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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2.3 윤석열 내란 사태’로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무도한 자에게 권력을 내어주었을 때 국가시스템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처절한 경험을 하며, 대한민국은 다시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21세기의 민주주의는 형형색색, 각양각색의 응원봉처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뉴스민>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에서 응원봉을 든 그들, ‘민주주의자’들을 만나고, 기록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12월 3일부터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까지 대구 CGV한일극장 앞에선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무대가 세워졌다. 광장을 연 것은 시민이지만 무대를 세운 건 윤석열퇴진 대구시국회의(대구시국회의)다. 이들의 소회와 앞으로의 과제를 들어본다.
박석준은 대구시국회의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셋 중 하나다. 대구에서 20년 넘게 통일·반미 운동을 했다. 대구경북진보연대, 대구경북자주통일평화연대, 대구경북겨레하나 등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운동권 꼰대’라 지칭하면서도 “앞으로의 운동은 세분화된 요구를 시민단체의 기존 틀에 모아내는 게 아니라 뒤에서 지원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12월 3일 밤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대구경북지역 대학동문 ‘윤석열 대통령 퇴진’ 시국선언 명단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윤석열 퇴진 운동은 비상계엄 선포 전부터 이미 전개되고 있었다. 명단은 1,000여 명이었는데 무기명이 많아 정리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밤 10시쯤 단체카카오톡방에 난리가 났다. 급히 뉴스를 켰다. 가족에게 농담 반 진담 반 ‘며칠 밖에 나가서 잘까?’ 말했고, 몇몇은 전화로 시국선언 명단에서 빼 달라 요청하기도 했다.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요구 결의안이 가결되는 걸 보고 잤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계엄령 선포 자체가 황당해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싶었다.
-바로 다음 날부터 매일 집회가 열렸다.
매일 조금씩 참석 인원이 늘었던 걸로 기억한다. 7일 토요일 집회는 평일에 비해 큰 폭으로 인원이 늘었다. 주최 측 예상 인원은 4,000~5,000명 정도였는데 그보다 3~4배 더 참석했다. 응원봉의 힘이었다. 맨 앞에 앉기 위해 2시간 전부터 무대 옆에서 기다린 참석자들도 많았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일정 맞춰서 깃발을 챙겨 나온 시민·사회단체 회원, 노동조합 조합원들은 앉을 곳이 없어서 뒤로 빠지기도 했다.
-2016년 박근혜 퇴진 집회와 비교하면 무엇이 가장 달라졌나.
10대의 참석이 두드러졌다. 내 기억이 맞다면 박근혜 퇴진 집회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세대라 불린 40~50대가 주축이었다. 가족 단위 참가자, 10~20대 참가자도 많았지만 비율상으론 40대가 많았던 것 같다. 반면 윤석열 퇴진 집회에선 10~20대 참가자의 존재감이 컸다. 발언을 신청한 이들의 연령대도 10~20대가 많았다.
집회에 참여하고 즐기는 모습을 인증함으로써 타인과 공유하는 게 이들의 새로운 연대 방식이 된 것 같다. 나는 야구를 좋아하는데, 일면 야구 문화와도 비슷하다고 느꼈다. 피켓을 직접 만들고 그걸 SNS에 올리고, 떼창하는 방식 모두 아이돌 팬문화, 야구 문화와 비슷하다.
-플레이리스트가 집회 횟수를 거듭할수록 다양해졌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 곧바로 시작된 평일 집회에서 반응이 가장 좋았던 곡은 김광석의 ‘광야에서’였다. 하지만 주말을 앞두고 점점 연령대가 낮은 참가자가 많아지면서 플레이리스트를 다양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전 연령대를 아우르면서도 최대한 10~20대 참가자들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리메이크곡을 적극 활용했다. 로제, 윤수일의 믹스곡 ‘아파트’, 이적의 ‘걱정말아요 그대’, 이문세의 ‘붉은 노을’ 등을 추가했다. 그중에는 빅뱅의 ‘뱅뱅뱅’도 있었다. 대중적이고 신나는 노래라고 판단해 추가했는데 이후 빅뱅 멤버의 버닝썬 게이트 때문에 부적절하다고 지적받았다. 다음 집회에서 사과도 했다. 이렇게 주최 측도 참가자들의 피드백을 받고, 즉시 반영하면서 조금씩 나은 집회를 만들어 갔던 것 같다.
선을 넘지 않고도 재밌는 집회 분위기가 만들어지려면 사회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내가 진행을 맡은 날에는 경상도식 용어나 어투에 비하가 섞이기 쉽다는 점을 감안해 최대한 조심했다. ‘참가자들과 나는 서로 격려하고 응원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졌다. 확실히 참가자 연령대가 낮아지니 기존의 운동권 집회보다 실시간으로 상호작용이 되는 느낌이 있어 재미있기도 했다.
-이 외에도 집회 문화의 변화를 느낀 순간이 있나.
소수자를 집회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환대하는 분위기가 가장 크게 변화한 지점이라 느꼈다. 주최 측은 집회 3일 차부터 매일 수어통역사를 섭외했다. 무대와 먼 대오까지 수어가 전달되긴 현실적으로 어려웠지만 <뉴스민>에서 매일의 집회를 생중계해 줘서 도움이 됐다. 자유발언 신청자 중에도 농인 유튜버가 있었다. 개인적으론 그가 무대에 서 있는 상황 자체가 감동이었다. 모두가 참가하고 연대할 수 있는 집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토요일 집회 기준 2만 명, 4만 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대구에서 흔치 않은 규모의 집회였는데 개인적으론 어떻게 평가하는가.
대구가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다. 야구 커뮤니티 반응을 일례로 들고 싶다. 이번 집회에서 삼성라이온즈 응원가인 엘도라도를 튼 적이 있다. 곧바로 응원가를 집회에서 튼다는 것에 대해 삼성라이온즈 팬카페에서 찬반 논란이 붙었다. 찬반 의견이 대략 반반이었다.
사실 비상계엄 선포 이전, 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엘도라도 응원가를 틀었을 때는 ‘정치에 야구를 이용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기존의 반응과 비교하면 찬성으로 돌아선 이들이 많아진 셈이다.
-중요한 건 다음이다.
20대부터 20년 넘게 학생운동, 청년운동, 통일운동을 해 온 기성세대로서의 고민도 있다. 그동안은 시민단체 같은 사회운동단체 중심으로 사회 변화를 도모했다. 지금은 잠재되어 있던 요구가 올라오는 시기이니 단체들 입장에선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기존의 단체들은 지금 광장에 나오는 10~20대의 요구를 받아들일 역량이 부족하다. (단체의)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측면도 있지만 이들의 요구가 세분화됐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를 포함한 단체 활동가들은 ‘개개인의 목소리를 어떻게 받아내고 발현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난 이들을 뒤에서 지원해야 한다고 본다. 세분화되고 다양해진 요구에 귀 기울이고 그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발생한 움직임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선 단체마다 입장이 다르겠지만 박근혜 탄핵 국면 이후처럼 촛불집회에서 나온 요구들이 선거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선 다들 동의할 것이다.
-‘대구시국회의’의 다음 계획은.
단순히 매주 집회를 여는 걸 넘어서 지역사회의 진보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우선 다음 달 23일 토론회를 열기로 했다. 대구시국회의 참가단체, 시국대회 참가자들과 새로운 대구를 위한 의제를 논의하는 자리다. 단체 관계자들뿐 아니라 집회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개인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판을 깔려고 한다. 가제는 ‘2025 시급한 대구시국회의-윤석열너머, 이후 우리는’ 이다. 응원봉을 든 10~20대 참가자가 광장의 주체로 설 수 있는 시국대회를 만들기 위한 고민도 이어갈 것이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