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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의 곡식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동네마다 타작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 농민들의 마음은 한결 넉넉해지기 마련이다. 월급 봉투로 봉급을 받던 시절, 아무리 박봉이라도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이라도 기울였던 우리네 부모님들의 봉급날처럼 말이다. 그러나 1789년 갑산부 백성들에게는 이 같은 잠시의 넉넉함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그달의 카드 명세서와 급여액을 맞추어 보면서 급여 통장에 들어오는 숫자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아는 현대인들처럼, 갑산부 백성들에게 누렇게 익어 일렁이는 들판은 더 이상 자신들의 것이 아니었다. 벼를 심고 기르며, 수확하는 것은 백성의 몫이지만, 그렇게 해서 거둔 소출은 결코 그들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금은 그나마 ‘소출에 따른 비율’이라는 원칙이라도 있었지만, 봄에 빌려 가을에 갚아야 하는 환곡은 수확량을 훌쩍 넘어 버렸다.
타작 소리는 관아 세리들을 불러 모으는 신호였다.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환곡을 갚으라는 독촉 소리로 인해 타작 소리마저 묻힐 지경이었다. 특히 그해 환곡 수취 성과에 승진여부가 달려있는 노상추가 보낸 세리들의 목소리는 유난히 컸다. 백성들보다 자신을 보낸 노상추가 듣게 하려는 듯, 큰 소리로 환곡을 독촉하고 다녔다. 그러나 노상추에게도 세리들을 닦달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1789년 한 해, 갑산부 소속 진동진을 맡고 있었던 노상추는 관아를 새로 짓는 일로 정신이 없었다. 조정에서 보면 변방 중에 변방인지라, 관아 건물에 대한 관리와 보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방관으로서 모든 역량을 동원해 관아를 새로 지었고, 순영에서도 노상추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다. 그러나 말로만 칭찬할 뿐, 조정에 포상을 청하는 보고서는 차일피일 미뤘다. 환곡을 얼마나 거두어 들이는지 확인하고 장계를 올리겠다는 이유에서다. 참으로 치사하기 이를 데 없지만, 환곡을 거두는 것도 지방관의 일인지라 할말이 없었다.
환곡을 거두는 지방 토졸土卒을 닦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역에 터를 잡고 사는 토졸들은 임기가 차면 교체되는 수령과 입장이 달랐다. 순영의 의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살아갈 동네의 인심이다. 게다가 환곡을 잘 거두어 들이지 못한 책임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는 것이지, 토졸이 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목소리만 클 뿐, 실제로 거두어 들이는 게 없었던 이유다.
갑산부에서 나누어 준 환곡이 1만 5,000여 섬이었는데, 갑산부 전체에서 거둔 환곡은 5,000섬이 전부였다. 그러나 노상추의 입장은 달랐다. 예나 지금이나 관료 사회에서 포상은 그대로 승진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토졸의 입장까지 생각해줄 처지가 아니었던 터였다. 진동진에 할당된 양은 갑산부의 1/10에 해당하는 1,500여 섬이었다. 매일 아침 토졸들을 점고하고, 그들을 덜덜 볶는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갑산부 전체가 1/3을 겨우 채우고 있을 무렵, 노상추는 1,250섬을 거두었다. 나머지 250섬은 토졸들까지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노상추에게 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노상추는 마지막 수단을 강행했다. 관아의 문을 닫아 걸고 그 어떤 민원도 접수하지 않았다. 초유의 수령 파업 사태다. 노상추는 자진 납세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관아 행정을 완전히 정지시키겠다는 각오로 버텼다. 이렇게 한 달여 남짓 버틴 끝에 70섬을 제외한 모든 환곡을 받아냈다. 토졸들마저 손을 들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다른 진의 진장들마저 노상추를 향해 시기 어린 비판을 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어쩌랴! 노상추에게는 이 일에 승진여부가 달려 있었으니 말이다.
잘 아는 것처럼, 환곡은 보릿고개와 쌍으로 사용되던 말이다. 가을 식량이 떨어지고 보리 수확이 이루어지기 전,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국가 창고를 열어 구휼하던 제도였다. 그렇지만 국가의 원활한 재정 운영을 위해 봄에 빌려 주고 가을에 이자를 더해 갚는 조세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굶주릴 때야 국가의 존재에 대한 감사함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겠지만, 갚을 때 국가의 존재는 그 어떤 고리대금 업자보다 지독했다.
이는 수령의 입장에서도 못할 짓이기는 했다. 봄에는 굶어 죽는 백성이 없어야 승진할 수 있고, 가을에는 환곡을 잘 거두어야 승진할 수 있는 게 수령이니 말이다. 덕분에 봄에는 자선가가 되었다가 가을이 되면 고리대금 업자로 변신해야 하는 게 수령의 숙명이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카멜레온처럼 변화하는 환경에 색을 바꾸는 공무원이 승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변화를 지켜보는 백성들의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