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벼랑 끝까지 내몰린 백성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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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길었던 여름이 이제는 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실종된 가을을 찾아달라는 우스개가 낯설지 않은 시기이다보니, 이맘때면 한참 기대하는 단풍마저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운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안동과 봉화를 오가다 보면,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청량산을 꼽는다. 청량산에 반해 청량산에서 삶을 이어가는 어떤 이는 청량산에 대해 한국에서 영산(靈山)이면서 명산(名山)인 산이라면서 그 변화의 아름다움을 극찬하기도 했다. 퇴계 이황이 걸었던 철학자의 길 끝에서 철학과 사색을 즐기기에도 청량산만한 곳이 없고, 가을이 되면 단풍이 만들어 내는 절경 역시 조선 어느 산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명산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청량산은 조선 최고의 성리학였던 이황이 가장 사랑한 산이다. 그는 오죽하면 청량산에 대한 사랑을 담아 ‘오가산(吾家山, 우리집 산)’이라고 했을까? 그에게 청량산은 산의 아름다움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수향을 가능케 했던 수양의 산이었으며, 동시에 자연과 자신을 합일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색의 산이었다. 금강산 다음으로 지리산과 더불어 가장 많은 유산록이 남을 정도로 청량산은 선비들이 즐겨 찾는 산이었다.

1746년 음력 9월 12일, 봉화 사람 권정침(權正忱)의 청량산 유산도 같은 이유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청량산 사람들을 보다 보니, 이제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청량산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청량산에서 그가 만난 청량산 사람들은 한창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따라 조를 수확하고 있었다. 벼랑 사이라고 해야 겨우 선 하나 들어갈 정도였지만, 낟알이 버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다발을 묶어 조를 훑고 있었다. 압도될 정도로 깎아 지른 산세는 원래 청량산이 주는 최고의 경관이었지만, 그 위에 사람이 있으니 그 아찔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은 청량산 왼편 산허리에 서너 채 형성되어 있는 작은 민간에 살던 사람들이다. 이 마을 자체도 바위 사이에 의지하여 천 길 깎아지른 골짜기를 바라보면서 형성됐다. 원래는 전쟁이나 난리가 있으면 잠시 피할 목적으로 만든 산성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마을이다. 사방으로 바위들이 어지럽게 층층이 솟아 있는 그 사이 작은 틈에 마을이 자리 잡았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농사지을 만한 평평한 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디든 농작물이 자라기만 해도 수확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여기에까지 몰려와서 터를 잡고, 손바닥만한 벼랑 끝 땅에 조를 심은 이유는 분명했다.

권정침이 이 기록을 남기던 당시를 기준으로 근래 몇 년 동안 백성들이 조금씩 농사짓기 좋은 평평한 땅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몇 년에 걸쳐 이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가혹한 부역이 최종적인 이유였다. 그런데 이러한 부역마저 견디지 못하고 백성들이 평지에서 도망칠 정도로 힘든 이유는 이미 그전부터 누적되고 있었다. 지속적인 흉년으로 힘든 상황이었고, 특히 이 기록이 있기 한 해 전인 1745년에는 전국적으로 큰 가뭄이 있었다. 청량산을 중심으로 주위에 있었던 고을인 예안과 봉화 지역이 유난히 심했다.

농사가 흉년이라 해도 내야될 세금은 있었고, 봄에 빌린 곡식도 갚아야 했다. 환곡은 더 이상 구휼이 아닌 일종의 세금처럼 된 게 한두 해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 백성들을 더욱 못 견디게 만들었던 일이 바로 가혹한 부역이다. 안 그래도 못 먹고 살면서 세금을 내야 하는 백성들 입장에서 부역은 그야말로 이중, 삼중의 고통으로 돌아왔다. 결국 세금과 부역이라도 피하려 고을을 떠나는 사람이 늘었고, 권정침의 표현에 따르면 민가 10곳 중 9곳이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아직 본격적인 추위가 채 닥치기도 전인데 벌써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이 즐비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몰려들 수 있는 곳은 뻔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산골에 추위나 막을 집 한 칸을 짓고 벼랑 끝을 오르내리면서 농사를 지어야 했던 이유이다. 일반인의 눈에 토지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으니 누가 세금 내라는 사람도 없을 터였다. 게다가 위험을 감수하고 이 마을까지 올라 세금을 거두거나 부역에 나오라고 통보할 이도 없을 터였다. 이러한 곳에 겨우 몸을 누일 한 뼘의 집과 겨우 먹고 살만한 조 한 되만 있어도, 차라리 이들은 팍팍한 청량산의 삶을 선택했다.

경제는 어렵고 배춧값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세금은 오르고 어지간한 소득으로 4인 식구를 건사하기도 힘든 시기이다. 물론 1746년 청량산에 내몰린 이들과 지금의 삶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되기는 하다. 그러나 어떤 위치, 어떤 직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를 조금이라도 팍팍한 상황에 내몰면, 내몰리는 이들은 벼랑 끝에서 새로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의사와 과학자들이 한국을 떠나고, 교사가 더 이상 교단을 원치 않으며, 열정을 가진 이들이 회사를 떠나는 이유이다. 그나마 특정 분야가 문제라면 조금 옮겨갈 곳이라도 있지만, 정치가 백성들을 괴롭히면 청량산의 작은 거처 하나 마련하기도 힘들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