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시도 시인도 원하고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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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너는…>(지평, 1987)을 출간한 이순희는 1939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경북대학교 사대부중과 경북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이화여대 불문과와 대학원 불문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소르본느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프로방스대학교에서 불문학 박사를 취득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불문과 교수가 된 이순희는 마흔아홉 살에 아무런 등단 절차를 밟지 않고 부산에서 이 시집을 냈다. 시인은 시라는 언어 양식으로 자신의 원망(願望)을 밝히는 사람이어야지, 등단이라는 요식 행위가 시인임을 반드시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시집 권말에 해설을 쓴 이는 시인의 시 가운데 상당수가 프랑스 상징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시인의 시에서 엿볼 수 있는 이국적(異國的)·신기성(新奇性)·암시(暗示) 수법, 두드러진 운율(음악성) 등이 상징주의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해설자는 대표적인 사례로 “자정은 / 석관을 열고 빠져나온 / 무덤의 뼈들이 / 축제를 벌리는 시간이다”로 시작하는‘몽마르뜨르 언덕 묘지’를 꼽았다. 후반부를 보자. “밤마다 열리는 / 뼈들의 축제에 가보라. / 무대도 없이 /. 박수도 없이 / 덩실덩실 뼈들이 춤춘다 / 하얀 잔을 서로 권한다 / 독이 없는 술을 마신다 / 팡테옹의 위고도 와서 한 마디 / 페르라세즈의 뮈세도 한 가락 / 낯익은 목소리들이 / 정감을 자아내던 / 멋쟁이들이 / 옳고 그를 것도 없이 / 이기고 질 것도 없이 / 한바탕 살고 있는 뼈들의 잔치에 / 한번쯤 가보라”

‘몽마르뜨르 언덕 묘지’는 열거된 상징주의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지만, 이 시가 품고 있는 전언에는 상징주의가 추구했던 진정한 목표인 ‘지고의 미(beauté supérieure)’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식의 쾌락주의와 현실 추수적인 태도가 더 두드러진다. 파리에 위치한 팡테옹은 위인들이 안장되는 프랑스 국립묘지이고, 똑같이 파리에 있지만 페르라세즈는 일반인들의 묘지다. 그런데 시인이 방점까지 찍어 강조한 구절에 따르면, 국립묘지에 묻힌 빅토르 위고나 일반묘지에 묻힌 알프레드 드 뮈세나 죽고나면 매한가지라는 것. 이 시가 새삼 떠올려주는 것은 바니타스(vanitas, 세상은 헛되고 헛되다)와 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오래된 교의다.

시인의 자서를 보면, 이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는 박사학위를 취득했던 대학교가 있는 지중해 연변의 도시 엑상프로방스에서 쓰여졌다. 오랜 유학 생활을 했던 시인은 “불란서 글로 논문을 써야했던 동안 그 부자유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면서, 그제서야 “모국어는 나에게 자유와 동의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말 향수증”에 걸렸던 그 시절, 시인은 “천연스럽게 우리말로 시를 습작”하기 시작했다. 시집에 실린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에서 모국어와 시를 동시에 붙잡으려는 시인의 안간힘을 볼 수 있다.

“말(言)을 찍어내어 / 환부에 바르고 / 바래진 벽지 위에 / 다시 붙여보고 / 가위로 오렸다가 / 풀로 붙였다가 / 어제는 시간 위에 / 풍선처럼 날려보냈다.”(‘詩여’, 전반부) “詩, 너는 인생 한복판에 / 자리잡고 있어 / 싫고 밉고 아픈 것을 피해가는 / 요령을 거부 한다기에 / 이것도 참고 저것도 참고 / 참아 참아 지내건만 / 이것아, / 너 까다로운 성질에 / 마음 잘날 없구나” (‘詩, 너는…’, 전반부)

시인은 유학 중에 모국어와 시의 불가분성을 깨우쳤는데, 시집에서 볼 수 있는 두 번째 각성은 프랑스에서 자연스럽게 채득했을 여성주의 인식이다. 아마도 학창 시절의 친구였을 ‘정아에게’에서, 시인은 꿈을 펼치지 못하고 일상에 묶여 있는 친구를 “깨져버린 거울 속 / 흩어져 있는 너 얼굴”이라고 안타까워한다. ‘백 항아리’에 썼듯이, 여성은 아무런 색채도 없고 주장도 할 수 없는 백 항아리마냥 “입이 커서 목”마르고 “헛배”만 부른 존재에 그쳐야 할까. ‘1975년 여름 유품 전시회’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나혜석 표상’에서 시인은 “이제 뼈도 살도 촉루처럼 녹아 / 꽃불”이 된 나혜석이 “살아 있는 나혜석들”을 불러 깨울 것이라고 쓴다.

장정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