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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음력 9월, 민성징閔聖徵의 행태가 경상감사라는 직책만 감추면 흡사 깡패와 다름없었다. 당시 경상감사 민성징은 경상도 북부 지역 순력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형장刑杖이 낭자하여 피가 땅을 적시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고문으로 목숨을 잃는 이도 있을 정도였고, 목숨은 건졌지만 거동하기 힘든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원래 감사의 순력이라는 게 경상도 관할 지방 군현을 감사가 직접 돌아보는 일이다. 각 군현의 현황을 살피고, 지역 현감이 그 지역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지 등을 파악하기 위한 행위이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이 심상치 않았다. 영주의 경우에는 지역 양반들의 자치 기구인 향소鄕所의 전임과 신임 관리 6명 가운데 곤장을 맞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향소가 양반들 중심의 기구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양반을 대상으로도 이처럼 사정없이 매를 휘둘러 대니, 아전들이나 평민을 대상으로는 어떠할지 짐작할만했다. 영주에 소속된 읍면의 아전들은 정강이가 으스러져 찢긴 사람이 나올 정도로 고문이 행해졌다. 봉화에서는 민성징이 심하게 아전들을 닦달하니, 현감이 뜰에 서서 아전들을 위해 통사정을 했을 정도였다. 상주에서는 향소 임원 4명이 모두 압슬형壓膝刑을 당했다. 압슬형은 무릎을 꿇리고 그 위에 돌이나 벽돌을 쌓아 자신의 죄를 실토하게 하는 고문으로, 대퇴부나 무릎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가끔 무릎 아래 사금파리나 뾰족한 돌을 놓아 고통을 배가 시키기도 했기 때문에, 양반들에게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용궁현에 들러서는 별감 장여신을 곤장형으로 다스리고 안동부에 옮겨 가두라고 명했는데, 그의 가족들이 들어와 애걸복걸하자 보란 듯이 곤장을 한 차례 더 치고 압슬형까지 가했다. 예천에서도 향소 임원 2명이 곤장을 맞았다는 소식도 있었다. 향소 임원이 이런 정도이다 보니 관아의 아전들 같은 경우에는 한 읍에서 적어도 15~16명이 곤장을 비롯한 다양한 형벌을 받을 정도였다. 예안에 들어오기 전 안동부에서도 20여 명을 대상으로 곤장을 쳤으니, 그야말로 사람의 목숨 보기를 지푸라기나 먼지와 같이 여길 정도였다. 이 기록을 남겼던 김령에 따르면 가혹하고 잔인하기가 박엽이라는 경상감사와 더불어 최고 수준이라 토로할 정도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민성징이 어느 군현에든 도착하면, 바로 매질부터 시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순력을 돌면서 예천을 거쳐 안동에 도착했을 때, 당시 안동부의 한 마을에서만 바친 물품이 쌀 20섬에 종이가 1바리, 온갖 잡물들이 10여 바리가 넘을 정도였다. 워낙 강하게 폭력을 휘둘러 대니, 고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매를 피해 볼 요량으로, 엄청난 양의 뇌물성 선물을 안겼다. 포악하다고 소문이 나니, 군현의 아전이나 고을을 책임진 향소 임원 입장에서는 일단 물건이라도 바치고 처결이 가벼워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다른 곳에서 얼마나 냈는지 비교하면서, 최소한 기분이 나쁘지 않을 정도를 바쳐야 했다. 한 고을이 이 정도였으니, 다른 고을에서는 어느 정도였을까?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민성징의 탐욕이 개인 차원에서만 머무는 게 아니라는 데 있었다. 민성징은 예천 땅에 사는 권극해權克諧라는 사람을 총애했는데, 그가 풍수지리를 잘 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연히 민성징은 권극해의 말을 잘 따랐고, 이로 인해 권극해에게 잘 일러 두면 매질을 피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자 민성징 뿐만 아니라, 권극해를 대상으로 하는 뇌물도 적지 않았다. 그가 상주 땅에서 받은 것만 쌀 3섬에 무명 5필이고, 예천에서도 쌀 2섬, 무명 5필을 받았다. 안동에서는 무려 이 전체의 4배를 더 받았고, 잡물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백성 입장에서는 민성징 뿐만 아니라 권극해에게도 뇌물을 바쳐야 했으니, 이래 저래 죽을 맛이었다.
더 황당한 일도 있었다. 민성징과 친척인 민택閔澤은 교묘한 방법으로 민성징을 이용해서 자기 부를 채웠다. 그는 경상도 사람을 대상으로 노비와 재물을 추심해 주었다. 그런데 민택에게 부탁하면, 그는 민성징의 권위를 이용해 노비와 재물을 강압적으로라도 탈취해서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주었다. 이렇게 추심을 받아 노비나 재물을 받은 사람은 노비 몇 명을 민택에게 뇌물로 주었는데, 이렇게 얻은 노비가 거의 40여 명이 되었다. 노비 5~10명이면 한양의 꽤 괜찮은 기와집 한 채를 장만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그 피해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민성징은 자신에게 위임된 국가 권력을 자신의 치부를 위해 사용한 대표적인 경우였다. 폭압적이면서도 재물을 탐하는 전형적 탐관오리였다. 그런데 이 같은 탐관오리의 곁에는 탐관오리에게 위임된 국가 권력을 마치 자기 것인양 행세하면서, 그와 가깝다는 이유만으르도 백성들을 수탈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생겨났다. 박스 안의 귤 하나가 부패하면, 그 주위 모든 귤이 부패하는 것처럼, 관리의 부패는 예나 지금이나 그 한 사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