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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주] ‘영화, 시·그림을 만나다’는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영화를 본 후 시인은 그 영화의 이미지를 시로 쓰고, 화가는 그림을 그려 함께 발표하는 프로그램이다. 시와 그림, 그리고 영화는 이미지의 예술이다. 좋은 시를 읽으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경험을 하셨을 것이다. 좋은 영화 또한 한 폭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시인과 화가가 본 그 영화의 이미지는 어떤 모습일까.
‘드라이브 마이 카’
감독:하마구치 류스케
출연:니시지마 히데토시, 미우라 토우코
2021년, 러닝타임 179분
누가 봐도 아름다운 부부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와 오토(키리시마 레이카). 우연히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가후쿠는 이유를 묻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2년 후 히로시마의 연극제에 초청되어 작품의 연출을 하게 된 가후쿠는 그곳에서 자신의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미우라 토우코)를 만나게 된다. 가후쿠와 마찬가지로 미사키 또한 옛 엄마에 대한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 조용한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점점 마음을 열게 되고, 서로가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인 가후쿠는 각본가인 아내 오토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왜 아내는 젊은 배우와 바람을 피웠을까. 자신들의 침실에서 이뤄진 은밀한 행위를 직접 눈으로 목격했지만, 그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아내의 진실을 알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던 중 아내는 세상을 떠나버린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떠나보내지 못한다.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둔 상처는 여전히 꾸덕꾸덕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의 차를 운전하는 미사키는 사고로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과 생전에 화해하지 못한 아픔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는 히로시마 예술단의 전속 운전사로 가후쿠의 빨간색 차를 운전하게 된다. 그 차에는 가후쿠가 떠나보내지 못한 아내의 체온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는 영화다. 애도는 죽음과 이별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애도하지 못한 죽음은 이별하지 못한 상처가 된다. 그래서 살아남은 이는 죽은 이가 남긴, 아물지 않는 과거에 매달린다. 내가 가야 할 현재의 길을 놓치고 방황하는 것이다.
화가 권기철은 ‘경청에 대한 3가지’라는 그림으로 길 위에 던져진 그들을 화폭에 담았다. 주인공의 콜라주에 채색을 곁들였다. 가후쿠와 미사키를 좌우에 두고, 삼각의 금지된 공간을 그들 사이에 뒀다. 얼굴은 무표정하고, 눈은 초점을 잃었다. 그 어떤 인사나 화해도 용납하지 않을 듯 주머니 깊숙이 손을 꽂고 있다.
과거의 상처에 매몰된 둘의 삶에는 그 어떤 온기도 없었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빨간 표지판처럼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노랑 희망이 싹튼다. 빨강과 노랑의 반복적 패턴은 금지와 소통의 지점들이다. 그리고 그 패턴은 빨간색 자동차 사브 터보 900으로 이어진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단편소설이 원작이다. 소설에는 노란색 자동차지만 영화는 빨간색으로 설정했다. 빨강이 이글대는 내면을 훨씬 강렬하게 묘사해 주는 색이다. 제목에서 보듯 자동차는 주된 영화적 공간이다. 숙소와 연극 공연장까지 오가는 운송 수단이자 주인공의 내면이 소통하는 주 무대이다.
차 안에는 여전히 죽은 아내의 목소리가 흐른다. 연극 대사를 읽어주는 오디오 테이프 속 아내 목소리다. 가후쿠는 아내의 대사에 그 다음 대사로 응답한다. 죽은 이와 대화한다는 것은 공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아내가 앉았던 조수석은 늘 비어 있다. 어느 순간, 가후쿠는 뒷좌석에서 조수석으로 옮겨 탄다. 선루프를 열고 담배까지 피운다. 자동차가 과거를 딛고 현재로 옮아오는 소통과 자각의 미학적 도구로 쓰인 것이다.
소설가 백가흠의 ‘드라이브 마이 라이프’는 시가 아닌 초단편 소설이다. (이런 형식을 작가들의 토론 끝에 ‘시소설’로 부르기로 했다.) 그 또한 자동차를 영화의 주요 공간으로 인식하고 자동차의 주행을 인생에 비유했다. 그러나 다소 비관적이다. 비탈길을 오른다. 목적지도 명확하지 않으며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알아도 너무 늦어버렸다고 체념한다. 앞으로 갈 길보다는 두고 온 것에 대해서 얘기한다. 다시 오지 않을 것들에 대해서다.
드라이브 마이 라이프
_백가흠우리가 탄 차는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지 단지 고개 너머가 궁금했던 것뿐이었어 누구 때문인 지는 중요하지 않았어 차가 잠깐 멈추었을 때 잘못 온 길이라는 것을 겨우 깨달았으니까 그땐 너무 늦었으니까 서로 모르는 척 어쩔 수 없었던 거지 우리는 내내 두고 온 것에 대해 얘기했지 자주 함께 걷던 호숫가, 잔잔히 흩어지던 물무늬, 우리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들에 대해 말이야 우리의 차는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도달했다는 것을 너도, 나도 알았어 그럼에도 너는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곳으로 말이야 때마다 따라 붙던 은빛 여울, 허무의 소용돌이, 우리는 전속력으로 오르막길을 올랐지 멈출 수 없었어 너무 멀리, 높이 왔으니까 고도에 곧 닿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리고, 이윽고, 우리는 정상에 다다랐지 아, 우리는 허공에 올랐어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지 바냐 삼촌의 말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 그때서야 조수석에 네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지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어 우리가 오른 이곳을 봐 힘들게 올라온 그 길이 다시 시작되고 있어 허공에서 허공으로 올라가는 저 길 말이야 그런데 디디가 말하던 그 곳이 여기가 맞긴 맞는 거겠지? 나 이제 어떡해
아내는 정사 중에 신음 대신 가상의 이야기를 뱉어낸다. 전생에 칠성장어였던 소녀가 남학생의 집에 드나드는 은밀한 환상이다. 이해할 수 없는 아내의 버릇이다. 그래서 절정의 순간을 맞는 아내와 달리 가후쿠는 공허한 표정을 짓는다. 아내의 오르가즘은 그에게는 들어갈 수 없는 단절된 우물인 셈이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올라가는 저 길’은 사랑하지만 아내와 소통할 수 없었던 그 어떤 지점을 말하는 것이다. 마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처럼 말이다. 연극이 끝날 때까지 고고와 디디가 기다리던 고도는 등장하지 않는다. 고도가 누구(무엇)이며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도 알 수 없다. 그냥 고도를 기다릴 뿐이다. 백가흠은 ‘여기가 맞긴 맞는 거겠지?’라며 가후쿠의 모호한 사랑의 정체를 터치한다.
과연 아내에 대한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가후쿠는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배우의 독백을 듣고는 깨닫는다. 온전히 사랑하는 것은 완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마침내 그는 아내의 자리, 조수석에 앉는다. 드디어 아내의 우물에 들어간 것이다.
자동차와 함께 연극은 또 하나의 중요한 공간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로 시작해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가 주된 무대다. 바냐는 지식인이자 예술가인 블라디미로비치를 우상처럼 여겼지만 어느 순간 그의 허위를 깨닫고는 세상 무너지듯 절망하고 후회한다. 그를 위로하는 것이 질녀인 소냐다.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 받았다고. 울었다고. 그렇게 드디어 우린 평온을 얻게 되겠지요’ 소냐의 위로는 가후쿠를 비롯해 우리 모두에게 전해져 삶의 의미를 명료하게 한다.
영화는 ‘바냐 아저씨’의 출연 배우를 일본, 한국, 대만 등 다국인으로 등장시켜 이 주제의 보편성을 건져 올린다. 특히 소냐 역(박유림)을 수어로 소통하는 한국 배우로 설정해 더욱 큰 울림을 준다. 권기철의 그림에서 삼각의 틀을 받치고 있는 것이 바로 수어하는 소냐의 손이다. 해소되지 않는 과거와 현재의 갈등을 쓰다듬는 손길이다. 핑크색으로 채색해 그 따스함을 더한다. 그 손길은 바냐뿐 아니라 가후쿠와 미사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전해주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상문법이다.
‘진실로 타인을 보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깊이 똑바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영화 속 대사이다. 가후쿠처럼 아내의 마음을 그대로 보는 것은 무리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마음과 능숙하게 타협해 가는 것이다. 백가흠의 시소설 마지막 문구인 ‘나 이제 어떡해?’의 답이 아닐까.
김중기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