 하냐고. ‘대구는 안 된다’, ‘대구만 계엄 하라’와 같은 지역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사람들에게도 묻고 싶다. 대구에 와 보기는 했냐고. 우리를 보기는 했냐고. 대구에서 윤석열 파면을 외치며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 있냐고.
4월 4일, 윤석열이 파면되면서 대구에서 끈질기게 이어진 광장도 일단락을 맺었다. 이제 우리는 일상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 광장에 나와서 나는 여러 이유로 고립감이나 무력감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광장을 경험한 시민, 그리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싶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우리는 할 수 있어요. 계속 연결되어, 일상의 광장에서 만나요.

박다연 광장통신원
nahollow@newsmi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