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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억의 구더기 떼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 알할랄랄라이 / 랄랄랄하이하이 / 알할랄랄라이” 정화진의 첫 시집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민음사,1990) 맨 앞에 실려 있는 「춤」의 전문이다. 수수께끼 같은 마지막 세 줄은 시베리아 샤먼의 노래(주문)에서 빌린 것이다. 이 시는 시인의 대표작은 아니지만, 첫 시집을 이해하는 주춧돌이자 시인의 앞날을 가리키고 있는 이정표다.
신화학자들은 태곳적에 여신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많던 여신들은 어느 때부터 권위를 잃기 시작했다. 많은 학자들이 그 원인으로 외부 침략설, 사적 소유권의 등장, 고대 국가의 형성, 잉여 가치의 발생 등을 제시했는데, 레너드 쉴레인은 문자 발명이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문자의 발명은 인간과 세계가 맺고 있는 구체적이고 감응적인 관계를 추상화·개념화시켰다. 문자 문화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와 같은 일신교를 만들었는데, 이 종교는 모두 가부장제의 대표적인 본보기다. 문자는 여신을 몰아내고 가부장제의 토대를 놓았다.
‘샤먼’이라는 용어는 시베리아의 숲속에서 사냥과 유목으로 살아가는 에벤크족(=퉁구스족)의 말이다. 샤먼은 천상계와 지하계를 넘나들며 혼령과 소통한다. 샤머니즘은 애초에 시베리아와 몽골의 종교를 일컬을 때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알래스카 등 모든 지역의 전통 종교를 포괄한다. 한국의 무교는 몽골의 그것에 직접 연결되는데, 대체로 여성을 지칭하는 무당은 몽골어 ‘udagan’, 남성을 지칭하는 박수는 몽골어 ‘böge’에서 유래했다. 모든 샤먼이 여성은 아니지만, 샤머니즘은 여성 중심의 주변 문화라는 것이 전 세계에서 관찰되고 있다. 여신이 문자에 의해 힘을 잃었듯이, 자체적인 교리 체계는 있지만 문자화된 경전은 갖지 못한 샤먼(샤머니즘) 역시 여신과 같은 지위 상실을 겪었다.
이 시집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인물은 어린 여자아이다. 그 아이는 늘 “미열”(「맨드라미 속이」)로 이불 속에 누워 있는 “희고 창백한 아이”(「물무늬」), 신열로 “안방에서 앓는 아이”(「나의 방은 익모초 즙이 담긴 사발이다」)이다. 정확한 병명은 “폐렴”(「징거미 더듬이」)이고, “말라리아”(「칼이 확대된다」)도 앓았다. 그런 아이는 밤마다 “아득한 벼랑 아래로”(「푸른 모기장」) 굴러떨어지는 악몽을 꾸고, 죽음을 생각한다. “누군가 내 잠 안으로 주인 없는 수레를 들여보낼 때도 있다. / 비어 있는 듯한 수레 안 거적을 들추어 보면 늘 / 마른 나뭇가지 같은 사마귀의 시체들로 가득하고 / 나는 그 위에 실을 것이 없다”(「잠」)
할머니는 여자아이 다음으로 많이 나오고, 그 다음으로는 할아버지가 자주 나온다. 허약하고 병든 아이를 위해 “자라의 목”(「남쪽 마당」)을 자르고, “익모초”(「나의 방은 익모초 즙이 담긴 사발이다」)를 달이고, “분주히 약사발”(「녹슨 부엌」)을 나르는 사람은 할머니다.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도포”(「반짇고리」)가 되어 벽에 걸려 있다. 약과 음식을 챙기는 할머니는 부엌과 불을 담당하는 조왕신(竈王神)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매일 같이 장독대에 “정한수 사발”(「납 비녀」)을 바치던 할머니는 어느 날 직접 몹쓸 병마와 싸우는 샤먼이 된다. “할머니가 아이를 위해 마당을 깨끗이 쓸고 난 후 / 마당 한가운데 땅을 긁어 십자표를 긋는다 노란 흙이 날린다 / 맞물린 십자 표식 위에 정확하게 칼을 꽂아 바가지를 덮어씌우는 할머니 / 말라리아의 가슴을 찍어 가르려 한다”(「칼이 확대된다」)
1980년대 초부터 한국 시단에는 여성시의 새로운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그중에서도 “알할랄랄라이 / 랄랄랄하이하이 / 알할랄랄라이”만큼 놀라운 게 있었을까. 시인은 여성시의 형식적 쇄신도, 여성의 성적 자율권도, 여성 권리 선언도 아닌 샤먼의 복권을 들고나왔다. 오늘날 남신(The God)과 구분되는 여성 신을 여신(The Goddess)이라고 하는데, 여신의 이미지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여러 샤머니즘 종교에서는 여신을 ‘할머니(Grandmother)’라고 부른다. 실제로 우리나라 무교의 최고신도 마고(麻姑)할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