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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때는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사회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운동가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사회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은 오늘도 사람을 만나고, 제도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애를 씁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운동권 특권 세력 청산은 시대정신”이라며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인과 싸우기 위해 운동가들을 몽땅 폄훼하기도 합니다. 운동권이라는 어원은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에 나선 학생운동가를 고립시키기 위해 만든 용어였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기득권으로 살아가지 않았고, 또 일부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오늘날까지 사회운동을 이어가는 운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들도 있습니다. 2024년, <뉴스민>은 매달 198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운동가들의 삶과 더 나은 공동체를 바라는 운동가의 고민을 듣기로 했습니다.
박성미는 ‘파워 E(외향형)’다. 아마 그를 아는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는 7년간 대구 시민공익활동지원센터(공익센터)에서 일하며 활동을 시작하는 개인과 도움이 필요한 단체를 만났다. 기관은 공공의 성격을 띠었지만, 그의 일은 ‘활동가’에 가까웠다.
공익센터는 사단법인 대구시민재단이 2016년부터 대구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 중인 중간지원 조직이다. 대구시민재단은 이 외에도 ‘마을공동체만들기지원센터’, ‘공유대구 사업’ 등을 위탁받아 운영한다. 박성미는 ‘벌어서 남 주자’는 대구시민재단의 가치와 가깝게 일했다. 공익센터 출범부터 함께 해 매니저, 선임매니저, 팀장까지 점점 많은 책임을 맡았다. 그러다 번아웃이 왔다. 작년 12월 모든 일을 그만뒀다.
활동가의 삶과 쉼, 박성미가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부분이기에 그의 번아웃은 모순이기도 하다. ‘활동가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선배 세대와 ‘우리도 노동자’라는 후배 세대의 간극은 한동안 업계의 주요 화두였다. 그 사이에서 조율점을 찾아내고 ‘시간도 돈도 사람도 없어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다. 박성미는 “그 과정에 나를 돌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일을 그만둔 그를 찾은 건 ‘잘 쉬고 있는지’ 궁금해서 였다. 잘 쉬는 법을 배우고 싶기도 했다. 23일 오후 대구 남구 대명동의 한 카페에서 박성미를 만났다. 공익활동을 하는 시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과 접점을 넓혀 온 이야기부터 대구지역 활동가 생태계에 대한 평가까지 폭넓게 물었다. 그는 대체로 망설임 없이 척척 답을 꺼냈다.
파워 외향형의 학창시절, 참견하고 기획한 시간
박성미(37)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부산에서 대구로 이사를 왔다. ‘학창시절 전학을 가면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같은 뻔한 전개는 그의 사전에 없었다. 부산 사투리를 신기해하는 반 친구들과 ‘사투리 고치기’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매사에 참견하고 관심 많은 학생이었다.
“10대 성미는 지금보다 더 에너지가 넘쳤어요. 오락부장을 도맡아 하고, 복도에선 모르는 친구에게 말을 걸었죠. 그때부터 기획을 했던 것 같아요. 공부 대신 1년 단위로 어떤 기획사업을 할지 고민했죠. 스승의날, 만우절 같은 날을 성대하게 치렀어요. 학교 밖에선 관심 있는 이슈로 집회가 열리면 무작정 참석하기도 했고요. 이과반이었는데 손해를 보면서까지 문과로 교차 지원해서 대학에 갔어요.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중학교 때 뉴스에서 접한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 전환점이었다. ‘나랑 동갑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지’하는 의문에 집회를 나갔다. 부모님도 ‘집회를 나가는 건 좋지만 제일 앞에 나가진 말아라’ 정도의 조언을 할 뿐 딱히 말리진 않았다. 연예가중계보다 신문 사회면에 더 눈길이 갔다. 대학 진학에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한 이유였다.
대학에 가서도 공부보단 다른 것들에 더 열심이었다. 학과 시험은 대부분 에세이 형태였는데, 굳이 공부를 하지 않아도 성적이 잘 나왔다. 대신 연극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다. 배우보다는 기획, 연출에 흥미가 있었다. 배우들이 연기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학교 근처 음식점, 술집에서 후원을 받거나 홍보 포스터를 붙이고 티켓을 판매하는 활동이 재미있었다. 돌이켜보면 하나의 공동 프로젝트를 어떻게 잘 꾸려서 갈 수 있을지 배웠던 시기였다.
학교 밖으로는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성소수자 모임 같은 연대체 활동을 했다. 소속을 두고 활동한 건 아니었다. 마음 가는 곳에 프로젝트 형태로, 헤쳐 모이는 게 좋았다. 취업할 때가 되어선 교수님과의 상담에서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전환할 때 첫 직장이 중요하다. 시민단체는 언제든 들어갈 수 있다”며 교수님은 취업준비생 박성미를 말렸다.
“20대, 지금의 내 결심도 중요하다”고 호기롭게 반박했지만 막상 첫 취업은 무역 회사에 했다. 남들과 똑같이 스펙을 쌓고 면접을 봐서 입사한 회사에서 일하며 박성미는 고통스러웠다.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변 활동가들에 ‘자리가 나면 알려달라’고 말했다. 시민단체가 채용공고를 올리지 않고 알음알음 사람을 뽑던 시기였다.
“대구여성환경연대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회사를 때려치우고 바로 이직했죠. 2~3년 일했는데 단체가 없어졌어요. 열심히 일했던 시간이 송두리째 없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속상했죠. 이후에 친구들과 동네 카페를 만들어 운영하고, 판촉물 알바도 하다가 공익센터 설립과 함께 1기 멤버로 입사하게 됐어요.”
대구 시민공익활동지원센터와 함께 성장한 시간
“당시 대구환경운동연합에서 오래 일하셨던 공정옥 선생님(현 공익센터 센터장)과 첫 미팅을 했을 때가 기억나요. 엄청 긴장했었거든요. 판촉물을 돌리다 왔다고 저를 소개하는데, 옆에서 우장한 팀장님(현 경북시민재단 이사장)은 ‘온천에서 캐셔 하다 왔다’고 하더라고요. ‘이 조합 뭐지, 신선하다’라고 생각했어요”
2016년 공익센터가 설립돼 조직의 방향을 정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멤버로 합류했던 박성미는 2023년까지, 7년을 일했다. 센터의 시작부터 성장, 지금의 안정기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 한 셈이다.
“센터가 알려지기까지의 단계가 정말 힘들었어요. 예산도 적었지만 ‘공익활동’에 대한 의미 전달이 잘 안됐죠. 제일 많이 받는 전화가 ‘공익활동이 뭐예요? 저도 할 수 있나요?’ 였어요. 공익 근무하는 분의 민원 전화도 왔죠. ‘병무청으로 하세요’라고 다시 안내하곤 했어요. 자리 잡는 시간도 꽤 걸렸어요. 발품 팔고 사람을 만나고 술도 많이 마셨어요. 처음엔 시민사회단체 마당발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이들에게 ‘술자리마다 불러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죠. 결국 네트워크로 해야 하는 사업들이거든요.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공익센터의 사업 영역은 크게 ‘공익활동 단체 지원’과 ‘시민 역량 강화’ 둘로 나뉜다. 공익센터 출범 초기엔 시민사회 영역의 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의 교육 수요가 많았다. 활동가들 중심으로 워킹그룹을 만들어 필요한 교육을 기획하고 개설했는데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니 단체마다 직접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내용으로 강의를 개설했다. 센터는 그에 맞춰 직접 기획하고 듣는 과정의 비용을 지원하는 형태로 공모사업 방향을 바꿨다.
“2016년쯤 봤던 활동가 절반 이상이 지금은 그만둔 것 같아요. 새로 유입되는 활동가는 적고요. 연대체도 축소됐어요.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엔 함께 워크숍을 가거나 기획회의를 여는 등 협업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어요. 하지만 단체 상근자 수가 줄어들고 연대해서 하는 활동 자체가 적어지는 등 생태계 자체가 변화한 부분도 있죠.”
코로나19 여파도 컸다. 시민 역량 강화를 단계별로 지원하는 공모사업의 중간이 뚝 끊겼다. 대면 활동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축적되던 역량들이 다시 움츠러들었다. 줌, 유튜브 등을 통해 비대면 활동으로 전환해 이어갔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해요. 공익센터를 그만둔 건 40살이 되기 전에 갭이어(gap year)를 보내고 싶다는 개인적 바람 때문이에요. 위탁기관은 2년이나 3년 단위로 시와 계약을 하기 때문에 기관 근무자들도 계약기간이 동일하게 정해지거든요. 거기에 맞추다 보니 40살보다는 좀 일찍 그만두게 됐죠. 작년에는 건강도 안 좋았어요. 연차를 병원 다니면서 다 소진할 정도였거든요.”
7년의 근무기간 동안 가장 뿌듯했던 경험으로 남은 건 ‘활동가도 노동자다’라는 프로젝트이다. 활동가 직업군의 처우와 노동, 인사 등에 대해 당사자 인터뷰를 진행하고 전문가 자문을 더해 인터뷰집을 제작했다. 자가 체크리스트도 더했다. 공익센터 출범 초기였던 당시는 세대 갈등이 주요 화두이기도 했다.
“모두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가야지, 세대 갈등으로 퉁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당연히 열악한 환경을 고려해야죠. 하지만 탄력근무제나 임금이 아닌 다른 보상을 얼마든지 고민할 수 있잖아요. 바뀐 시대에 맞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한 거죠. 예전에는 급여가 적었고 희생과 집중, 몰입과 헌신이 요구됐지만 이젠 개개인의 효능감이 떨어지는 상황인 만큼 다른 보상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저 스스로도 작업이 재밌었고, 책자도 전국적으로 인기가 많았던 걸로 기억해요.”
대구시민재단이 지역에 필요한 이유
박성미는 일을 그만두고서 70여 개의 단체 카카오톡방을 나왔다. 처음에는 방마다 다른 인사말을 남겼지만 나중에는 같은 인사말을 복사, 붙여넣기 했다. ‘이래서 피곤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워 외향형이라고 지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신을 돌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일하면서 만난 사람 중 진짜 친구가 된 사람도 많아요. 일하는 것 자체가 좋기도 했어요. 한편으론 제가 에너지가 많아도 낯을 가리거든요. 소진되는지 모르고 그냥 계속 일했던 것 같아요. 제가 해내니까 조직도 계속 저를 밖으로 내보낸 거죠. 일을 그만두고 두 가지가 바뀌었거든요. 첫 번째론 잠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전에는 머리만 대면 자니까 제가 그냥 잘 자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냥 계속 피곤한 상태였던 거죠. 또 하나는 커피를 마시니까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잠을 못 자는 거예요. 일을 한참 할 때는 하루 3잔씩 먹었거든요. 혼자서 마시고 미팅 나가서도 마시고. 일을 그만두고 이렇게 나를 좀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마냥 쉬는 건 아니다. 공익센터의 모법인인 대구시민재단의 15주년 행사를 돕고 있다. 위탁기관은 대구시 보조금으로 운영되지만 모법인은 자체 수익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대구시민재단은 운영에 어려움을 겪으며 오는 10월 후원행사를 준비 중이다.
“위탁기관은 조례에 기반해 운영돼요. ‘마을 공동체를 지원한다’, ‘시민공익활동을 지원한다’ 등 텍스트로 존재하는 내용을 어떻게 사업으로 풀어낼 지가 중요한 거고요. 조직 구성원들이 어떤 마음가짐인지, 성과를 내는 과정에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토론하면서 만들어 가야 하는데, 여기에 모법인의 비전이나 가치가 중요하게 작용해요. 재위탁 과정에서 ‘대구시민재단이 아닌 다른 법인이 위탁을 받게 되면 내가 계속 공익센터에서 일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한 적 있는데 ‘그만둘 것 같다’는 답을 내렸죠.”
대구시민재단의 위기는 오래된 과제다. 활동도, 상근자 수도 많이 위축돼 있다. 목적 기금을 마련해 운영하던 자체 후원 사업이나 청년활동가 지원 프로그램 등도 현재는 운영을 중단했다. 민간의 중간지원조직을 표방하는 만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비영리 영역이 침체기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대구시민재단이 ‘대구시민센터’이던 시절, 마을공동체나 공익 활동 지원 사업들을 꾸준히 해 왔어요. 그 경험들이 축적돼서 대구시로부터 위탁기관도 받은 거고요. 마을공동체만들기지원센터, 공익센터로 기존의 지원 영역을 넘겼다면 그 다음을 구상해야 하는 게 지금의 대구시민재단이 맞닥뜨린 과제라고 봐요. 시대의 흐름에 맞춰서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고 구축해야 하는 거죠. 연구나 비영리 업계 트렌드 분석일 수도 있고, 기금조성을 통한 직접 지원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근본적으론 새로운 의제와 사람을 계속 발굴해야 하고요.”
“활동가의 삶과 쉼, 계속 고민할 것”
21세기의 활동가에게 필요한 역량을 물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힘이요.” 박성미는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또래, 혹은 저보다 어린 활동가들을 만나면 하나하나 업무에 대한 확신은 있더라도 직업 자체에 대한 확신은 없는 경우가 많아요. 이건 길게 활동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해요. 자부심은 단체가 만들어 줄 수도 있고, 동료들과 함께 만들어 갈 수도 있겠죠. 어쨌든 그걸 갖고 있는 게 중요해요.”
돌이켜보면 박성미의 일에는 조직과 동료들의 독려가 있었다. 처음 대구여성환경연대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마음대로 해 봐라’라며 묵묵히 밀어준 선배 활동가들이 있었다. 덕분에 실패를 반복해도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공익센터에서 일을 배울 때도 가끔 책상 위에 책을 던져 준 선배, 동료 활동가들을 만나는 자리마다 데려가 준 선배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때 얻은 힘은 지금까지 활동가의 건강권, 삶과 쉼에 관심을 갖고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이유가 된다.
“몇 년 전 엔구소(NPO 연구소) 협동조합을 만들었어요. 또래 활동가들하고 재미난 걸 하려고 만든 모임인데 다시 활성화를 해보려고 준비 중이에요. ‘신입활동가에게 도움이 되는 키워드 100’, ‘대구 공익활동 공간 지도’ 같은 걸 했었죠. 지금은 활동가의 건강권 관련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에요.”
잘 쉬는 건 길게 가기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활동가들에게 전자기기와 상관없는 취미를 만드는 걸 추천해요. 뜨개질도 좋고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죠. 더 이상 급한 연락을 확인할 필요가 없어서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해두고 있어요. 아마 많은 분이 부러워하시지 않을까요. 잘 쉬는 시간도 길게 가기 위해선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김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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