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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 한국영상자료원 대구분원 개원 기념식 행사에 다녀왔다. 전국에서 세 번째, 수도권을 제외하면 부산에 이어 두 번째 개원이다. 부산 분원이 한국 영화의 상징이라 해도 무방할 부산국제영화제 주 상영관인 영화의전당 영상도서관에 자리한 점을 떠올리면, 상대적으로 영화 문화 변방에 불과한 대구에 분원이 유치된 것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아직 그 의의가 지역사회에서 온전히 소통되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국내 유일의 국립 영화박물관, 한국영상자료원의 가치
‘시네마테크’라는 개념이 있다. 흔히 ‘영화박물관’이라 번역되곤 하지만, 국내에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라 주로 원어 그대로 통용되곤 한다. 처음 탄생한 나라인 프랑스에선 지방 소도시까지 설치된 시설이지만, 세계 영화시장에서 6위권 규모를 자랑하는 (프랑스보다 고작 한 티어 낮은 수준이다) 한국에서 공인된 곳은 단 3곳에 불과하다. 서울에 2곳(한국영상자료원과 서울아트시네마), 부산에 1곳(시네마테크 부산)이다.
이중에서 민간 주도는 서울아트시네마 1곳, 한국영상자료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시네마테크 부산은 부산국제영화제 및 영화의전당이 운영 주체다. 그 외에는 설령 같은 이름을 표방해도 공인되진 못한 상태다. 상당한 규모와 축적된 자료, 그리고 개념에 걸맞은 영화 프로그램 기획 및 상영 등의 자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국가기관이 운영하는 한국영상자료원 분원 유치는 여러모로 효용이 높을 수밖에 없다.
서울에 들를 때마다 상암동에 소재한 영상자료원을 틈이 나면 방문하곤 한다. 주로 보기 드문 영화 상영 프로그램 때문에 찾는다. 심지어 이곳은 무료로 영화를 볼 수 있기에, 작정하고 야심 차게 기획한 프로그램 상영 때는 예매 전쟁이 불붙곤 한다. 서울 시내에선 기묘할 정도로 교통편이 불편한 위치라 수도권 영화애호가의 푸념이 종종 들리지만, ‘지방러’들에겐 배부른 투정일 뿐이다. 저런 게 떡하니 자리하고 공짜로 볼 수 있다니! 수도권과 지방 간 불평등 격차의 바로미터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요즘엔 광역시급에는 어김없이 독립&예술영화 전용 극장이 존재한다. 이곳에선 개봉영화 상영 외에도 수시로 다양한 기획전이 열린다. 영화제도 일회성이긴 해도 상영 프로그램 안에 특집기획을 포함해 영화애호가의 갈증을 달래어 왔다. 하지만 대개 이런 유형의 기획전 상영은 외국영화에 그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출판도서의 납본 제도와 유사하게 국내 제작영화 상영본을 수집 보관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역할은 물론, 과거 고전 한국 영화의 복원에도 일정 역량을 투입한다. 국가기관이기에 수행할 수 있는 권리이자 의무이다.
따라서 한국영상자료원은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선보일 특권을 가진다. 즉 고전 한국 영화를 소개하는 창구로 기획이 가능한 것이다. 그저 영화 상영에 그치지 않고, 온라인 스트리밍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복원판 고전을 볼 수 있는 공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물리적 저장매체로서 DVD 및 블루레이 출시도 병행한다. 영상자료원이 본격적으로 제 역할을 다하기 이전 시기 자료도 꾸준히 저작권자와 접촉해 기부를 받는 등 수집하는 중이다. 영화 강국이라면 응당 일상적으로 수행해야 할 몫이지만, 책임 소재가 모호하던 일이다.
영상자료원 대구분원 개원 전과 후의 결정적 차이
한국영상자료원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한국의 영화 문화에서 필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다. 온라인 환경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안방에서 PC나 휴대전화로 그 성과를 직접 확인도 일부 가능하다. 참 편리해진 세상이다. 하지만 자료원의 방대하게 축적된 아카이브는 극히 일부만 공개된 상태다. 나머지 대부분은 지역에서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그 해답이 바로 분원의 유치다.
고전 한국영화를 비롯해 영상자료원의 방대한 자료 상당수는 저작권 문제 등으로 외부 유출에 제약이 많다. 직접 방문해 자료원 내 비치된 폐쇄회로 연결로 회람 가능한 영상물을 관람해야 한다. 영상물뿐 아니라 희귀한 영화 관련 서적과 자료 역시 그렇게만 열람 가능한 게 태반이다. 대구에서 해당 작품을 보거나 자료를 발췌독하려면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영상자료원 이용시간에 그곳을 찾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수고가 아닐 수 없다. 이 문제가 분원 덕분에 단숨에 상당 부분 극복되는 셈이다.
한국영상자료원 대구분원은 사실 대구 시민들 상당수가 접근하기엔 퍽 불편한 위치에 있긴 하다. 대구와 경북의 경계인 대구스타디움몰에 자리한 ‘미디어센터’ 단지에 소재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대구영상미디어센터와 대구시청자미디어센터, 대구 1인 미디어센터 등이 집약되어 있다. 관련 기관이 밀집해 있기에 호환성은 높지만,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엔 제법 제약이 많은 편이다. (이는 대구광역시 내 상당수 공공문화예술기관이 공통적으로 가진 문제이기도 하다)
일단 이곳에 발품을 들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영상자료원 분원에서 본원과 동등하게 방대한 자료를 시청하고 열람할 수 있게 된다. 온라인으로는 사실상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셈이다. 대구영상미디어센터&대구시청자미디어센터가 공동 분담으로 운영할 예정으로 해당 기관 운영시간 내에는 상시 열람이 가능하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분원 설치를 위해 영상자료원 본원에서 상당한 분량의 물리적 자료를 이관해 자료실 공간을 구축할 예정이다. 2,924권의 관련 서적, 1,943건의 정기간행물, 블루레이와 DVD 1,639점이 따라온다. 온라인 스트리밍은 물론, 소장될 영상자료와 자료원이 보유한 1만 5,000편이 넘는 영화 시나리오를 (11월 내 완비될) 분원 컴퓨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구스타디움이 멀다지만 서울 상암동 행차 길에 비길 수 있으랴. 영화애호가라면 지금 당장 달려가고픈 기분일 테다.
오래 전 사라진 고전영화와 변사의 부활, 의의에 최적화된 공연
그런 기대를 가능케 하는 대구분원 개원 행사가 열렸다. 장소는 대구스타디움몰 1층에 자리한 시청자미디어센터 다목적홀이다. 공공기관 행사답지 않게 조촐한 자리였다. 환영사와 사업 설명, (<장미빛 인생>과 <정글 스토리>의 영화감독이기도 한) 김홍준 영상자료원장 기념사가 이어져다. 하이라이트는 별도로 기획되었다. 바로 윤대룡 감독의 1948년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의 특별한 상영 순서였다. 이제는 잊힌 초창기 무성영화 상영방식을 재연한 기획이었다.
지금의 우리는 극장이라면 CGV를 필두로 한 복합상영관에서 가능한 한 정숙을 유지하며 오감을 자극하는 포맷의 영화를 당연시하며 관람에 임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복합상영관이 탄생한 건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98년 서울 강변 CGV가 최초이니 채 30년도 안 된 셈이다. 하지만 현재 상영관의 98% 이상을 독점한 복합상영관은 우리에겐 ‘극장’ 그 자체로 받아들여진다. 130년 영화의 역사에서 채 3할도 되지 않는 시간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 이전에는 대개 단관극장(상영관이 1개인) 형태였고, 영화 상영 외에도 연극이나 강연 등이 병행되던 ‘복합문화공간’으로 유지됐다. 심지어 건물이 아니라 서커스처럼 가설극장인 경우도 과거 세대에겐 낯설지 않았다. <검사와 여선생> 상영은 그런 향수를 자극하는 특별 행사였다.
영화의 출발점은 무성영화다. 하지만 소리가 없다면 관객은 집중하기 어렵다. 따라서 대사와 상황 해설은 영상 중간에 자막으로 표기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실제 음악 공연과 함께 ‘변사’의 역할이 필수였다. 변사는 자막으로 전달하기 힘든 설명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영화를 재해석해 관객에게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도 수행했다. 하지만 유성영화 등장과 함께 점차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그런 무성영화의 기억을 이번 분원 개원 축하 행사로 재연한 것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활동하는 최영준 변사(가수와 코미디언도 병행)가 색다른 맛을 전달하기 위해 왕림했다.
확실히 변사가 전하는 영화관람은 특별한 체험이다. 변사의 구성진 해설과 추임새는 마치 유능한 번역자의 역할을 상기시켰다. 직역과 의역을 취사 선택해가며 고전 영화가 그저 ‘화석’이 아니라 역사이자 현재와 연결되는 가교 노릇을 수행해낸 것이다. 이는 현재의 영화 상영에선 불가능한 유형의 행위다. 영화에 담긴 그 시대의 자취를 낯설어하는 이들에게 가이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현재 영화 문화가 20-30 문화흡수와 소화력이 빠른 이들 위주로 맞춰진 것에 대해 일종의 ‘전복’ 행위처럼 느껴졌다.
변사는 정숙이 아니라 호응을 영화 내내 요청했고 관객은 기꺼이 화답했다. 마침 상영에 참석한 이들 상당수가 중장년층이기도 한지라 변사의 역할에 추억 향수는 물론 작품 소화에 큰 몫을 담당한 것이다. 영화 상영과 병행된 즉석 공연에 ‘앙코르’을 연발하며 관객들은 흥겨워했다. 요즘 극장에선 볼 수 없는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모습은 작금의 영화 문화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만든다. 요즘 극장 곳곳에선 문화 충돌이 벌어지는 중이다. ‘폰딧불이’, ‘관크’ 같은 멸칭이 유행한다. 휴대전화에 중독된 이들이 영화 상영 중에도 전화기를 수시로 확인하거나, 집중해야 할 장면에서 소음이나 동작을 일으켜 몰입을 방해하다 분쟁이 벌어지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각자의 영화관람 목적이 상이한데 소통은 이뤄지지 않는다. 갈등은 심화하기만 한다. 이날 <검사와 여선생> 상영 자리는 달랐다. 서로 다른 인식으로 충돌하는 게 아니라 기꺼이 한데 어울려 잔치하듯 관람하는 순간이 가능하다는 증명인 셈이다. 잊힌 영화 문화의 재래, 혹은 새로운 가능성의 틈새를 연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으로 이어질 분원 활동에 거는 기대감
물론 영상자료원 분원 개원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제약도 한둘이 아니다. 일단 상암동에 비교할 수 없지만, 운영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민 다수가 쉽게 걸음을 하기 곤란한 위치가 문제다. 분원의 물리적 터전은 마련되지만, 이를 운영할 인력 충원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집이 아무리 번듯해도 그곳을 지키는 사람이 없다면 금방 폐가가 되는 것처럼, 공간을 관리하고 시민에게 가치를 풀어줄 인력이 충실하게 배정되지 않는다면 역할에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다.
긍정적 기대가 훨씬 많은 건 당연한 일이다. ‘시네마테크’로 통칭되는 영화박물관은 초창기에 격심한 논쟁을 겪었다. 주된 내용은 어렵게 수집한 영화 자료(주로 필름 상영본)를 잘 보관하는 데 집중할 것인가, 고전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상영하는 게 주요 임무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오늘날 전 세계 시네마테크의 상징이 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자 앙리 랑글루아는 후자의 입장을 대표했고, 그 결과 영화박물관은 고전을 박제하지 않고 당대 관객에게 다양한 결로 소개하는 활동을 중점으로 하게 되었다. 이는 영상자료원 대구분원에도 중요한 임무로 받아들여진다.
개원 행사가 진행된 대구시청자미디어센터 다목적홀은 사실상 정규 상영관에 필적하는 100단위 좌석을 가진 극장이다. 하지만 개봉영화를 상영하지 않기에 외떨어진 장소라 활용도가 떨어져 온 게 사실이다. (바로 옆엔 CGV 대구스타디움점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대구분원 설립으로 인해 이 공간은 이제 대구에서 볼 수 없던 특별한 상영공간으로 변모할 채비 중이다.
사업해설을 통해 해당 공간에서 월 1회 국내외 고전 영화 정기상영회 계획이 공표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 본원 프로그램 중 일부가 활용될 것이다. 그와 더불어 다양한 기획 상영회를 마련할 예정이라 한다. 해당 상영회에선 영화 상영에 그치지 않고, 해설과 대담 등 부대 프로그램도 마련할 계획이다. 일반 극장과 달리 한국영상자료원 본원과 협조 관계를 활용해 상대적으로 섭외나 비용 제약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이를 통해 지금껏 지역에서 볼 수 없던 여러 유형의 기획이 고려 중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체험하는 배리어-프리 상영이나 극장가에서 소외된 고령자 & 유소년 맞춤 상영 기획이 배려되고, 세계영화사의 고전을 섭렵하는 프로그램도 마련되리라 기대해본다.
무엇보다 고전 한국 영화의 재발견이 지역 영화 문화에 미칠 파급력에 주목해 본다. 한국의 영화 문화는 대개 한국은 배제하고 이뤄지는 경향이 짙다. 일단 자료 접근이 어렵고, 과거 군사독재정권의 문화 검열로 인해 1960-80년대 말까지 거의 한 세대가 세계영화사의 급진적 변화와 격리된 채 낙오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애호가라면 귀에 익은 누벨바그, 뉴 아메리칸 시네마, 페미니즘 영화의 대두와 한국의 영화 문화는 오랫동안 분리되어 있었다. 국내 영화인들도 창작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검열에 신음하다 보니, 관변-어용영화인만 남았다. 그 때문에 신세대 영화 문화에선 고전 한국 영화라면 보기도 어렵지만, 굳이 찾아볼 가치도 없다고 치부하기 일쑤였다. 뒤늦게 김기영이나 임권택 감독의 가치를 발굴하긴 했지만, 대다수의 경우 여전히 파묻힌 채로다.
분원 설립에 너무 호들갑을 부리는 것 같지만, 뭐든 출발이 중요하다. 그전에는 주목받지 못하며 소외당한 계층이 영화 문화에 편입될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해외 시네마테크가 지역사회 중장년층의 문화향유 공간으로 기능하는 반면, 상대적으로 ‘힙스터’ 문화의 총아로만 머무는 독립예술영화 주변 환경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리라 희망해본다. 지역의 신진 창작자들이 분원이라는 노다지에서 동서고금의 풍부한 영화 문화 광맥을 발견해 자기화하고, 영화애호가들이 발품 팔아 다양한 영화를 접하며 교류한다면 한창 주목받는 ‘대구영화’와 지역의 영화 문화에 핵심적인 축으로 자리 잡기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앞으로 분원의 프로그램을 주시하려 한다. 많이들 그래주시길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