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운동가들] 성민아가 말하는 낀 세대

청소년운동부터 정당활동까지, 활동가의 길을 걸어온 39세의 기록
80년대 운동권과 21세기 활동가 사이, 마지막 '버티기' 세대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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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때는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사회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운동가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사회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은 오늘도 사람을 만나고, 제도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애를 씁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운동권 특권 세력 청산은 시대정신”이라며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인과 싸우기 위해 운동가들을 몽땅 폄훼하기도 합니다. 운동권이라는 어원은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에 나선 학생운동가를 고립시키기 위해 만든 용어였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기득권으로 살아가지 않았고, 또 일부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오늘날까지 사회운동을 이어가는 운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들도 있습니다. 2024년, <뉴스민>은 매달 198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운동가들의 삶과 더 나은 공동체를 바라는 운동가의 고민을 듣기로 했습니다.

피곤이 몰려왔다. 하루 종일 종종거렸다. 저녁에는 이태원 참사 2주기 추모집회 취재가 있었다. 성민아와 인터뷰는 집회가 끝난 뒤인 저녁 8시로 잡혔다. 어차피 취재기자와 행사 실무자로 집회에 참석해야 했다. 먼저 2.28기념중앙공원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뒷정리 후 온다던 그는 약속한 8시에서 20분이 지나 도착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커피를 주문하는 그에게 카페인이 괜찮냐 물었더니 정답인 듯 정답 아닌 말이 돌아왔다. “퇴근하고도 일하는 게 일상이라서요. 여러 일을 병행하니까 밤에 사람 만나는 게 익숙해요.” 저녁식사는 건너뛰었다고 말하는 눈빛이 또렷했다.

성민아를 인터뷰해야겠다 마음먹은 건 올해 초다. 당시 그는 정의당 대구시당 총무국장이었다. 햇수로 7년, 대구에서 진보정당 실무자로 일한 ‘21세기 운동가’의 동력이 궁금했다. 선거가 끝나면 인터뷰를 요청해야지 했는데 아뿔싸, 상황이 바뀌었다. 지난 4월, 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의당은 참패했다. 당은 원외로 밀려났고 전국의 당직자 수는 대폭 줄었다.

성민아는 선거 직후 여행을 다녀온 뒤 곧바로 퇴사했다. 선거 전부터 계획한 여행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퇴사 여행이 됐다. 당은 더 이상 급여를 줄 수 없었다. 곧바로 민주노총 대구본부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성민아를 아는 주변인들은 말렸다. 바쁜 호흡으로 돌아가는 민주노총 일이 그의 성향과 맞지 않을 거라 했다. 고심했으나 오래 고민하진 않았다. 8월부터 출근했으니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우려와 달리 그는 매우 잘 적응하고 있다. 연초 계획한 인터뷰를 연말에 진행하며 늦게나마 쌓였던 질문을 차근차근 던졌다.

▲인터뷰는 10월 30일 저녁 8시 2.28기념중앙공원 근처 카페에서 진행했다.

청소년 운동

성민아(39)는 대구 북구에서 초·중·고등학교, 대학까지 모두 졸업했다. 중학생 때부터 막연하게 선생님이 되고 싶다 생각했다. IMF가 터지면서 다들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던 시기였다. 융통성 없는, 성실한 청소년이었다. 역사 과목을 좋아했고, 대부분 입시가 그렇듯 어쩌다 보니 사범대학 윤리교육과에 입학했다. 역사교육과를 부전공했다. 대학에 가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조금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등학생 때 인생이 꼬였죠.”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가 고등학생이던 2000년대 초반은 청소년 운동이 본격화된 시기다. 관련한 예산 지원이 활발해지고 지역마다 청소년문화의집, 청소년수련관 등 수련시설도 이때 건립됐다.

“특히 대중운동이 고등학교 동아리 중심으로 이뤄졌어요. 학기 초가 되면 학교 운동장 한편에 동아리 부스가 차려지고, 다른 한편에선 공연이나 전시가 열렸죠. 저는 수화 동아리에 가입했어요. 고등학교 동아리가 성행하니까 YMCA, 우리세상, 반딧불이 같은 청소년 단체에서 동아리 연합을 만들어 관리하기도 했죠.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가며 수화 동아리 부장을 맡게 됐고, 우리세상 일꾼으로 있던 지명희 선생님을 만났어요. 복현오거리 롯데리아 2층에서 만났는데, 마침 제가 그때 홍세화 선생님의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읽고 있다는 얘기를 했던 게 기억나요. 그러면서 눈에 든 거죠.”

우리세상을 한 마디로 정의해달라 했더니 ‘청소년 문화, 청소년의 정서와 감각에 맞는 교육 콘텐츠를 매개로 한 청소년단체’라는 답이 돌아왔다. 졸업한 선배들은 다시 학교를 찾아와 후배들에게 수화를 가르쳤다. 고등학생 성민아는 수화를 배우며 선배들과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같은 책을 읽었다. 자연스레 대학에 가서도 계속 선배들이 그랬듯 우리세상 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우리세상에선 성민아처럼 정식으로 일하진 않지만 청소년과 모임을 하거나 단체 일을 돕는 활동가를 도움꾼이라 불렀다. 그보다 좀 더 본격적으로 일하는 활동가는 일꾼이라 불렀다. 대학생 성민아는 2년간 도움꾼으로 활동한 뒤 쭉 일꾼으로 일했다.

“적극적으로 사회참여 활동을 한 건 아니지만 대학을 다니면서도 계속 동아리 후배들을 만나고, 우리세상 선배들과 교류했어요. 어쨌든 사범대를 졸업했으니 교육에 관심이 많았죠. 2006년 토요휴업제(놀토)가 생겼는데, 그때 학교에 가지 않는 청소년을 위해 프로그램을 만들고 굴려보면서 재미를 느꼈어요. 학교 밖이 아닌 안에서 활동을 해보고 싶단 생각에 임용고시도 4년 정도 준비했죠. 그러다 우리세상에서 상근자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왔고, 기쁘게 받아들였어요.”

낀 세대

상근활동가로 일하게 된 이후 받은 첫 급여가 얼마였는지 묻자 성민아는 “활동비 40만 원”이라고 답하며 “나는 낀 세대”라고 덧붙였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활동가와 1980년대 운동을 시작한 활동가의 경계 어디쯤 있어 왔다는 설명이다. 성민아는 낮에 돈을 버는 생업을 하고, 저녁이나 주말엔 청소년을 만나 함께 공부하고 고민을 나누는 선배들을 보며 자랐다. 그런 선배들을 보며 훌륭하다 생각했고, 어느 순간 본인이 그들처럼 활동할 수 있는 끝 세대임을 깨달았다.

우리세상은 기반이 튼튼한 축에 속했다. 2004년 사단법인으로 전환했을 때 후원회원 1,000명이 모였다. 당시 대구참여연대 다음으로 후원회원이 많은 단체였다. 일을 배울 수 있는 선배도 많았다. 성민아는 ‘내가 가진 기술은 모두 우리세상에서 배운 것’이라고 평가했다.

“상근 제안을 받고는 감사했어요. 오래 같이 활동한 동기가 4~5명 있었는데, 그중 가장 먼저 제안을 받았다는 게 기뻤던 것 같아요. 선배들은 제안하면서 활동비밖에 줄 수 없는 것에 미안해했죠. 전 부모님 댁에 살고 있었고 과외를 했기 때문에 크게 생활이 어렵진 않았어요. 쉽게 승낙했던 또 다른 이유는 계속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어요. 학교 밖이지만 충분히 좋은 교육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있었어요. 노동인권 교육이나, 교과에 문화예술 활동을 결합한 프로그램을 할 때였거든요. 문학소설을 미술이나 글쓰기와 결합해 수업을 구성하거나, 성서FM 같은 지역 단체와 협업해 라디오 드라마를 만드는 식이었죠.”

▲2011년 우리세상 상근활동가로 있던 당시 동아리 소풍 모습 (사진=성민아)

고민은 활동 10년 차에 찾아왔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했으니 10년 차라 해봤자 30살이었다. 내내 ‘사람을 잘 못 챙긴다’는 지적을 받았는데, 어느 순간 ‘더는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잘 챙겨야 한다는 단체 기풍이 있었어요. 특히 청소년을 대상으로 활동하니까 사람을 챙기는 게 리더에게 필수로 요구됐죠. 일을 잘하는 건 기본이었어요. 기획부터 실무까지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 있어서, 그걸 따라가면 일을 잘하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거든요. 동아리 활동 지원이 사실상 사람을 남기는 핵심 사업이었어요. 일종의 조직활동가인 거죠. 리더는 사람을 잘 챙겨서 그들이 스스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야 했어요. 저는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과업 중심의 사람이라 일이 원활하게 안 굴러가면 혼내고, 선배들은 그걸 보고 절 지적하는 게 반복됐어요. 술을 잘 안 먹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요. 뒤풀이를 업무의 연장이라 생각했죠.”

그렇게 활동을 그만뒀는데, 8개월 만에 다시 우리세상에서 제안이 왔다. 예비사회적기업으로 전환을 준비하고 있는데, 실무자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당시는 입시가 강화되면서 학교 동아리 활동부터 학교 밖 청소년 활동까지 전반적으로 축소되고 있었다. 청소년 단체들도 동아리 사업을 정리하고, 교육 콘텐츠 제작이나 진로 멘토 사업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당시 단체에 있던 선배들 대부분 열심히 청소년 운동을 하다가 자리를 물려주고 다른 영역으로 건너갔어요. 보통 결혼을 하거나 인생 계획을 재정비하는 30살쯤이었죠. 그걸 우리 표현으로 ‘넓혀간다’고 하는데, 주로는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농민단체로 갔어요. 제가 우리세상에서 2년을 더 일하고 그만둘 때쯤에는 단체도 방향을 전화해야 할 시점이었어요. 진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사회적기업으로 성장한 시기가 있었지만 청소년 운동 자체는 더 역량을 키우지 못했죠.”

정의당

인터뷰 내내 어떤 질문을 던져도 성민아는 연도와 날짜를 명확하게 답했다. 2018년 1월 15일은 그가 정의당 대구시당에 처음 출근한 날이다. 이번엔 좀 쉬어야지 마음먹은 차에 정의당 대구시당에서 연락이 왔다. 당적은 이미 있었다. 대학생 때 민주노동당에 가입했고 그게 이후 통합진보당, 정의당까지 쭉 이어졌다.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의지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선배’의 권유로 가입했던 게 이어진 측면이 강했다.

“2018년 지방선거를 준비하며 정의당 대구시당에선 홍보를 맡을 사람을 구했어요. 당시 이남훈 사무처장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딱 6개월만 일해보자 제안했죠. 그때만 해도 SNS를 활용한 선거운동이 많지 않았거든요. 이전 단체에서 SNS 홍보 일을 했던 걸 알고 실무를 도와달라는 요청이었어요. 처음엔 거절했어요. 너무 생소한 영역이었죠. 대구시당에서 세 번 찾아왔어요. 그럼 ‘가벼운 마음으로 해보겠다’하고 승낙했죠.”

출근 첫날, 성민아 자리에 놓인 건 정의당 당규와 정의당 대구시당 규약이었다. 그다음 날부턴 중앙당 홈페이지 브리핑을 읽는 업무가 주어졌다. 성실하게 수행하다 보니 당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생겼다. 주로는 현수막, 웹포스터를 만들고 SNS를 관리했다. 애초 선거 기간 단기로 채용됐지만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리가 생겼다. 육아휴직 대체근로자로 좀 더 일했고, 그 직후엔 당원이 늘면서 당직자 TO가 생겨 정식 채용됐다.

선거가 없던 2021년에는 ‘진보정치 아카데미 4.0’에 참여했다. 활동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가서 참석해야 하는 6개월짜리 청년 당원 대상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전국에서 당에 애정과 기대가 있는 20여 명이 모였다. 몸은 고되어도 교육은 재밌었다. 혼자 읽었던 당의 강령을 놓고 전국에서 모인 청년 당원들이 토론을 벌였다. 정의로운 복지국가, 한반도 통일,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 등의 분야 등이 주제였다.

성민아는 대구시당의 5명 사무처장을 모두 거친 당직자다. “정당 실무의 기초는 이남훈 처장에게 배웠어요. 당이란 어떤 조직인지, 당에서 일한다는 건 뭔지 아주 기초적인 걸 알려주셨죠. 김지훈 처장에겐 각종 실무를 배웠어요. 조직 관리와 당이 돌아가는 시스템에 대해 빠삭하셨죠. 가장 최근 함께 일한 김성년 처장에겐 정책을 배웠어요. 아침에 출근해서 뉴스를 쭉 보고 당이 논평이나 성명을 내야 할 사안을 뽑아 빠르게 정리하셨거든요.”

▲2023년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당시 파견근무를 갔던 모습 (사진=성민아)

성민아는 출마를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출마자들을 지근거리에서 도왔다. 거의 매년 선거를 치르며 당직자나 활동가가 출마를 준비하고 선거운동을 하고, 가끔 당선되는 걸 봤다. “출마자들의 선택엔 제가 헤아릴 수 없는 각자의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정의당이라는 이름을 갖고 출마하는 거잖아요. 대구는 경선이나 공천 분쟁은 없는 대신 진보정당끼리 조율이 필요한 경우가 있어요. 청년 정치인은 본인이 지역에서 전달하고 싶은 분명한 메시지가 있고, 당선 경험이 있는 정치인은 당선을 목표로 출마해요. 기본적으론 선거 시기가 되면 지역조직 중심으로 캠프가 꾸려지지만 시당에서도 함께 방향을 논의하고 홍보나 투표참관 같은 업무를 하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당직자 생활을 돌이켜보면 조용한 날이 없었다. 2019년에는 조국 사태, 2020년에는 박원순 조문 사태로 민원 전화 폭탄을 받았다. 2020년 21대 총선에선 당이 여성 청년 후보를 비례대표 1, 2번에 세우면서 안팎으로 여러 논쟁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부동산 투기 대응, 농지법 개정,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관련해 시당 차원의 활동들은 보람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을 묻자 단번에 전세사기 대책위원회라는 답이 나왔다.

“처음 한민정 위원장이 전세사기 대응 활동을 지역에서 해보자고 할 땐 반신반의했어요. 정확한 피해 규모조차 파악이 안 된 시점이었죠. 그런데 대책위원회를 출범하고 한 달간 20건 정도의 전화를 받았어요. 이후 피해자들과 만나서 대책활동을 하며 함께 변화를 만들어간다고 느꼈죠. 힘든 시기였던 우리에게도 동력이 됐던 것 같아요.”

올 초 있었던 22대 총선의 소회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선거로 정의당은 12년 만에 원외 정당으로 밀려났다. 성민아 개인 입장에선 당직자를 그만두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그는 선거 이후 나온 모든 평가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말로 운을 뗐다. “당은 여러 기점을 겪을 때마다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봐요. 21대 총선이 있었던 2020년에는 청년을 앞순위에 배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고, 이번 22대 총선에선 녹색당과 선거연합정당을 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죠. 모든 과정이 지나가고 나온 평가는 겸허히 받되 그 당시 우리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선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2018년 이후 당의 활동은 중앙당 활동 중심으로, 언론을 경유해 알려진 부분이 많았다고 봐요. 지역조직인 대구시당 입장에선 장태수, 이영재, 김성년 3명의 구의원이 있던 시기 이후 다른 기점을 만들지 못했죠. ‘다른 선택을 했다면 드라마틱한 반전을 만들 수 있었을까’에 대해선 잘 모르겠어요. 지금으로선 남은 당원을 추스르는 게 시급하다고 생각해요.”

민주노총, 다음 활동가

당의 일은 성민아의 손에 일부 남았다. 마음이 남아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웹포스터를 만들고 아직은 인준 전이지만 달서구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을 것 같다. 많은 당직자가 그만둔 상황에서 정의당은 지난 9월 당직 선거를 치렀다. 성민아도 선관위 간사직을 맡아 실무 전반을 도왔다. 민주노총 대구본부에 출근하기 시작한 이후라 저녁에 퇴근하면 대구시당으로, 집 컴퓨터 앞으로 출근했다.

“대체로 조직에서 막내로 일 해왔는데, 민주노총 대구본부에 오니 또래가 많더라고요. 물론 노동조합 경력으로는 완전 막내이죠. 요즘 고민은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언제고 선배들하고만 일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한 번씩 다음 세대 활동가, 저보다 나이 어린 활동가들을 만나면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들을 이해해요. 하지만 전 낀 세대이니 선배 세대 활동가도 이해하죠. 그 중간 지점에서 제 역할을 고민해요.”

무엇이 다르다고 느끼는지 물었다. 성민아는 활동가 영역에 진입하는 경로가 다양하다는 점을 가장 먼저 꼽았다. “저처럼 어물쩍 시작한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후배 세대는 자기가 관심 있는 영역이나 의제가 분명해요. 풀어내고자 하는 방법도 뚜렷하죠. 이건 굉장한 장점인데도 이들이 활동을 지속하지 못하는 건 경제적 여건 때문이라고 봐요. 그걸 감수하고 할 수 있는 건 제가 마지막 세대인 것 같아요.”

노동조합에서 일하면서 성민아는 그걸 피부로 느끼게 됐다. “임금투쟁을 하는 노동조합 조합원을 가까이에서 보니 더 와닿아요. 당에서 듣는 것과 민주노총의 현장에서 듣는 것의 체감도가 다르더라고요. ‘선배들처럼 살 수 없다’는 후배 세대 활동가들의 말도 좀 더 이해하게 됐죠. 저는 사실 ‘내가 활동가인가’라는 생각을 평소 해왔거든요. 우리세상부터 정의당, 민주노총까지 임금을 받으면서 일을 했다 보니 임금노동자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거죠. 본인이 단체 대표로 있으면서 임금을 주는 입장이거나 보상 없이 일하는 선배들을 봐 와서 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버텨달라. 후배 세대 활동가에게 필요한 역량을 묻자 응원이 돌아왔다. 단체들은 오래됐고 조직 문화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화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임금을 줄 수 있는 단체는 오래된 단체뿐인데 그렇다고 이들이 지속가능한 재정 구조를 만든 것도 아니다. 물론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에 좋은 시대도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체들이 오래 버텨온 이유가 있거든요. 그걸 배우려면 일단 들어가 버틸 수밖에 없어요. 다만 좋은 철학과 지향을 갖고 있는 단체도 결국은 조직이에요. 꼰대 같은 이야기지만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바로 그만둘 게 아니라, 바꿔보기 위한 시도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정의당에도 ‘정의당이라면 이래야지’라고 큰 기대를 갖고 오는 분들이 있어요. 정의당이 조금은 나을 수 있어도 드라마틱하게 다를 순 없거든요. 결국 주축은 40~50대 남성이고, 그들이 아무리 교육받고 주의하더라도 당 밖에서의 시간과 밀도가 높기 때문에 부딪힘은 늘 있어요. 나아지고 바뀌려고 노력하는 정당인 건 분명하지만요. 버티면서 바꿔 나가려는 사람이 없다면 조직도 지속될 수 없어요.”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