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아버지의 두 번째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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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규의 첫 시집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창비, 2022)는 여름·장마·죽음·천사 등의 단출한 단어와 이미자로 운용된다. 이 시집의 단순성은 시인의 전 세대였던 미래파의 잡식성과 대비되는 한편, 이 시대의 청춘이 당면한 적빈과 미래 없음의 형식적 표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시집을 대표하는 단어는 단연 여름이다. 시집의 표제작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의 첫 줄이다. “나를 번역할 수 있다면 뜨거운 여름일 것이다”

‘여름, 레트로 청춘’이라는 제목의 해설을 쓴 해설자는 이 시집을 읽다보면 “마치 1990년대 혹은 2000년대의 빛나는 여름, 대구의 어느 변두리 동네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고 썼지만 이 시집과 대구를 복고풍로 묶을 수 있는 지리(地理)는 그렇게 강력하지 않다. “팔달교”(‘얼룩’)나 “동성로”(‘열꽃’) 같은 지명이 나오기는 하지만, 대구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이자 추억의 저장소인 달성공원도 앞산공원도 우방랜드도 수성못도 나오지 않는다. 이 시집의 복고적 감수성은 문학사(文學史)에서 찾아야 한다. 1980년대 한국 현대시에서 부권은 집요하게 조롱받고 격하되었는데, 이 시집은 그것을 떠올려준다. ‘개화’의 세 번째 연과 네 번째 연을 보자.

“올해 들어 뒤꼍의 철쭉마저 일찍 졌다는데 흐드러지지도 못하고 바닥만 뒹굴겠구나 어머니는 상한 자두를 잘라내고 있었다 나는 고장난 손목시계를 붙들고 머뭇거렸다 // 어머니, 화분이 또 죽었어요 아무래도 저만 계속 실패하는 것 같아요 아니란다 얘야, 너는 최선을 다했단다 힘들면 이전 생애서 그만둬도 괜찮아” 아들의 인생 선배로 제시된 것은 어머니이며, 아버지의 자취는 찾을 수 없다. 물론 1980년대의 노골적인 ‘아버지 죽이기’와 시인의 그것 사이에는 변별점이 있다. 같은 시의 마지막 연이다. “아버지, 그래도 무언가 이상해요 이제 다 지난 일이라는 데 그만 주무시고 일어나서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세요 아버지, 아버지……” 시인은 아버지를 공격하지 않고 연민하고 있다.

‘향-1992년 여름’은 시인의 출생 년도가 부제로 나와 있는데다가 시집의 맨 앞에 배치되어 있는 점에서 시인의 생물학적·문학적 기원에 해당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원초경(primal scene)과 정확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태아(胎兒)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학을 엿본 형식으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이 시는 시인의 원초경이다. 이 시에서 아버지는 “누워”있고(“공장에서 돌아온 영은 늦게 저녁상을 물린 뒤 주말 오후에 시내 쪽으로 나가볼 궁리를 하며 마루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서”있다(“막차에서 내린 선은 만삭의 몸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1980년대 시인들에게 아버지는 거꾸러뜨려야 하는 강적이었지만 2020년대의 시인들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없다. 이 시집 곳곳에는 거꾸러지고 누워 있는 아버지가 나온다. 아버지는 죽었다.

알베르 카뮈는 어느 산문에 “젊음의 특징은 아마도 손쉬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 천부의 자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젊음이란 먼저 거의 낭비에 가까울 정도로 성급한 삶에의 충동이다”고 쓰고, “만약 여름의 제신(諸神)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삶에 대한 뜨거운 정열로 넘쳐 있던 스무 살 적의 그들이 바로 그 여름의 제신”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2020년대 한국의 청춘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다.

청춘은 불행뿐이며 여름은 짓무르고 상했다. 이들에게는 청춘의 특권이랄 수 있는, 낭비해도 괜찮은 성급한 삶의 충동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제, 지금껏 숨겨온 단어를 꺼내자. 지하방. 청춘은 “언젠가 정원 있는 집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며 살고 싶어”(‘연착’)하지만, 현실은 “단칸방으로 넘친 물이 흐르는 장판을 걷어”(‘섬광’)내는 일이다. “왜 비가 그쳐도 우리의 장마철은 끝나지 않는가”(‘장마철’)라고 했으니, 그는 영영 지하방을 못 벗어날 운명이다. 202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 유행하는 유령과 천사는 1920년대 한국시의 님(독립)이나, 1980년대에 다시 불려나온 님(민주·통일)과 영통하지 않는다. “천사는 내 어깨에 선한 얼굴을 묻고 울다가 집을 나섰다”(‘열사병’)

장정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