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운동가들] 세대를 넘는 노동운동으로, 이길우

87 노동자 대투쟁 경험···20대에 노조 위원장으로
대구노련 활동 마치고 건설노동자 돼
지역내 연대 투쟁 고민하며 지역본부 활동
"노동운동 침체기 넘어서려면 노동자의 사회적 활동이 강화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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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때는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사회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운동가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사회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은 오늘도 사람을 만나고, 제도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애를 씁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운동권 특권 세력 청산은 시대정신”이라며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인과 싸우기 위해 운동가들을 몽땅 폄훼하기도 합니다. 운동권이라는 어원은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에 나선 학생운동가를 고립시키기 위해 만든 용어였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기득권으로 살아가지 않았고, 또 일부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오늘날까지 사회운동을 이어가는 운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들도 있습니다. 2024년, <뉴스민>은 매달 198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운동가들의 삶과 더 나은 공동체를 바라는 운동가의 고민을 듣기로 했습니다.

‘노동운동가’란 무엇인가. ‘운동가’에 대한 어렴풋한 개념을 지닌 탓일까. ‘노동운동가’를 찾아 시작한 이길우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장 인터뷰는 자주 겉돌았다. 노동운동가란 단순히 직업으로서 노조 상근자와 다르고, 노동조합의 일반 조합원과도 구분된다는 가정 아래 던진 질문을 이 본부장은 여러 번 바로 잡았다.

이를테면, ‘노조 조합원이라고 해서, 그 사람을 운동가라고 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이 본부장은 “운동가와 조합원의 차이는 특별히 없다. 구분 자체가 잘못됐다”고 했고, ‘노동운동이 이어지고 또 더욱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젊은 세대가 ‘운동가’로 유입되도록 하는 고민도 필요하지 않나’라는 물음에는 “현장에는 젊은 사람이 주축으로 활동하고 경험을 쌓고 있는 곳도 많다. 노동운동과 노조활동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 대중을 기반으로 노조활동이 이뤄지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대중을 기반으로 노조활동이 이뤄진다’는 설명에 이르러 겉돌던 인터뷰는 방향을 찾았다. 노동운동가를 특별한 무엇으로 보지 않는 방향이다. 노동은 사회적 행위이고, 노조활동도 대중 속에서 대중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행위로 봐야 하는데, 노동운동가를 ‘거창한 사회활동’을 하는 별개의 존재인 것처럼 바라보면, 노조의 일반 조합원은 그저 노사관계나 노동조건에만 관심 있는 존재로 정의하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조합원으로로서 노조에서 활동하는 것 자체로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운동가’라는 의미다.

실제로 한국에서 전방위적으로 노조가 결성되고 활성화되던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시기 노조는 대중의 지지 속에서 노사관계 뿐 아니라 제도와 사회 개혁 목소리를 함께 냈다. 가깝게는 박근혜 퇴진 투쟁에서도 노동자의 정치적 목소리는 사회 진보의 원동력이기도 됐다.

이 본부장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현장에서 경험하고, 박근혜 퇴진 투쟁에 이어 윤석열 퇴진 투쟁까지 펼치며 여전히 노동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 시간이 40년에 이르고 있다. 민주노총 출범 30주년을 앞두고, 그의 시선을 통해 민주노조 운동이 지나온 과거와 나아가야 할 미래를 짚어보고자 한다.

▲이길우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장

87 노동자 대투쟁 경험···20대에 노조 위원장으로
조직확대·지역 연대 위한 대구노련 활동
시민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냈던 노동운동
지역 내 연대투쟁으로 벌여진 투쟁
섬유산업의 사양기, 노동운동의 수세 전환
3당 합당 즈음, 공안정국으로
산별노조·정치세력화 위한 민주노총 건설에 힘 보태
남선물산 폐업했지만 섬유연맹 출범
폐업 투쟁하며 노개투 총파업 조직

이 본부장에게 노동운동을 가르친 건 언제나 현장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86년 고등학교 실습 과정으로 대구 염색공단의 남선물산에 취직했다. 전두환 정권 말기였으나 세상사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군사정권 시절 노동현장은 전쟁터였다. 하루 13시간, 주 91시간 일하고, 휴일은 한 달에 하루였다. 남선물산에는 이 본부장처럼 실습 나온 학생이나 젊은 여성노동자도 많았다. 일터에서는 근로기준법, 노동법을 접할 기회는 없었으며, 주휴일이란 개념도 알 수 없었다.

1987년, 전두환의 호헌 조치로 촉발된 6월 항쟁 이후 연달아 노동자 대투쟁이 펼쳐졌다. 그제야 이 본부장도 근로기준법을 알게 됐고, 받아야 할 주휴수당을 회사가 착복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 본부장은 회사 안팎에서 노동자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노조가 없는 상태에서도 남선물산에서는 1987년, 1988년 자생적 파업이 이뤄졌다. 노동자가 모여서 요구하면 관철할 수 있다는 경험이 쌓이면서 1988년 7월 남선물산노조 결성에 이르게 된다. 실습생이던 이 본부장은 일터의 변화를 확인하면서도 곧바로 노조 활동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해 10월, 영장이 나와 군대에 갔기 때문이다.

투쟁의 힘은 전역 직후부터 느꼈다. 남선물산에 다시 취직해 2년 6개월 만에 찾은 현장이 격변했기 때문이다. 월급이 28만 원에서 2배로 늘었다. 주야맞교대에서 3교대로 전환됐다. 1987년부터 남선물산을 포함한 섬유업계뿐 아니라 대구지역 병원, 택시, 제조업 현장에서 노동조합이 활발하게 결성됐다. 하지만 이 본부장이 다시 취업해 노조활동에 나선 1991년부터 공안정국이 펼쳐지면서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시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는 대단했습니다. 노동운동이 사회의 대중적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한 시기였어요. 그 격변기를 현장에서 경험하면서 노동자의 힘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자연스럽게 노조 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제대하고 나니 90년도 3당 합당 이후 펼쳐진 공안 통치와 함께 노조도 위축된 상태였어요.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이 있었고, 남선물산에서는 장기간 파업 이후 해고자도 많이 나온 상태였어요. 3당 합당과 같은 날에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이 출범했죠. 전노협 조직인 대구노련에 속해 활동했어요. 93년도부터 남선물산노조 위원장이 됐어요. 민주노조를 하려면 자기희생이 필요한 시기였어요. 저는 민주노조를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어요. 20대였죠.”

▲89년 남선물선 파업 현장 (사진 제공=이길우)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시절에 노동 관련법을 개정해 노동3권을 퇴행시켰다. 특히 노동조합법 등에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신설했다. 노조 활동 범위를 축소하고 지역별 노동자 연대와 단결을 막으려는 노동운동 탄압 조치다.

대구노련은 제3자 개입금지 조항에도 지역에서 사업장 울타리를 넘어 연대 투쟁에 나섰고, 이 본부장도 1992년 제3자 개입 금지 위반으로 재판을 받아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산별노조가 없던 시기, 대구노련은 대동공업 파업, 대우기전 파업, 남선물산 파업, 염색공단 3사 공동파업 등 지역 내 연대투쟁을 전개했다.

이 본부장이 연대투쟁 강화에 나선 이유는 개별 사업장 내에 고립된 투쟁으로 위기를 넘어서기 어렵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때 조합원 1,500명을 넘긴 남선물산이지만, 섬유산업이 사양기로 접어들어 폐업에 저항하는 투쟁은 한계가 있었다. 설령 폐업하더라도 남선물산노조의 성과를 운동의 조직적 성과로 이어가는 것이 과제였다.

그 대안이 ‘산별노조’로 여겨졌다. 전국적으로 섬유 사업장 노동운동이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1993년도부터 섬유연맹 출범 준비를 시작했다. 이 본부장은 민주섬유연맹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았다. 1996년 경기침체를 극복하지 못한 남선물산은 폐업했고, 1997년 섬유연맹이 출범하면서 이 본부장은 노동운동도 정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폐업과 정리해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폐업투쟁을 하며 총파업 조직의 계기로 삼았지만 아쉬웠죠. 사업장 담벼락을 넘는 연대와 단결이라는 남선물산 노조가 이어왔던 기풍이 이어지길 바랐습니다. 전노협이 해산되고 민주노총의 시대로 가면서, 민주노총이 전노협 정신을 잘 계승하겠다 생각했습니다. 저는 20대를 다 바쳤으니, 활동을 정리해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확성기를 들고 시위 중인 이길우 당시 남선물산노조위원장 (사진=이길우)

대구노련 기풍, 민주노총 계승 기원하며 현장으로
노조 위원장 이력에 번번히 취업 실패···건설현장으로
건설노동자 착취 현장 보고 건설노조 운동 시작

1995년 11월 출범한 민주노총은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주요 과제로 삼았다. 이 본부장은 정치 영역에서 역할은 고려해 보지 않았고, 돌아갈 현장도 없었다. 이 본부장은 지역 내에서 취업을 하려 했지만, 노조 위원장 전력 탓에 번번이 실패했다. 그가 삶의 많은 부분을 할애한 건설현장으로 가게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건설현장에서 일을 시작한 1997년, IMF 영향을 받은 건설업계는 구조조정, 줄폐업, 흡수통합의 진통을 겪었다. 이 본부장이 주로 일했던 삼성물산 현장은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일당이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벽돌공 기준 하루 일당이 12만 원에서 6만 원으로 떨어졌다.

2001년, 경기 김포 현장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쉬는 날 없이 나오는 부부를 만났다. 서울에서 살려면 그렇게 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다. 힘들고 위험한 현장에서 일만 하는 노동자들이 불황과 세계 시장의 한파를 책임져야 하는 모습을 보며 다시 노동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됐다. 2003년, 다시 대구로 온 이 본부장은 건설노동자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보자는 마음으로 건설노조 운동을 시작했다. 곧바로 노조 운동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의 신임을 얻는 일이 먼저였다.

“건설업에서 가장 사람이 많은 목수를 직종으로 택하고, 우선 인력업체에 찾아갔습니다. 2003년부터 3년간 현장에서 일만 했습니다. 건설노조가 IMF쯤부터 있긴 했는데, 일반 노동자가 희망을 걸 상태는 아니었어요. 학생운동 하던 활동가들이 진출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현장 경험이 없어서 신뢰를 얻지 못했어요. 꾸준히 현장에 있어보니, 문제가 파악됐어요. 노동자가 직업의식을 갖지 못한 것이 문제였어요. 잠시 어려워서, 머물다가 가는 일로 생각했으니까요. 그만큼 천대받고 멸시받는 일이었죠. 100% 다단계 하도급인 점도 어려운 문제였어요. 체불임금이나 다른 문제에서 노동청에 진정을 넣으려 해도 접수조차 잘 안됐어요.”

2006년엔 새벽부터 밤까지 현장을 누비고 파업을 준비했다. 6월 1일. 파업 첫 날, 건설노동자 1,500여 명이 일손을 놓고 집회에 나섰다. 현장 수십 곳이 멈췄다. 집회에 나선 사람들은 조합원보다 비조합원이 많았다. 그길로 33일 파업이 이어졌다.

“교섭 한번 못 해본 노조였어요. 파업을 시작하고 많을 때는 3,000명까지도 나왔어요. 건설노동자가 근로기준법, 노동법이란 게 있단 걸 알고. IMF 이후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면서 울분이 폭발했어요. 그걸 보며 동학농민운동이 이랬을까 생각했죠.”

이 본부장은 건설노조활동이 노동자가 정치적으로도 학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2013년 대구 칠성시장에서 열린 노동절 집회에서 한 연사가 발언 도중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판하자 일부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강하게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건설노조 대경지부장이었던 이 본부장은 다시 조합원들과 만나며 박근혜 정부와 노동탄압, 저임금·불안정 노동현장과 정부 책임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합원들도 정부와 맞닥뜨리는 투쟁현장을 다니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노조를 한다고 단일한 성향일 수는 없어요. 노조 외에도 언론, 미디어, 유튜브에서 접하는 세상에서 오랫동안 영향을 받아왔으니까요. 그랬던 건설노동자가 2015, 2016년 박근혜 퇴진 투쟁에 앞장섰어요. 노조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거예요. 윤석열 정권도 대구경북지역의 강한 지지로 탄생했지만, 지금의 지지율은 30% 언저리예요. 경험을 통해 변화할 수 있습니다”

지역 내 연대투쟁 활성화 과제
30주년 맞아 지역 노동 운동 진단 중
노동운동, 특정 세대 구분할 필요 없어
침체기 넘어서려면 노동의 정치적·사회적 성질 관심 가져야

이 본부장은 건설노조에서 촛불 항쟁을 경험했다. 이후 정권이 교체됐으나, 일생 함께했던 ‘공돌이’, ‘공순이’, ‘노가다’의 삶은 변하지 않았다. 이 본부장은 민중항쟁의 과실을 문재인 정권이 독식했다고 느꼈다. 노가다가 아닌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한 민주노총의 역할을 고민하며 이 본부장은 2017년 말 민주노총 대구본부 선거에 출마해 경선을 거쳐 당선됐다. 그 이후 지금까지 3연임을 하고 있다.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에서 이길우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장

지역본부장을 하는 동안 지역 운동의 전반적 활성화, 지역 내 연대 활성화를 계획했다. 전노협(대구노련) 시절 시작한, 사업장 담장을 넘어 연대하는 기풍을 되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전반적 분위기는 달리 펼쳐졌다. 민주노총은 산별노조를 지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개별 사업장 사안에 갇혀 투쟁이 모이지 않고 있다. 노조 활동이 고용 등 노동조건 문제에만 집중되고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는 소극적인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이 본부장은 이를 돌파하는 것을 과제로 여겼다.

“자본주의가 강화되고, 점점 더 생존, 고용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 전 세계적 흐름입니다. 나 때만 해도 공고 나와도 취업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어요. 지금은 기능공이 없어지는 시대고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만 받는 시기예요. 노동자 사이에 단결이 아닌 경쟁만 늘어가고 있죠.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어떻게 보편적 복지를 강화하고 노동자 권리를 확보할 것인가. 그것이 과제입니다. 노동자가 정치적, 사회적 관심을 확대하고 사회를 이끌어가야 노동자의 권리도 향상돼요. 그것이 지역본부의 역할입니다. 대구 지역적 특성도 고민해야 해요. 영세사업장이 많아 장기 투쟁으로 들어서면 노조활동을 이어 나가지 못하는 사례가 있어요. 요즘은 지역에서 투쟁하면 일부러 장기 투쟁 유발하고, 영세사업장 특성을 활용해 폐업하고 이전하는 식으로 대응하기도 해요. 이 점을 지역 연대 강화를 통해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연대기금 조성 등을 통한 소규모 사업장 투쟁 지원 방안을 고민하고 있어요.”

‘운동’을 ‘어떤 목적을 위한 사회적 조직화 과정’으로 정의한다면, 현재의 사회는 ‘어떤 목적’이 달성되지 않은 상태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운동가’란 현재 상태를 넘어서는 의식 또는 목표를 갖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이 점에서 일반적인 조합원을 늘리는 운동 외에도 다음 세대 운동가를 어떻게 양성할 것인지에 대한 점도 중요한 과제다.

이 본부장은 조합원과 운동가가 구분되지 않고, 일선 노동조합에서 이미 ‘다음 세대 운동가’로 볼만한 2030 조합원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종종 운동과는 거리가 멀고 세대의 특성이 드러나는 갈등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이 본부장은 이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바라봤다. 그는 민주노총이 MZ세대 뿐 아니라 다양한 세대·계층의 이해관계를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라는 틀로 모아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지금 쟁점 가운데 국민연금 문제가 있죠. 세대 갈등을 정부가 조장하는 모양새고요.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민주노총은 다양한 계층을 포함하고 조직화해서 함께할 방안을 찾아내야 하는 거죠. 노동 안에서도 계층은 나뉘는 거고, 이 현실에서 합의해 전형을 만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비슷한 취지에서 ‘청년 노동자를 조직화하자’라는 담론에도 의아함을 느껴요. 갈라치기에 편승하는 느낌이거든요.”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능력주의가 확산하고, 연대보다는 성과와 개인적 생존을 추구하는 사회적 풍토가 커지고 있는 실정에서 ‘다음 운동’을 고민해야 할 필요성은 없을까. 이 본부장은 “과거에도 있었던 현상”이라며 “그 현상이 점차 짙어지는 것은 맞다. 앞으로 노동운동 방향은 어떠해야 할지는 사실 어려운 문제”라고 답했다.

그는 “사장 없는 노동,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이 새로운 유형으로 횡행하고 있다. 거기에 맞게 운동도 변화하고, 제도 변화도 이끌어내야 한다. 성과주의라는 사회 분위기에 노조가 편승할 수는 없고, 끊임없이 소통해 가며 평등사회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도 앞으로의 운동을 고민하고 있다. 이들은 내년 민주노총 출범 30주년을 맞아 민주노총과 지역본부의 위치와 난점, 과제를 파악하기 위해 대구지역 노동운동 실태조사에 나섰다. 30년 전의 강령과 변화한 노동현실의 격차를 진단하고 발전 전망을 추려내자는 취지다. 이 본부장은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쳤을 때 노동자가 1,000만 명도 되지 않았다. 지금은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만 1,000만 명이다. 여기에는 5인 미만 사업장도 있지만 비임금성 노동자도 포함된다. 민주노총이 이들을 담아내는 노동운동을 고민해야 한다. 그 방편으로 조사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19세에 노동현장에 나서 지금까지 근 40년. 이 본부장은 노동자 투쟁의 부흥기와 쇠퇴기를 모두 겪고서 일희일비하지 않고 당장의 해야 할 바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상승기를 지켜봤고, 전노협 공안탄압, 노개투 투쟁, IMF를 겪었고 건설노동자의 폭발적 투쟁에도 함께 했습니다. 박근혜 퇴진 투쟁도 지켜봤어요. 윤석열 정부에서 노동운동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죠. ‘건폭’으로 몰린 건설노조도 어려운 상황이에요. 전태일 열사 분신 후 50년이 지났지만, 그간 노동자가 좋은 세상이 별로 없었어요.

어려울 때 노동자는 노조로 뭉치게 돼 있어요. 그걸 깨기 위해 노동자 사이에 여러 계층을 만들고 갈라치는 거예요. 극복해야죠. 반등의 계기는 또 생겨요. 그 계기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준비해야 해요. 역사는 반복되니까 일희일비할 것 없어요. 윤석열 정부의 폭력 정치는 종식될 거예요. 그렇지만 그냥 이뤄지진 않을 거예요. 박근혜 퇴진 투쟁을 노동자가 만들어가는 과정을 떠올리면 돼요. 자신감을 갖고 투쟁을 만들어가야 해요.”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