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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2.3 윤석열 내란 사태’로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무도한 자에게 권력을 내어주었을 때 국가시스템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처절한 경험을 하며, 대한민국은 다시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21세기의 민주주의는 형형색색, 각양각색의 응원봉처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뉴스민>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에서 응원봉을 든 그들, ‘민주주의자’들을 만나고, 기록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12월 3일부터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까지 대구 CGV한일극장 앞에선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무대가 세워졌다. 광장을 연 것은 시민이지만 무대를 세운 건 윤석열퇴진 대구시국회의(대구시국회의)다. 이들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토요일 집회를 이어갈 예정이다.
대구시국회의에는 시민사회, 민주노총, 대학생 모임 등 90개 단체가 들어가 있다. 이들은 주인공인 시민들 뒤에서 소외되는 사람 없는 평등하고 안전한 광장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지역 내 노동조합 간 연대 사업을 하는 민주노총 대구본부는 실제 무대를 세우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이정아 민주노총 대구본부 사무처장은 대구시국회의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민주노총 조끼를 입은 조합원들은 무대 앞뒤를 분주히 뛰어다니고, 무대 옆에서 산별(산업별)노조 깃발을 들고 섰다. 시민들은 거리낌 없이 그들과 핫팩을 나눴고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이 경험이 그에게 어떻게 남았을까, 그리고 윤석열 퇴진 정국에 지역 노동운동이 가야 할 길은 뭘까. 이 사무처장은 지역운동 전반의 역량 강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12월 3일 밤 무엇을 하고 있었나.
잘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휴대전화를 들어 텔레그램 앱을 확인한 참이었다. ‘비상계엄 선포’ 속보가 떴다. 민주노총 전체 비상대기 지침이 내려왔다. 민주노총 대구본부 전체 상근자는 그날 밤 11시 사무실로 집결해 대응을 논의했다. 실시간 뉴스를 보고, 서울에 사무실이 있는 조합원들이 국회로 달려가 전해주는 소식도 확인했다. 국회에서 계엄 해제안이 통과되는 걸 보고 곧바로 ‘규탄 기자회견 정도로 안 된다. 광장을 열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업체에 연락해서 트럭을 맞추고 음향을 올리고 성명서를 쓰고 선전물을 만들었다. 대구시국회의는 다음 날 오전 동대구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의힘 대구시당 앞까지 행진했다.
-대구에는 이미 윤석열 퇴진을 내건 연대조직이 만들어져 있었다.
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민주노총은 윤석열 정권 초기부터 화물, 건설, 제조업 할 것 없이 노동기본권에 대한 제약을 받았다. 작년 5월 故 양회동 건설노동자의 분신 이후 민주노총은 ‘윤석열 퇴진’ 구호를 전면에 걸었다. 일반 조합원들에겐 설득력이 없었고, 시민사회 단체들도 ‘아직 그 정돈 아니다’가 기본 입장이었다.
그래도 민주주의, 민생이 계속해서 후퇴했다는 것에 대해 공감하는 80여 개 단체가 모여 ‘윤석열심판 대구시국회의’라는 연대체를 만들었다. 달에 한 번씩 시민대회를 열고, 거부권 정국에 대한 규탄 기자회견을 열면서 1년이 흘렀다. 최근 김건희 여사 관련 이슈가 커지면서 ‘심판’을 ‘퇴진’으로 바꾸자는 제안에 다들 동의했고, 지역 시국선언을 한 번 더 하면서 ‘달에 한 번, 혹은 2주에 한 번 고정적으로 시민대회를 열자’고 결정했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민주노총 대구본부가 거의 실무를 맡았다. 박근혜 퇴진 정국 때만 해도 시민사회단체에 상근역량이 있었다. 윤석열 정권 들어서곤 보조금이 줄면서 상근 인력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민주노총은 비교적 돈과 인력이 튼튼한 조직에 속하니 빠르게 결정하고 실무를 촘촘하게 들어갈 수 있다.
다만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부턴 국면이 아예 달라졌기 때문에 광장을 크게 열어야 했다. 그동안 퇴진 구호를 민주노총이 먼저 내걸고 시민사회단체를 끌고 올 때와는 또 다른 상황이 된 셈이다. 시민사회단체들이 본격적으로 붙으면서 집행위원장, 실무진을 강화했다.
-대구는 전국적으로도 집회 참석 인원이 많은 편이었다. 시민 참여도도 높았지만, 어쨌든 매일 집회가 열렸고 준비도 잘 됐다.
10일가량 매일 집회를 쳐내며 몰아치는 일을 처리하는 게 체력적으로도 쉽지 않았다. 민주노총 대구본부는 일상사업을 모두 중지하고 집회에 전력을 쏟았다. 어쨌든 그 전부터 광장을 놓지 않고 꾸준히 끌고 왔던 힘이 있었다고 본다. 대구는 작년부터 크지는 않더라도 계속 정권과 국민의힘 상대로 기자회견과 집회를 열었다. 시민사회단체와 민주노총이 그 힘으로 이번에 한시가 급했던 시국에 탄력적으로 붙을 수 있었다. 미리 움직이고 있던 조직 유무가 이번 정국에서 지역마다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민주노총 대구본부 내부에선 어떻게 평가하나.
우리 내부적으론 잘 싸웠다고 평가한다. 민주노총 대구본부 상근 인력이 각자 자기 담당 영역을 커버하고 있었기에 일이 터졌을 때 구멍 없이 바로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대구시국회의 실무가 계속 쏟아지는 와중에 민주노총 차원에서도 ‘전체 조합원 서울 결합’ 지침도 내려오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대구에 집중하면서 지역 투쟁을 확대하겠다 결정한 뒤 전원이 대구시국회의로 결합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TK의 딸들’이라 적힌 피켓이다. 단순히 구호에 그치지 않았다. 전국의 TK의 딸들이 후원금을 보내왔다. ‘경기 TK의 딸’, ‘서울 TK의 딸’, ‘안동 TK의 딸’ 등의 이름으로 많은 건이 들어왔다. 비상계엄 선포 이전에 13만 원이 있던 단체 계좌에 1억 1,000만 원의 후원금이 모였다. 10% 정도가 단체 후원금, 나머지 90%가 개인이 보낸 소액 후원금이다. 10번의 집회에 쓴 음향, 트럭, 무대 비용을 다 결제하고 5,500만 원 정도 남았다. 공연팀 중에 교통비 명목으로 드린 비용을 돌려주신 분도 많다. 현장 모금도 상당히 많이 모였다.
‘대구는 포기하자’, ‘대구는 답이 없다’ 같이 대구를 폄하하는 말을 지역 안팎에서 많이 하는 데 그때마다 힘이 빠진 것도 사실이다. 이번 기회에 대구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대구시국회의 집회는 엄근진(엄격·근엄·진지)한 민주노총 집회와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정세가 열려 있고 광장에 시민들이 붙고 있었다. 낮에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결의대회나 기자회견을 열고 저녁엔 광장을 지키는 방식으로 싸웠다. 선도투(선도적인 투쟁) 대신 광장의 요구를 최대한 받아들이자는 생각이었다. 대구본부 특징이 있는데, 국부장이 대부분 30대로 연령대가 낮으면서도 연차는 10년 차 내외다. 성향과 정파도 다 다르다. 진보정당, 시민단체 경험이 있는 구성원도 있다. 각자 잘하는 분야를 커버해 줬다. 예를 들어 팬 문화에 익숙한 이는 X나 커뮤니티를 모니터링하며 홍보와 피드백을 맡았고 집회 실무에 익숙한 이는 안전 문제에 집중하는 식이었다.
대구 집회에 나온 사람들은 ‘어지간히 해야지’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분노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지역이 갖고 있었다. 물론 내부 조율 과정에 서로 안 맞는 게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있지만 한 줌도 안 되는 지역운동이 이 국면을 타고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 다들 뜻을 모았다.
-‘지역운동의 역량 강화’, 윤석열 퇴진 이후에 대한 고민과도 맞닿아 있을 것 같다.
초반에는 10대 참가자들이 응원봉을 흔드는 모습이 낯설었다. ‘저들이 내용을 알까’라는 생각도 사실 들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매일 집회를 나와서 자리를 지키는 건 그들이었다. 이 변화하는 국면에 가장 민감하고 빠르게 대응하는 것도 그들이었다. 민주노총만 해도 하부조직에 지침을 내리고 전 조합원을 결집하려 해도 이렇게 위력적으로 결합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윤석열 퇴진 대구 집회의 대오를 유지한 건 그 10대 참가자들이었다.
민주노총 입장에선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 조직된 노동자들과 소통하는 게 중요하지만 그만큼 다음 세대와의 접점을 가져가는 것도 중요하다. 이들이 어떤 정치의식을 가질 것이냐, 노동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에 집중해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논의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결정이 오래 걸리긴 하지만 한번 결정되면 아래로 전달되어 다같이 움직이는, 힘 있는 조직이다. 이 방식이 유효할 때가 있지만 다음 세대에겐 유효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 때문에 청소년 권리 상담의 날이나 플랫폼 노동자의 날에 팝업스토어를 연다거나 온라인 채팅방을 활용하는 등 전달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 중이다.
-14일 집회에서 민주노총 대구본부가 피켓 만들기 등 부스 사전행사를 열었다. 어떤 가능성을 봤는가.
개개인의 취향에 맞춰 집회용 피켓과 깃발을 만드는 부스를 운영했다. 붉은 머리띠를 나눠주기도 했다. 전교조에서는 역사 교육 부스를 운영하고 학교비정규직노조에선 차 나눔을 했다.
부스 행사를 만든 계기는 SNS 반응이었다. SNS 밈으로 ‘힘들고 어려우면 강성노조인 건설·금속노조 깃발 아래로 가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 깃발을 따라 걸으면 편하다’, ‘깃발이 멋있다’는 반응이었다. ‘건폭(윤석열 대통령이 건설노조를 폭력배에 비유해 지칭한 표현) 등 부정적인 용어를 뉴스로 접했을 텐데, 그럼에도 민주노총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구나. 그럼 우리도 민주노총 방식을 보여주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30대 사무처 구성원들이 기획했다.
민주노총 지역본부는 조합원 중심으로 돌아가는 산별 조직과 다르다. 전체 지역운동을 고민하고 지역 노동자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사실 비상계엄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2,000만 원 주고 맡긴 연구보고서 결과 발표회를 벌써 했을 것이다. 내년 창립 30주년을 앞두고 맡긴 ‘대구의 노동·산업변화와 노동정책 과제’다. 올해 민주노총 대구본부의 역점사업이기도 했다. 비록 발표회는 미뤄졌지만 개인적으론 이미 우리의 전망을 이번 광장에서 찾았다고 생각한다. 대구본부 구성원들도 각자가 갖고 있던 지역운동에 대한 고민의 지평이 넓어졌을 거라 본다.
민주노총 안에 있으면 정말 바쁘다. 담장 밖을 넘어서 노동조합을 하자고 구호로 외치지만 연대를 잘 못 한다. ‘테두리 안에 갇힌 운동’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일면 맞다. 이번 윤석열 퇴진 국면에서 성소수자, 장애, 여성 등 시민사회운동과 노동운동 사이 접점이 더 많아졌다. 전체 운동의 역량을 기르기 위한 방법이 뭔가, 그리고 그 안에서 민주노총 대구본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고민하고 있다.
대구는 박정희 동상 건립에 대한 현안도 있다. 내년 상반기에는 대선이 있을 전망이고 동시에 최저임금 투쟁이 있을 것이다. 2026년에는 지방선거가 있을 텐데 이 과정에서 지역운동이 들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선 지금부터 힘을 길러야 한다.
김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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