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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상의 첫 시집 <사랑의 뼈들>(도서출판 삶창, 2015)은 몸에서 흘러나온 시로 가득하다. “아픔에게도 몸이 있어 / 저도 쉴 곳이 필요했나보다 / 몇 달 전부터 왼쪽 어깨에 내려앉았다 / 통증이 예리해서 부위를 딱 짚을 수도 없고, / 목과 어깨 부근이 마냥 우리하다 / 먹이 한지에 스미듯, 아픔이 어깨에 번졌다 / 나를 통해 제가 꽃 피우는 것이다”(‘떠도는 아픔을 몸에 모시다’ 전문) 몸은 아픔을 받아내는 꽃이다.
정신(영혼)과 육체를 나누는 이분법적 사유 속에서 꽃은 언제나 정신이거나 정신이 다다른 이데아를 가리켰지 몸을 가리킨 바 없다. 정신을 우위에 놓고 육체를 폄하하는 그리스-기독교적 사유에 비해 수신(修身)을 통해 성인(聖人)에 이르는 절차를 중요시한 유가적 사유는 몸을 천대하지 않았다. 그런 뜻에서 유독 아픈 몸을 꽃(이데아)이라고 부르는 시인은 영육이분론에 힘껏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폐경’의 전문이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부두에 배 들어올까, 배때기 뒤집으며 퍼덕이는 황금의 고기 가득 싣고 내 님은 기어이 올까, 배 들어오면, 배만 들어오면, 그 말 이젠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해진 그물 같이 가랑이 벌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금빛 고기 떼는 오지 않는다 씨발, 인생 한 방이면 돼, 홍콩 느와르 같은 대사를 몇 번이나 혼자서 씨부리는 저 여자, 한쪽 무릎 세우니 흘러내린 치마 밑엔 허연 허벅지, 늘어진 맨살에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고운 살은 억센 이빨한테 다 뜯기고 참빗 같은 가시만 남아 화투패 쓸어 담는 저 여자” 이 시에 나오는 “씨발”은 반드시 요구되고 없어서는 아니되는, 필요불가결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시에 터진 저 욕설은 언어의 예술인 시를 엘리티즘으로부터 끌어내려 땅에 비끌어맨다.
꽃이 아픈 이유는 몸이 배고프고 병들고 이별을 겪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아픔을 짐승에게서도 발견한다. 펭귄(‘사랑은 발등으로’), 까마귀(‘목숨 2’), 개(‘분개구리밥속’), 나비(‘천적’), 개미 혹은 선충(‘사랑 혹은 상처’), 새(‘새는 없고 발자국만’) 등이 그러한 시들이다. 불교의 윤회관은 짐승에게도 영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수긍하지만 그리스-기독교적 사유에서는 그런 가능성이 없다. 시인의 종교는 알 수 없지만, 위의 시들은 시인이 인간에게는 있고 짐승에게는 없다는 인간 중심의 영육이분론을 거부하고 있음을 분명히 해준다.
이 시집에서 가장 긴 시는 대구 지하철 화제 참사(2002), 경주 마우나 리조트 붕괴 참사(2014), 세월호 침몰 참사(2014) 때 죽은 학생들을 추모하는 ‘억장, 무너지다’이다. 일부를 보자. “밥때가 되면 밥물이 끓듯, 슬픔도 끓을 것인데 / 국수를 먹을 때면, 슬픔의 다발이 / 그대로 남아 젓가락에 걸려 있을 것인데, / 살아 있다는 것이 이리도 욕되고 / 먹는 일이 짐승처럼 느껴져도 되는 것일까 /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 시도 때도 없이 불어나는 이 노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 … // 이 밥 냄새를 맡고 현관문을 열며 / 니가 들어 왔으면 좋겠다 / 지하철에 타 죽고, 눈 하나 견디지 못한 / 지붕에 깔려 죽고, / 이번엔 물에 갇혀 죽은 내 새끼들아, / 지하에서, 땅에서, 물밑에서 죽임을 당하고 또 당하였으니 / 하늘만이 남았다 / 이제는 하늘이 살아남은 우리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새끼’는 욕설로도 쓰이지만, 원래는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짐승을 일컫는다. 그런데 어떨 때 이 말은 극진한 슬픔의 표현이 된다. 참척(慘慽 :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을 당한 모든 부모는 제 자식을 “불쌍한 내 새끼”라고 부른다. 까닭은 가장 원초적인 출발점에서 인간이나 짐승은 다 함께 생명을 지녔으며, 천사처럼 혼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몸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고 있다가, 배고프고 병들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할 때에서야 비로소 상기한다. “며칠째 잠이 오지 않아 / 다리를 오그리고 등을 말아보았다 / 오래된 슬픔에서 수염이 돋아났다 / 흙내가 났다 / 다 잊으라고 했다 / 진흙 이불 빠져나오니 / 쌀밥 같은 아침이 먼저 와 있었다”(‘토하(土蝦)’전문)
장정일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