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울린 총성 두 발, 대구 찾은 ‘2024 탕탕전’

2021년 광주에서 시작된 ‘탕탕전’
올해 처음 대구와 서울로 전시 확대
“가장 치열한 항일민족운동 지역, 대구·경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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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바탕에 한 남자의 얼굴이 부조처럼 새겨졌다. 그 아래에는 손을 형상화했다고 하기엔 어색한 모양의 무언가도 부조되어 있다. 남자의 얼굴 위로 흰 스프레이로 휘갈겨 쓴 것 같은 문자도 새겨졌다. 문자의 한 획을 표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긴 가로줄이 남자의 눈을 가로지른다. 미처 다 마르지 않은 흰 스프레이가 남자의 눈동자에 이르러 또르륵 흘러내리며 굳어버렸다. 남자의 눈물마냥.

“원래는 평면 작업을 하다가 돌출하는 기법을 써봤다. 우리가 너무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계속 반복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걸 끄집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 기법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진실은 계속 누군가가 꺼내지 않으면 계속 묻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표현한 걸로 보시면 될 것 같다. 제목도 ‘언피니시드 미션(unfinished mission)’으로 했다. 그때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면서 영원히 기억될 임무를 마치셨는데, 1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임무가 끝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또 지금은 아마도 독도를 지키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미도 작품에 담았다.”

남자의 이름은 안중근,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운동가다. 1909년 10월 26일로부터 115년이 흘러 2024년 10월 26일, 그는 완수했지만 완수하지 못한 임무를 안은 채 캔버스에 그려졌다. 그래피티 작가 헥스터(Hexter)가 올해 처음 ‘친일 청산하기 좋은 날, 10·26 탕탕전(展)’에 참여하면서 선보인 작품이다.

▲헥스터 작가는 첫 탕탕전에 참여하면서 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한 작품 ‘unfinished mission’을 선보였다.

2021년 광주에서 시작된 ‘탕탕전’
올해 처음 대구와 서울로 전시 확대
“가장 치열한 항일민족운동 지역, 대구·경북”

2021년부터 광주 지역 작가들을 중심으로 10월 26일마다 선보이던 ‘탕탕전’이 올해 처음 대구를 찾았다. 10월 26일은 우리 역사에서 유난히 총포와 관련해 의미가 큰 사건이 여럿 있는 날이다. 1979년 10월 26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날이고, 1920년 10월 26일엔 청산리에서 김좌진 장군이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19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고, 1597년 10월 26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의 승전보를 전한 날이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토 히로부미 저격일이 동일하다는 데 착안한 누리꾼들을 중심으로 이날은 ‘탕탕절’로 통하기도 한다. 이들은 친일 전력이 있는 독재자를 저격한 것이 민족을 수탈한 일본 제국주의자를 저격한 것과 의미도 상통한다고 본다. ‘탕탕전’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3년 전 처음 탕탕전이 시작할 때부터 ‘친일 청산하기 좋은 날’이라는 수식이 붙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광주에서 시작해 지난해까지 광주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준비된 탕탕전은 올해 처음 대구와 서울에서 선보이게 됐다. 대구 전시는 이날부터 내달 8일까지 중구 서성로 공간7549에서 열린다. 전시가 열린 공간도 10월 26일과 직간접적인 인연이 있다. 이곳은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가 운영하는 공유 공간으로, 박정희 유신정권으로부터 희생당한 가장 상징적 인물들인 인혁당 사건 희생자를 기리는 곳이다. ‘7549’라는 공간 명칭도 사법살인이라 평가되는 사형집행이 이뤄진 1975년 4월 9일을 의미한다.

▲26일 대구 공간7549에서 ‘친일 청산하기 좋은 날, 2024 탕탕전’이 열렸다.

대구와 서울 탕탕전 준비를 총괄하는 고경일 작가는 “탕탕전은 친일파를 청산하고 친일 문제를 우리 삶에서 완전히 털어내자는 의미로 시작됐다. 대구·경북은 가장 치열하게 항일민족운동이 있던 지역”이라며 “이 지역에서 아직 친일파였던 인물들, 그런 집안의 후손들이 누리는 상황이 아직 남아있다. 실제로 박정희 전 대통령 광장을 만든다거나 동상을 세우는 부분은 얼마나 공론화되어 뜻이 모아졌는지 궁금하다”고 전시 의미를 전했다.

이어 “준비하면서 인혁당 사건으로 고인이 되신 여러 열사를 기리는 단체가 엄연히 존재하고 그것도 대구 중심에 굉장히 오랫동안 활동을 하는 상태인데 이런 분들이 살고 있는 코 앞에다가 박정희 동상도 세우고 광장도 새로 이름 붙이고 하는 것들이 이루어진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며 “유족들에게 두 번, 세 번 대못을 박는 일을 아직 하고 있구나 싶다. 그 대못을 뽑는 작업을 해야 되고, 그 시작이 이 전시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헥스터 작가는 “장교로 군 생활을 했는데 안중근 의사는 육군에서 흠모하고 숭모하듯 했다. 그런데 정권이 보수화되면서 폄훼하려는 시도들이 계속 눈에 보여 안타까웠다”며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악은 언제나 성실한데 그 반대는 성실하게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저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열심히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하게 됐다”고 참여 동기를 밝혔다.

▲전시 첫 날 현장을 찾은 이들이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탕탕전의 상징이 되어버린 안중근 의사는 이곳에서 여러 모습으로 분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던 그 모습도 당연히 있지만, 저격의 대상은 일본군 군복을 입은 박정희로도 바뀐다. 전시회 첫날 현장을 찾은 김영식 신부(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는 “제가 20살, 21살일 때 10.26 총성이 울렸다”며 “상징적으로 안중근 장군이 친일파 박정희를 사살하는 장면은 옛 영웅이 되살아나 지금 시절의 악인을 처단하는 장면으로 참 상징적인 의미를 저희에게 준다”고 전시를 평했다.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