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사적 처벌과 공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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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수령 이재연李載延이 선산부에 구류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선산에 살고 있는 노상추는 이 소식을 듣고 평소 알고 있는 사람이라 위로의 편지를 보냈지만, 알고 보니 죄명이 가볍지는 않았다. 살인이었다. 현재와 달리 조선시대의 경우 범죄에 대한 처벌은 피해만큼 유사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이 범죄가 확정되면 이재연은 관직이 문제가 아니라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었다. 거창 수령으로서 업무를 처리하다가 사람이 죽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노상추가 이렇게 추정했던 이유는, 이재연이 칼(枷)까지 쓴 채 갇혀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신분제 사회인 탓에, 양반에 대한 형구 사용을 최소화했던 관행이 있는데다, 한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의 체면을 생각하면 굳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양반이나 관료의 경우 다른 일반 범죄인과 분리하기 때문에, 굳이 칼이나 착고까지 채우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고문을 동반한 심문까지 있었다고 하니, 이재연에게는 이러한 사정이 통하지 않았던 듯했다.

이재연이 연루된 이 사건은 사망자의 죽음 이유가 전적으로 이재연에게만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물론 죽음에 대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재연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망자 죽음에는 다양한 원인이 복합되어 있던 듯하다. 이러한 점까지는 고려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내용을 좀 더 살펴보기 위해 이 기록보다 한 달 전인 1825년 음력 2월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이재연의 이웃 마을에 최가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최가는 자기 며느리를 심하게 구박해, 그의 며느리가 이를 견디다 못해 연못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생겼다. 최가와 며느리 사이의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구박을 했다고 하니, 그 소문이 어떻게 났을 지는 짐작 가능하다. 이로 인해 이재연 역시 최가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필 최가가 그 며느리 시신을 이재연의 집에서 잘 보이는 곳에 묻으면서 갈등이 생겼다.

안 그래도 최가의 소행을 괘씸하게 생각했던 이재연은 이를 용인할 수 없었다. 최가의 신분이 상민이어서, 이재연은 그를 강제로 잡아들였다. 거창 수령으로서의 업무 수행은 아니었지만, 정의 구현 차원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강제로 잡혀오는 과정에서 이미 수많은 몽둥이찜질이 있었고, 잡혀 온 뒤에도 일단 두들겨 패고 난 다음 이재연의 집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시신을 묻은 연유를 캐물었다. 그리고는 마당 근처에 있는 연못에 던져 넣었는데, 아무리 봄기운이 밀려오는 음력 2월이라 해도 최가는 추위에 떨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본 이재연은 그제서야 마음이 누그러져 최가를 물 밖으로 꺼내 따뜻한 곳에 두도록 명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재연 입장에서는 이렇게 일단락시키려 했는데, 최가가 집으로 돌아간 뒤 사망하면서 일이 커졌다. 당시 최가에게는 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형에게 밥도 주지 않고 치료도 하지 않아 결국 사망에 이른 것이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최가의 동생은 자기 잘못을 숨기기 위해 이 모든 책임을 이재연에게 돌렸다. 이재연이 살인사건 피의자가 된 이유다.

조선시대 형사 시스템은 사람의 사망에 대해 유난히 엄격했다. 물론 천민에 대한 자의적 처벌도 있고, 권한이 없는 지역 공동체가 사법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단 사람이 죽고 이것이 관아에 고발되면, 수령은 엄격한 절차를 지켜 죽음의 원인을 조사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2번 이상의 검시와 조사보고서, 특정된 범인에 대한 복수의 심리 등을 통해 사안 전체가 보고되도록 명문화되어 있었다. 최가의 사망에 대한 고발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선산부로서도 절차를 지켜야 했고, 이는 피의자가 거창 수령이라 해도 예외일 수 없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 조선의 신분제가 가진 불합리성을 기반으로 말 그대로 ‘영화의 소재가 될 만한 특별한 일들’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선 역시 고발되어 사건화된 살인의 경우 ‘억울한 죽음’을 방지하기 위한 엄격한 시스템이 작동되었고, 이는 거창 수령이라 해도 예외가 없었다. 특히 최가의 행위를 옳지 않게 평가해도, 그에 대한 사적 처벌에 대해서는 강한 공적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그러한 행위의 주체를 우리는 ‘국가’라고 부른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