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자들] ㉖ “지역에서, 자조하지 않고, 욕심없이”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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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2.3 윤석열 내란 사태’로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무도한 자에게 권력을 내어주었을 때 국가시스템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처절한 경험을 하며, 대한민국은 다시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21세기의 민주주의는 형형색색, 각양각색의 응원봉처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뉴스민>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에서 응원봉을 든 그들, ‘민주주의자’들을 만나고, 기록한다.

경주 북정로. 빠른 속도로 팽창한 도시의 전형을 따르는 원도심이다. 구 경주역 인근에 형성된 상권으로, 성매매 집결지가 있고 공실률이 높다는 점도 전형적인 원도시의 모습을 따른다. ‘원도심’, 혹은 ‘구도심’이라고 하면 이러한 ‘쇠퇴’나 ‘낙후’의 이미지가 연상되기 마련이지만, 실제로 그곳에서 조금만 거리를 내다봐도 의외의 활력도 감지된다. 공실에 아시아마트, 이주민들이 이용하는 휴대전화 가게가 새롭게 들어선다. 이주민들의 발걸음 소리가 조용한 거리를 채운다.

북정로에 자리 잡은 독립서점 ‘너른벽’의 샛노란 간판. 임대 딱지가 붙은 공실과 옷 가게 사이에 자리 잡은 너른벽에는 간판에는 마치 주문할 메뉴판처럼 ‘평화’, ‘망명’, ‘탈중앙’, ‘국가’, ‘퀴어’, ‘장애’, ‘성병’, ‘변방’, ‘타자’, ‘탈식민’과 같은 개념어가 나열돼 있다. 주변 환경에 비해 돋보이긴 하지만, 위화감은 없이 어우러진다. 안으로 들어서면 큐레이팅 된 책들과 함께 너른벽에서 발행한 ‘북정로 소식지’도 눈에 들어온다. 소식지 대부분을, 이주민을 포함한 지역 주민들의 얼굴이 채운다.

너른벽 대표 박슬기(31) 씨에 따르면 낙후되어 가기만 한다고 생각했던 지역의 모습은 오히려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경주를 대표하는 정치나 행정이 다소 정체됐을 뿐. 그래서 슬기 씨의 화두는 원도심에서 독립 서점을 열 때부터 지금까지 주변부로서의 ‘지역’에 대한 재해석이다. 슬기 씨에게 북정로는 쇠퇴했다거나 낙후됐다고만 하기에는 다소 어색하며, 오히려 점차 다양성이 깊어지는 곳이다.

정치가 다소 정체된 점은 12.3 윤석열 내란 사태 이후 지역사회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관변단체의 세가 강하고, 윤석열 내란에 대해서도 옹호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하지만 이곳 경주에서도 상식의 회복을 위한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정치적 환경이 녹록잖아서, 그만큼 상식을 말하기에 첨예한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슬기 씨는 경주에서 열린 작은 광장에 꾸준히 나서고 있다. 슬기 씨는 개인이 돋보이지 않도록 기록해달라며 누누이 강조하면서, 지역에서도 그 자리에서 상식의 회복과 변화를 위한 노력이 있으며, 이를 꾸준히 이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너른벽 서점

Q: 경주에서 독립 서점을 어쩌다 열게 됐나.

광주 태생이다. 서울에서 일해보니 그곳에선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여러 활동이나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외국인학교에서 일도 해보고,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반성매매 관련 활동에도 함께 했다. 하지만 결국 이 도시에서는 파편화된 어떤 것으로 남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다 감포에서 하는 청년마을살이 프로그램에 지원해 짧게 살게 됐다. 경상도에 대해서는 막연히 ‘보수의 심장’ 이런 이미지가 있긴 했는데, 특별한 거리낌은 없었다. 막상 와보니 감포에만 있기엔 따분했고 시내에 나와서 원도심도 둘러봤다. 여기서 뭔가 재밌는 걸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딱 들었다. 평소 익숙한 콘텐츠인 책을 매개로 독립서점을 만들고 활동해 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란 게 물성이 있어서, 사람들과 연결되기 쉽다. 책을 매개로 책방에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 5개월 만에 부동산 계약하고 책방 시작한 게 2023년 2월이다.

Q: 지방 중소도시 원도심은 있는 상점도 빠져나가는 추세인데, 이곳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건 쉽지 않을 거 같다.

외부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할렘’일 거다. 성매매 집결지도 있어서 소위 말하는 도시재생도 쉽지 않은 곳이고 그래서 낙후됐다거나, 인적 자원도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쉽게 ‘도시재생으로 싹 밀고 제2의 황리단길로 재개발해야 해’라고 말한다. 실제로 금리단길이라고도 이름 붙였는데, 잘 안된다. 이곳은 여전히 주변부이며, 그래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책방 자체는 운영이 쉽지는 않다. 초반에는 지역사회 네트워킹이 잘되지 않았는데 여기저기 많은 곳에 다니면서 사람들과 만나다 보니 지금은 어느 정도 연결망이 구축되긴 했다. 여전히 수익은 많이 나진 않지만, 지역에서는 유지비와 생활비가 비교적 적게 들어서 버틸만 하다.

Q: 2년 동안 경험한 경주는 어떤 곳인가?

다채로운 곳이다. 경주시를 이루는 구성원이 다양하다. 원도심이라 더 체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옆집이 파키스탄 출신 이주민이 운영하는 아시아마트이고, 근처에 베트남 이주민이 운영하는 쌀국숫집, 인도네시아 친구가 하는 핸드폰 가게도 있고. 성건동으로 넘어가면 고려인 집성촌도 있다. 이주민이 이 거리를 새롭게 채우고 있다. 이들을 보면 뭔가 새로운 느낌도 드는 반면에, 정책, 조례 같은 제도는 지금의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곳에는 성매매 집결지도 있는데, 여기서 성매매 집결지 아카이브 작업을 하고 있다. 담당 공무원, 시의원 불러서 여기서 간담회도 했는데, 이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관에서는 특별한 의지가 없다.

Q: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경주의 분위기가 궁금하다.

당시 퇴근해서 뻗어있는데 트위터에 속보가 뜨더라. 제가 경주에서 독립 서점 하면서 활동하다 보니 저한테 몇몇 친구들이 새벽에 전화가 왔다. 그 목소리에서 약간의 흥분과 약간의 기묘한 고양감이 느껴졌다. 그 친구들은 평소에 정치 의제에 관심이 없는 친구들이었는데 정치 격변의 현장에 있다는 듯한 느낌 때문인지 들떠있었다. 경주역에 가서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던데, 아마도 국회에 계엄군이 진입하는 걸 보며 서울에서 시민들이 달려 나가는 걸 보며 그런 현장에 이곳에서라도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한다. 결국 새벽에 거리에 나가서 피케팅을 했다고 하더라. 나도 상황을 확인하면서, 4일에는 대구 집회에 나갔다. 심장이 많이 뛰었다. 계엄사에서 속보로 언론, 출판을 통제한다고 하고, 여기는 간판만 봐도 딱 걸릴 수 있는 곳이니까. 실제로 지역에서 몇몇이 ‘빨갱이냐’는 지적질도 한 적이 있었다. 경주는 관변단체 세력이 있는데, 그분들은 (계엄 옹호) 전단지 돌리고 나팔 불고 그런다. 그분들은 ‘아름다운 계엄’ 뭐 이렇게 얘기하는 거 같다. 그래서 또 무서운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공포심이 들었다.

Q: 경주에서 대구 집회에 참석했는데, 경주에서는 집회가 바로 열리지는 않았나.

초반에 집회 개최에 나서는 단체 사이에 손발이 잘 안 맞았던 것 같다. 그래서 최초 집회는 12월 중순경부터 있었다. 집회 말고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했고, 그래서 12월 5일 비상계엄에 저항하는 읽기 모임을 꾸렸다. 평소 교류하던 청년, 여성 대여섯 명이 모여 한나 아렌트를 읽었다. 인민, 민중, 혐오, 극우 파시즘과 관련한 대화를 했고, 어떻게 우리가 지역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하지만 경주 지역사회 분위기는 초반에 전반적으로 평화롭고 잔잔했다. 대구에 가서야 달라진 분위기를 느꼈다. 경주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할 장이 없다는 느낌이다. 광장이 열리지 않은 느낌이다. 경주에서는 봉황대에서 처음 집회가 열렸는데, 400~500명 정도가 왔다. 그때는 시민, 청소년, 관광객까지 다양하게 와서 많이 지지해 주고 했다. 경주에서도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 판이 열리는구나 하는 새로운 생각도 들었다. 국민의힘 해산하라는 구호도 나왔고, 김석기 국회의원에 대한 책임을 이야기하고. 그런데 2차 집회 이후부터는 급감했다.

▲경주 집회에 참석한 슬기(왼쪽) 씨(사진=박슬기 제공)

Q: 참가자가 줄어든 이유는?

지역사회가 좁다 보니까, 청소년들이 발언한다거나 했을 때 부모 귀에 쉽게 들어가고, 나가지 말라고도 했다더라. 대구나 서울 집회에서 본 것처럼 여기서 누가 자기 정체성을 밝히고 자기 이야기를 하겠나. 그리고 집회 운영의 미흡함도 있다.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데서 오는 문제도 있었다. 발언자가 자기는 유머라 생각했겠지만 레크레이션처럼 하면서 동료 시민에게 ‘오빠라 불러’라고 하던가, 흥부, 농부 농담이라면서 흥부인데요를 빠르게 하면 ‘흥분돼요’라는 이상한 말도 했다. 사회자가 재치 있게 끊으려고도 했는데 통제도 되지 않았다. 그런 발언을 들으면서 이탈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Q: 하지만 꾸준히 경주에서 집회에 나가는 이유는?

서점하면서나, 살아오면서나 많은 실패를 겪었다. 그러고 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역량껏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 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 말이다. 집회 나가고, 후기 쓰고 하는 정도다. 이곳에서, 여기 있는 이슈만 집중해도 충분히 세상과 연결된다. 이를테면 이주화, 외주화된 노동 문제가 있다. 성매매 집결지 문제도 전국적인 흐름상 경찰이 문제에 뛰어든 상황인데 사실 이 해결 방식을 두고도 첨예한 논쟁이 펼쳐진다. 탈성매매 운동도 집결지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박살 내는 것을 중요한 목적으로 여기면서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삶을 온전하고 안전하게 지켜내는 것에는 그 목적만큼 꼼꼼하게 챙기지는 않는 측면이 있다. 그러한 한계점들이 있어서, 쉽지 않지만 이곳에서 대안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해 보려 하고 있다.

Q: 탄핵 심판 결과가 조만간 나올 거 같다. 앞으로의 세상에서 이번의 경험이 어떻게 이어질 것 같나.

경주는 막 안 바뀌는 것 같고, 그래서 답답하고 그런 감정이 있던 적도 있다. 지역에서 어르신들이 막 (계엄 옹호) 현수막 달고 그랬을 때 ‘망해버려야 한다’ 이런 자조로 대화가 흘러가기도 했다. 기후라든지, 여러 사회 문제를 두고 ‘이미 망했다’고 진단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제 끝장’이라고 진단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에서 투쟁하는 사람이 곳곳에 있다. 세상에 답이 없어 보이고, 답답하더라도, 그럴수록 우리가 연결된 작은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곳 시장터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은 각자의 생활 현장에서 너무도 치열하게 살고 있다. 답답한 마음에 원망의 감정을 이런 개개인에게 돌리고, 지역적으로 묶어서 ‘이 지역 사람들은 죽어야 끝난다’ 이런 식으로도 말하는데. 그런 생각은 세상에 대한 양분된 인식에서 오는 것 같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광장에서는 기후, 평등과 같은 커다란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에서는 우선 위대한 걸 해내겠다는 마음가짐보다는 우리가 과정마저 즐길 수 있는 재미 있고 의미있는 일을 해야 한다. 맛있는 거 먹고, 놀고, 소풍 가고. 욕심부리지 말고. 경주 집회에서도 사람들이랑 같이 떡국 먹고, 강강술래 돌고 한 적이 있는데, 기억에 남는 순간이다. 그렇게 연결되며, 버텨가야 한다.

▲너른벽 서점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