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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님이 제 말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억울합니다”
나홀로 민사소송을 진행하다가 결국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오신 한 의뢰인이 하소연하며 하신 말씀입니다. 자신은 진실을 말했는데도 판사가 믿어주지 않고 변호사를 선임하라고 조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는 제출하셨나요?”라고 물어보니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명백한 사실인데 무슨 증거가 필요하냐고 하십니다.
형사소송과 달리 민사소송에는 ‘처분권주의’와 ‘변론주의’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민사소송법 제203조는 ‘법원은 당사자가 신청하지 아니한 사항에 대하여는 판결하지 못한다’라고 처분권주의를 규정하고 있는데 처분권주의란 민사소송 절차의 개시, 심판의 대상과 범위, 절차의 종결에 대하여 당사자인 원고와 피고에게 주도권을 주어 당사자의 처분에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형사소송에서는 수사기관의 ‘인지’나 당사자가 아닌 자의 ‘고발’로도 사건이 시작될 수 있는 것에 비해 민사소송에서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당사자가 절차의 개시를 하지 아니한 경우 당사자가 아닌 자의 신청이나 법원의 직권으로 절차를 개시할 수 없습니다. 또한 사건의 종결에 있어서도 형사소송에서는 당사자가 아닌 수사기관이나 법원의 판단에 의해 사건이 종결되는 반면 민사소송에서는 당사자간의 합의만 있다면 당사자의 의사대로 사건을 종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가 절차의 개시와 종결 등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점이 당사자에게 유리하게만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당사자가 심판의 대상과 범위를 특정하여야 하기 때문에 당사자가 주장하지 아니한 부분에 대해서는 법원이 심판을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변론주의에 의해 당사자가 판결의 기초가 되는 사실과 증거의 수집을 책임지기 때문에 당사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을 법정에서 주장해야 하고 주장하지 않으면 그 사실은 없는 것으로 취급되며, 당사자 간 다툼이 있는 사실에 대한 증거는 당사자가 제출하여야만 합니다. 형사소송처럼 수사기관이 증거를 수집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민소소송의 원칙에 따라 민사소송에서는 당사자의 증거수집이 매우 중요합니다. 판사의 입장에서는 생전 처음 보는 원고와 피고 중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어야 하므로 객관적인 증거를 뒷받침하며 주장을 하는 쪽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습니다. 판사가 내심으로 어떤 부분을 주장하고 어떤 증거를 제출하면 승소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입 밖으로 꺼내어 일방 당사자를 도와줄 수도 없습니다. 이런 경우 판사가 당사자에게 베푸는 최선의 배려가 바로 “변호사를 선임하던지 법률적 조력을 받아보라”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민사소송은 증거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소송의 상대방이 반박을 한다면 증거를 통해 입증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분쟁에 휘말릴 위험성이 있다면 미리미리 증거를 수집하여 억울한 결과를 받지 않도록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박경연 대한변호사협회 등록 가사·형사 전문변호사 / 법무법인 YK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