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054] 세상의 끄트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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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 공장 위, 지상 9m 높이 옥상에 마련한 고공농성장은 세상의 끄트머리다. 더 오르지도, 내릴 수도 없이 하루하루를 버티어야만 하는 세상의 가장자리. 노조에 가입한 것 외에는 잘못이 없는 노동자들은 고용승계를 위해 그리고 자존을 지키기 위해 갈 수 있는 곳이 그곳밖에 없었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노동자 박정혜, 소현숙 씨가 그곳에서 300일을 넘게 버티고 있다. 고용승계에 대한 여지를 조금도 보이지 않는 외투자본과 싸우는 일은 아마도,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과 이대로는 억울하다는 마음 사이에서 고뇌하는 일일테다.

환하게 웃는 날도 있다. 옵티칼로 향한 ‘연대 버스’가 고공농성 300일을 맞아 힘을 전하기 위해 농성장 아래로 모였을 때 그들은 환하게 웃었다. 연대버스는 소현숙, 박정혜 씨처럼 인생을 걸고 고공농성을 했던 도명화, 문기주, 김진숙 등 58명의 제안으로 시작했다. 같은 일을 겪었던 사람들이 이들을 기억하며 힘을 전하자, 박정혜 씨는 “세상과 단절됐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오늘은 공허함이 사라졌다”고 호응했다. 연대 버스 참가자들은 ‘연대의 깃발’을 만들어 고공농성장과 지상을 이었다.

세상의 끄트머리에도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정작 국가는 그곳을 찾지 않는다. 농성장 단수 사건 국가인권위 진정에 심의도 전 기각을 공언했던 이충상 인권위원은 심의에서 배제된 뒤에도 “진정을 기각하고 소송도 패소 판결 해주는 것이 딱한 근로자를 돕는 길”이라고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권위는 소위원회에서 의견이 모이지 않으면 소위원회 차원에서 사건을 기각할 수 있게 퇴보했다.

‘노동 약자 보호’, ‘고용 안정망 내실화’를 목표로 하는 고용노동부는 한국옵티칼 사건에서 아무런 기능도 보이지 않고 있다. 해고자들을 쌍둥이 기업인 한국니토옵티칼로 고용승계 하라는 요구에 대해 고용노동부는 손을 놓고 있다. 기업이 법적 의무가 없어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상황에서 고용노동부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존재 의의를 물어볼 수밖에 없다.

지난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 출석한 한국니토덴코 대표는 니토그룹 차원의 영업법인 통합 추진 과정에서 한국옵티칼 노동자가 한국니토덴코로 전환배치된 사례가 있다고도 인정했다. 그때 전환배치된 노동자가 10명이고 지금 남아 있는 한국옵티칼 해고자는 7명이다. 한국옵티칼의 물량을 가져간 한국니토옵티칼은 화재 이후 해고자들이 싸우고 있을 때 직원을 신규 채용한 바도 있다. 고용승계의 명분도, 전례도 있는데 왜 고용노동부는 뒷짐만 지고 있나. 해고자들이 고용승계 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또 이를 통해 실제로 문제가 해결되도록 하는 일이 고용노동부가 할 일이다.

한국옵티칼 사례에서 보듯, 외투기업이 혜택만 편취하고 편법과 꼼수로 노동자 권리와 ‘국익’은 훼손하는 일도 확인되고 있다. 고의로 이전가격을 조작해 한국법인의 수익을 떨어트리고 이익을 해외 본사로 돌린 사례(한국지엠), 흑자 상황에서도 100여명 노동자를 전원 해고하고 폐업한 사례(한국게이츠), 기술만 빼돌리고 폐업하는 숱한 사례가 확인된 바 있다.

한국옵티칼 문제를 해결하고 고공농성 노동자를 안전하게 다시 땅 위에서 맞이하는 일은 한국에 들어온 외투기업의 윤리적 경영의 전형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의 문제를 세상의 끄트머리에서 외치는 두 해고노동자가 안전하게 땅으로 내려오길 기원한다.

▲3일 박정혜, 소현숙 한국옵티칼 해고노동자가 연대 버스 행사 참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금속노조)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