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말이죠? 저도 오늘 했습니다”
오구라 신 씨가 A4 종이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종이에는 지난달부터 진행하고 있는 한국 사드배치 철회 백악관 청원문이 인쇄돼 있었다. 오구라 씨는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다시 들어 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에 수줍게 청원문을 들어 보였다.
7일, 일본 엑스밴드 레이더 마을 방문
아름다운 신인해안 깊숙한 곳에 위치
백악관 청원 동참했다는 일본 주민 만나
지난 7일 방문한 일본 교탄고 시 우카와(宇川)지구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오구라 씨는 우카와 주민이다. 지난 4월부터 미군기지 건설을 우려하는 우카와(宇川) 유지모임(이하 우려하는 모임)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우려하는 모임은 지난 2013년 우카와 지구에 엑스밴드 레이더 기지 건설이 결정된 이후 만들어진 기지 건설 반대 모임이다. 미츠노 미츠루(67), 나가이 토모아키(59) 씨 등 10여 명이 함께 만들었다. 엑스벤드 레이더는 미국의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핵심 구성체다. 레이더 기지는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014년 12월 가동을 시작했다.
이날은 미군 엑스밴드 레이더 기지 반대 교토연락회(이하 교토연락회)가 매달 두 번 진행하는 레이더 기지 현장 방문 활동을 하는 날이었다. <뉴스민>은 교토연락회의 도움을 얻어 우카와 지구를 방문했다. 오전 9시 15분께 교토 중심가에서 출발한 일정은 휴가철 피서객들과 휩쓸리며 시작됐다.
이케다 타카네 교토연락회 사무국장(44)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고속도로 위에서 “휴가철이라 차가 많네요. 예정보다 더 걸릴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삼삼오오 가족이 타거나, 연인이 탄 차량이 같은 방향으로 가다 서다 했다. 수많은 차량이 향하는 곳에는 일본의 유명한 국립공원, 산인해안(山陰海岸)이 있다. 우리나라 동해와 마주한 산인해안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엑스밴드 레이더 기지도 산인해안 국립공원 안 깊숙한 곳에 있었다. 명성에 걸맞게 레이더 기지로 향하는 해안가 곳곳에서는 캠핑을 즐기는 관광객이 꽤 보였다. 심지어 유람선도 오간다고 이케다 사무국장은 설명했다. 놀라움을 표시하자 이케다 국장은 “사실 이곳 사람들 말고 다른 일본인들은 레이더 기지에 크게 관심이 없어요. 잘 모르죠”라고 안타까워했다.
국립공원 안 한적한 시골 마을. 주민 1,500여 명이 거주하고 약 35%는 65세 이상 노년층이라는 곳. 교토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며 4시간은 족히 가야 하는 외딴곳. 그런 곳에 엑스밴드 레이더 기지가 있었다. 일본인들이 잘 모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조건이긴 했다. 한국도 만약 레이더 전방 1.5km 내에 주민 1만4천 명이 사는 성주읍이 없었다면, 이만큼 이슈가 됐을지는 미지수다.
철조망이 오래된 절과 레이더 기지 구분해
동료와 수다 떨기 바쁜 기지 경비 군속들
한적한 왕복 2차선 시골 도로를 달리다 보니 ‘청종산 구품사(淸淙山 九品寺)’라고 크게 적힌 입석(立石)이 보였다. 입석을 왼쪽에 두고 좌회전 하자 꽤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이 공터 오른쪽으로 이미 많은 한국 언론이 다녀간 엑스밴드 레이더 기지가 자리했다. 우리 일행이 모여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사이 나가이 토모아키 우려하는 모임 사무국장이 다가왔다.
나가이 국장은 일행을 이끌고 구품사 경내로 들어갔다. 철조망과 그 위에 덧붙은 경고문이 절과 레이더 기지를 구분했다. 이미 많은 언론이 오간 탓인지, 기지 내 경비들은 우리 일행을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검정색 유니폼을 입은 경비는 어수선한 철조망 너머를 가끔씩 쳐다볼 뿐 동료와 수다 떨기에 바빴다.
이케다 국장은 경비들은 정규 미군이 아니라 경비업체 소속 ‘군속’이라고 표현했다. 군속 70명은 기지에서 30여 분 떨어진 숙소에서 숙식하면서 기지를 경비했다. 이케다 국장은 “정규 미군은 20명 정도예요. 전체 160명 정도가 근무하는 거로 파악되는데, 나머지는 모두 군속이거나 레이더 기술자들이에요. 문제는 일본인 근무자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이 안 되는 거죠”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교토연락회나 우려하는 모임은 레이더 기지 건설 후 가장 큰 걱정거리를 전자파나 소음 문제보다 치안을 꼽았다. 레이더 배치 직후 큰 문젯거리였던 레이더 발전기 소음 문제는 6개 발전기마다 머플러(소음기)를 2개씩 부착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됐다. 미츠노 우려하는 모임 대표는 “그래도 여전히 바람 방향에 따라 소음이 들린다”고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일본 방위성은 소음 문제 해소를 위해 발전기 대신 상용 전기를 끌어다 쓸 준비를 하고 있다.
전자파 문제도 지금 당장 체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미군속으로 인한 치안 문제는 당장 피해가 드러나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케다 국장은 기지 설치 이후 최근 1년 동안 이른바 ‘Y넘버’ 차량으로 인한 교통사고가 24건 발생했다고 말했다. Y넘버는 주일미군이 사용하는 차량 번호 앞자리를 의미한다. Y넘버 차량의 악명은 한국인들에게도 유명해서, 일본을 자주 찾는 한국인 여행객들에겐 Y넘버를 조심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을 정도다.
24건 중 인명 사고가 발생한 사고는 2건에 그쳤다곤 하지만, 교토연락회나 우려하는 모임은 언제 큰 사고가 날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더구나 지난 5월 오키나와에서 미군속이 20대 일본 여성을 살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 일로 미국과 일본은 미일간 주둔군 지위협정(SOFA)를 개정하기도 했다. 이케다 국장은 “그런 일이 우카와에서도 발생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걱정했다.
“매일 저녁 1,000여 명 모일 수 있는 동력 무엇이냐”
“처음 여권 만들었다. 언제든 도울 게 있으면 불러 달라”
기지를 둘러본 후 미츠노 우려하는 모임 대표를 비롯한 우려하는 모임 관계자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준비됐다. 오구라 씨는 이 자리에 미츠노 대표 등과 함께 자리했다. 이들은 성주의 이야기를 비교적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매일 저녁 진행되는 성주 촛불 집회 사진을 보여주자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모임 회원 마츠다 미츠오 씨(78)는 “매일 저녁 1,000여 명이 모일 수 있는 동력이 무엇이냐”고 묻기도 했다.
미츠노 대표는 “성주도 언론을 통해 소식을 처음 알게 됐다고 들었다. 우리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청천벽력 같았다. 우리가 있는 교탄고 시 인구도 5만 정도지만, 우리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싸움을 성주가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케다 국장은 “우려하는 모임에 나가이 국장은 아직 한 번도 해외를 가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번에 성주 싸움을 보고 여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언제든, 성주에 도움을 주러 갈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달라고 합니다”고 성주에 대한 일본의 관심을 대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