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파티] ② 광장의 민주주의, 일상에서 이어지려면

두려움, 죄책감으로 시작한 연대···안정감과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져
'가족', '친구'라는 의외의 장벽···민주노총에 대한 인식 변화도
극우의 준동을 넘어, 파면 이후의 세계를 그려나가다

17:17
Voiced by Amazon Polly

윤석열퇴진 대구시국대회는 꾸준히 거리에서 민의를 모으는 지역 투쟁의 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곳에 꾸준히 참여하는 시민들은 지난 1월 거리가 아니라 실내에 모여 윤석열 파면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고민을 모았다. ‘탄핵파티-100개의 응원봉, 100개의 이야기’ 집담회에서다. 이들은 내란 이전의 사회로 돌아가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며, 일상의 민주주의를 위한 고민을 삼삼오오 모여 풀었다. [관련 기사=[탄핵파티] ① 응원봉, 우리의 이야기 에피소드1(‘25.1.24.)]

불안과 충격이 연대와 투지로 바뀌기까지. 12.3 윤석열 내란 사태는 비록 사회와 시민에게 큰 충격을 줬지만, 취약한 사회 현실을 드러내며 역설적으로 이를 바로잡기 위한 시민들의 연대를 모아냈다. 그 과정은 후일담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시민들은 ‘공포’와 ‘불안’, ‘죄의식’과 ‘무력감’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행동을 시작했다.

▲지난 1월 진행된 탄핵파티 토론회. 잼니, 김세윤 씨 등이 참여한 5조

이경규(40대) 씨는 좀 더 무거운 죄책감을 느꼈다. 지난 대선에서 찍을만한 사람을 알지 못해 부모님이 찍으라고 한 윤석열 후보를 찍었기 때문이다. 경규 씨는 계엄 선언을 TV로 지켜보며 밤을 지새웠다. 시간이 지나는 만큼 죄의식도 쌓였다. 예상보다 빠르게 해제되긴 했지만, 죄책감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바로 다음 날부터 집회에 나섰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에 내가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죄의식과 책임감을 느꼈어요. 윤석열이란 사람이 어디서부터 문제였는지 공부하다시피 했는데, 그러고 보니 너무 괴로웠습니다. 내가 무슨 선택을 한 건가 싶어, 괴로움과 불면에 술로 밤을 보내고 토요일은 집회에 나가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윤석열 구속으로 마음이 조금 풀어졌고요.” (이경규)

보옥(가명, 30대) 씨도 마찬가지다. 부채감으로 집회에 나섰고, 집회에 나서며 안정감을 느꼈다. 집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다른 누군가가 좀 더 안전해질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옥 씨는 한강진, 광화문에도 나서게 됐다. 보옥 씨는 ‘부채감’에 대해 좀 더 오래된 사회적 기억을 되짚는다.

“부채감이 컸어요. 12월 3일에 국회에 나갔던 시민들 덕분에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고. 계엄 사태 이전부터 살펴보면 우리는 이미 수많은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잖아요. 80년 광주. 47년 제주. 그런 곳에서 다른 누군가가 앞서 나갔으니, 따라야겠죠. 그리고 내가 집회에 나감으로써 다른 사람이 안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도 있어요. 남태령 시위가 있었을 때 광화문까지는 갔는데 몸이 안 좋아서 남태령에는 가지 못한 게 마음에 남아있고. 그래서 또 집회에 더 나가려고도 했어요.” (보옥)

두려움, 죄책감으로 시작한 연대
안정감과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져

죄책감, 부채감으로 시작한 발걸음으로 광장은 열렸지만, 거듭할수록 안정감, 기쁨으로 변화해 갔다. 보옥 씨는 집회에 꾸준히 나가게 된 계기를 설명하며 “이 광장에서 내가 나로 있어도 긍정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집회의 효능감으로 꼽았다.

무서운 마음에 유서를 쓰고 집회에 나서게 된 하오문주대리(가명, 20대) 씨나 에리카(가명, 20대) 씨에게는 ‘동질감’이 안정감으로 다가왔다.

“계엄 초반 집회에 나가면서 너무 무서워서, 유서를 썼어요. 차마 유서라고는 못 쓰고, ‘ㅇㅅ’이라고 컴퓨터에 띄워뒀거든요. 대구에서 서울로 갔는데, 버스에서는 굉장히 불안했는데 터미널에 내려서 지하철을 타는데 느낌이 오는 거예요. 내 주변 사람이 같은 역에 내릴 거 같다는 느낌이요. 그렇게 집회에 참여하고 대구에 내려왔는데, 동대구역 글자를 보니 마음이 좀 놓였어요. 대구 집회에서도 서울에서 보고 온 연대를 이어가고 싶어서 트위터에 깃발 사진 찍어서 올리면서 ‘혼자가 무서우신 분들은 제 깃발로 오세요’라고도 했어요. 집회에 가서도 일부러 힘차게 깃발 흔들었어요.” (하오문주대리)

“초반에는 불안함이 컸고, 탄핵안 가결 이후에는 즐기는 마음도 있어요. 도로에서 행진하는 게, 퀴어퍼레이드 같았거든요. 집회에서 저는 무지개인권연대랑 같이 다녔는데, 우리끼리도 ‘이거 완전 퀴퍼잖아’라고 하면서. 연대도 있고, 생각이 비슷한 친구를 만난다는 느낌도 있었어요.” (에리카)

교수님 따까리(가명, 30대)씨에게는 조금 더 새롭고 구체적인 경험이 마음에 남아 있다. 대구에서의 집회에 스스로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차, 뒤에 서 있었던 한 노인이 목이 찢어질 듯 제창하는 임을위한 행진곡에 ‘내 세계의 충격이 됐다’라고 설명한다.

“사실 계엄 직후에 그렇게 열심히 집회에 나가지는 않았어요. 대구니까 좀 하다 말겠지 싶었어요. 지나가다가 소식 듣고 한 번 가보자 해서 가본 집회였는데, 제 뒤에 서 계시던 할머님 한 분이 목이 찢어지도록 임을위한행진곡을 부르더라고요. 이랑 노래에는 ‘우리의 세계에 충격이 필요하다’는 가사가 있는데요. 할머니의 노랫소리가 저한테 충격이었어요. 그때 제 세계가 깨졌어요. 덧붙여서, 평소 홍준표 시장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 시국에 독재자 동상 설치하고 경비 초소도 만들었잖아요. 지금의 광장이 그러한 문제에도 소리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이 되고 있다는 의미도 있는 거 같아요.” (교수님 따까리)

‘가족’, ‘친구’라는 의외의 장벽
민주노총에 대한 인식 변화도

▲지난 1월 진행된 탄핵파티 토론회. 

집회의 효능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시민들은 일상의 장벽도 새롭게 발견했다. 친밀한 관계에서부터 사회적 관계 속에서 느끼는 ‘차이’다. ‘부끄러움’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광장에 ‘올출(모두 참석)’ 중인 김세윤(20대) 씨는 광장과 다르게 일상에서는 온전한 지지를 받지는 못한다고 느낀다.

“제가 집회를 나오면 (가족은) 너는 정치색이 뭐냐고 하거든요. 그냥 한 명의 민주시민으로서 나가는 건데, 누가 배후에 있느냐, 정치색이 무엇이냐 이런 말을 들어본 거 같아요. TK토박이라서 그런 건지. 이런 생각들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정치색으로 규정되지 않고도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해요” (김세윤)

세윤 씨는 주변인과의 소통에 더해, 직장에서의 소통과 자유로운 표현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박근혜 때 초등학생이라서 몰랐는데 예술을 업으로 삼고 나서 보니 그 시절에 블랙리스트가 있었더라고요. 예술과 정치가 불가분의 관계기 때문에, 예술인도 자기의 정치적 주장을 자신 있게 펼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김세윤)

주변인과 차이를 일부러 드러내며, 소통해 보려는 시도도 이뤄졌다. 최진아(20대) 씨는 세윤 씨가 가족 간에 느꼈던 긴장감을 친구들 사이에서 느꼈고, 소통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하게 됐다.

“저는 오히려 부모님과 의견이 통했어요. 집회 나가는 것에도 지지를 받는데, 친구 중에 윤석열을 뽑은 친구가 있어서 약간 싸운 적이 있어요. 이 상황이 돼서는 일부러 그 친구들 보라고 내가 집회에 나간 걸 SNS에 올려요. 만나게 되면 조심스럽게 지금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요. 우리 지역에서는 일상에서 이런 문제에 공감하게 된다는 게 슬픈 거 같아요. 친구들 중에 일부는 다음에는 다른 선택을 할 거예요. 이런 작은 변화가 모여서 ‘TK콘크리트’도 깨질 거라고 믿고 싶어요.” (최진아)

잼니(가명, 30대) 씨도 ‘주변의 변화’를 긍정적 변화로 꼽았다. 잼니 씨는 업무 관계 때문에 의사와 상관없이 자유한국당(옛 국민의힘)에 입당을 해야 했던 경험이 있다. 이 문제로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본 가족은 당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됐다고 한다.

“그 일(입당)로 가족도 조금 바뀌었어요. 저희가 광장에 계속 나가고 있잖아요. 목소리를 이렇게 내다보면, 이런 얘기를 못 하던 친구나 가족도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을 거예요. 내 곁에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하고 알게되는 기회가 쌓이면서 조금씩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게 가장 큰 긍정적 요소라고 생각해요.” (잼니)

흥미로운 점은 가족과 친구 등 친밀한 관계에선 어려움을 느끼게 되면서도 반대로 그동안 부정적 인식이나 인상을 가졌던 민주노총, 투쟁 현장에 대한 인식과 인상이 긍정적으로 변화된 이들도 적잖다는 사실이다.

가족들이 알면 화를 낼 것 같아 비밀리에 광장에 나오는 경규 씨는 노조에 대한 생각도 바꿨다. 경규 씨는 “집회에는 다양한 의제들이 있다고 느꼈다. 당면한 문제가 가장 관심 가는 의제일 거고, 그 다양한 의제가 테이블 위에 놓이는게 자연스럽다. 그동안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다양성이 실종된 사회가 된 거 같다. 집회를 통해 더 다양한 의제가 나오게 되고,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다양성 회복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노조에 대해 생각이 부정적이지 않게 됐다. 멀리 있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에 굉장히 색다른 측면을 봤다. 차별받는 노동자에게 살길은 노조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에리카 씨는 윤석열 내란이 촉발한 ‘민주주의’ 의제를 넘어, 투쟁이 벌어지는 노동 현장으로도 향했다. 에리카 씨는 “지금의 상황이 박근혜 탄핵 때와 다른 점은 젊은 세대들이 소위 운동권 사람들과 섞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거제 조선하청지회 연대, 한국옵티칼 연대도 있었다. 해소되지 않는 불안에 대해 더 알게 됐다”며 “구미(한국옵티칼) 갔을 때는 사람이 많아서 놀랐다. 노조에 대한 악마화 같은 게 있었을 텐데 장벽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고, 실제로 노조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니 느끼는 바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극우의 준동을 넘어
파면 이후의 세계를 그려나가다

▲지난 1월 진행된 탄핵파티 토론회. 보옥, 이경규 씨 등이 참여한 3조

윤석열 내란 사태는 세력화된 ‘극우’를 드러내기도 했다. 세력화된 극우의 준동은 내란 사태가 윤석열 파면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인식으로도 이어졌다.

경규 씨는 “사회가 먹고사니즘, 각자도생이고 삶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힘드니까 극우가 준동하는 것 같다. 한국도 유럽 같은 단계에 이른 게 아닌가 싶다.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지고, 정치권력은 더 우민화시킬 것이고, 이런 부분 때문에 지금도 광장이 쪼개져 있기도 하다”며 “법원 폭동에서 드러났듯, 극우 세력이 더 강하게 저항할 거 같다. 민주주의를 수용해 나가는 시민의식 함양, 헌법과 법에 대한 준수가 중요하고 이런 것에 대한 교육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보옥 씨는 “전 세계적 극우화가 걱정이다. 점점 더 삶이 팍팍해지고 자본주의는 최고점을 찍은 것 같고. 이제 내려가는 시점에서 나치가 유대인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았듯, 유럽 사회가 난민을 혐오하듯, 우리나라가 여성을 혐오하듯, 중국을 혐오하듯 그러한 메카시즘이나 가짜뉴스에 쉽게 휘둘릴까 걱정된다”며 “정치 무관심층이 쉽게 그런 경향에 빠질 거 같다. 언론의 행동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에리카 씨는 “행진하다 보면 남학생들이 ‘윤석열 파이팅’ 이러거나, 무지개 깃발 든 저를 향해서 ‘동성애자도 나왔네’하며 뭐라고 한다. (혐오적) 발화에 거리낌이 없어졌다고 느낀다. 커뮤니티나 극우 유튜버 영향인 거 같다”며 “혐오가 들어가 있지 않은 건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장애인의 휠체어를 던지거나, 퀴어에게 욕하는 식으로 폭력적인 장면이 콘텐츠로 유통된다. 세계적 경향인데, 청년들이 히틀러 포즈를 따라 하기도 하고, PC한(정치적으로 올바른) 말을 하면 조롱하는 분위기도 있다”며 경각심을 보였다.

여성-성소수자, 이주민 혐오 넘어서기도 중요한 과제로 언급됐다. 참가자들은 극단화되는 사회에서 각자도생을 넘어, 연대의 장이 이어져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극우 세력도 공고해지고, 양극화는 심화해지고 있어요. 성인지 감수성의 격차라든가, 역사와 정치에 대한 인식 차이가 더욱 심화된다는 우려가 들어요. 시민들과 함께 대구를 꾸려가야 하는데, 이 광장과 연대의 경험이란 걸 우리만 한 게 아닌 거 같아요. 극우세력도 광장에서 외치면서 자기들끼리의 연대 경험을 만들고 있다는 게 걱정이에요.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도 필요해요.” (최진아)

“독재정권 끝내고 6공화국에서는 각자도생하면서 서로 차별을 받으며 살았는데, 우리가 이번에 서로 다른 고유한 존재로 만나고 들었어요. 이제 다른 행동을 해보자고 하는 환경이 된 거 같아요. 100도가 되지 않아서 끓지는 않아도 이미 온도는 충분히 올라온 거 같아요. 개인적으론 밥상을 보면 이주노동자가 생각나는데, 이주노동자 강제단속 문제까지 떠올리게 돼요. 그런데 우리는 편하게 먹고 있을 수가 있느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제 우리도 뭔가를 할 수 있는 연대의 장이 열릴 수 있을지, 그것이 제일 기대가 됩니다.” (보옥)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