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054] 점령에 자긍심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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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대구에서 열린 퀴어축제에서는 예년과 다른 모습 몇 가지가 눈에 띄었다. 개최 장소가 달라졌는데, 퀴어축제 개최 장소와 관련한 차별적 행정 문제는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됐다. 또 다른 점은 퀴어축제에 참여해 부스를 운영하고, 또 무대에 올라 상당한 연대 발언 시간을 얻곤 했던 각국 대사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작년 축제까지만 해도 꾸준히 참여했던 각국 대사관이 왜 이번 퀴어축제에는 참여하지 않았는지 궁금해 물었다. 대구퀴어축제 조직위에서는 조심스럽지만 명확하게 이야기했다. “팔레스타인 침략 때문이에요···.”

대화와 타협, 휴전을 이야기하는 인접국 정치인들을 표적살해 하고, 팔레스타인, 레바논의 민간인까지 무참히 살해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퀴어 당사자는 복잡한 심경이 들 수 있다. 이스라엘은 자국이 중동 지역의 유일한 민주국가고, 성소수자 인권 친화적 국가라고 자처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최대 도시인 텔아비브에서 무지개 깃발이 휘날리는 축제가 열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또 한편에는 이러한 모습이 이스라엘의 ‘핑크워싱’이라며 비판하는 유대인 성소수자 시민들이 있다. 이들은 ‘점령에 자긍심은 없다(There’s no pride in occupation)’는 구호로, 이스라엘군이 주변국 시민들에게 저지르는 집단학살과 젠더폭력을 고발하고 있다.

서방 국가, 특히 영국은 이스라엘의 침략 전쟁에 책임있는 나라다. ‘밸푸어 선언’으로 유명하다. 영국은 식민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에는 1915년 독립을 약속해 놓고 2년 뒤 유대계 재벌 로스차일드에게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 국가 수립을 약속(밸푸어 선언)하고 또 이를 지원했다.

미국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승인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막대한 후원을 이어오고 있다. 이-팔 분쟁에 원인을 제공하고, 지금의 팔레스타인 민중과 성소수자에 대한 학살을 방조하는 이들 국가기관이 ‘퀴어’를 이야기하는 것은 위선이다.

9월 25일 대구 번화가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대구경북 시민사회 3차 긴급행동에서는 “네타냐후는 히틀러, 이스라엘은 나치”라는 구호가 나왔다. 아우슈비츠 피해 집단이 이제는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주변국에 대한 침략 세력이 됐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한국에도 팔레스타인 평화를 요구하는 시민이 있고, 이스라엘 안에도 베냐민 네타냐후와 그가 이끄는 극우 연정의 침략 전쟁에 반대하는 시민이 있다. 이스라엘의 학살을 방조하는 서구 국가들은 전 세계 시민들의 반전 평화를 향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우슈비츠 학살에 대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관료적·분절적 인식틀을 분석하며,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에서 나오는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제시한다. 아이히만 사형 선고 50년 후, 팔레스타인을 겨냥해 “우리는 ‘인간 동물들'(human animals)과 싸우고 있다”고 하는 네타냐후 내각의 언사를 목도하고 있다.

본격적인 팔레스타인 집단 학살이 시작된 지 1년이 된 즈음에 다시 보는 이 책은 사뭇 다르게 읽힌다. 아우슈비츠 학살 문제의 ‘평범한 악’은 독일인에게 그쳤을까. 그들에게 적극 협력하거나 방조한 주변국이나 유대인 지도층에게선 보이지 않았는가. 지금의 이스라엘 극우 세력이 인종주의적 침략 행위를 다시 시도하는 것은 그때의 ‘평범한 악’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