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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면회실 스피커폰으로 김민수(가명, 42)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형이 확정되었지만, 김민수의 표정은 한결 여유로웠다. 그는 확정 판결 이후에도 면회와 편지를 잔뜩 받고 있으며, 이례적으로 수형자 등급이 정해지기 전인데도 징역살이가 비교적 수월한 관용부 면접을 봐 주변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고 했다.
“실형이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오로지 가족 때문입니다. 저와 제 동생은 부모 돌봄을 못 받고 살았는데, 그게 자식에게 대물림됐다는 생각에 자꾸 미안합니다. 아이들은 괜찮다고 얘기했다고요. 당연히 그렇게 말하겠죠. 저도 어릴 때 괜찮다고 말했으니까요. 그런데 가슴에서는 그게 아니에요.···제가 처음 인터뷰할 때, 당시 행동을 후회한다고 했었죠. 그건 자식에 대한 미안함이자, 이 결과에 대한 미안함이었어요. 외국인을 보호하려 했다는 것 자체는 후회하지 않아요. 똑같은 사람이잖아요. 우리 사회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통근 버스 기사 김민수 사연에 사람들이 공감한 이유는 아마 그가 한국인이기에 좀 더 수월하게 그의 입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의 감각을 빌려, 그와 이주노동자의 아픔을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형 선고 이후 두 달이 지난 오늘, 이전에 쓴 기사와 기사에 담지 않은 면회 기록을 되짚어 본 이유는, 이주노동자의 고통을 제 고통처럼 여긴 그 감각이 새삼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감각은 김민수가 오랜 세월 이주노동자와 일상을 공유한 데서 기인한 듯 하다.
우리 사회의 ‘무감각’은 여전히 힘이 세다. 지난 20일, 경주 한 공장에서 일하다가 출입국에 잡혀 추방된 태국 출신 이주노동자는 강제추방 후 태국 병원에서 유산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제조업 공장을 전전한 삶에 지쳐, 이제는 남편, 아이와 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차였다. 그 결심이 무색하게도 별안간 아이도 잃고 태국으로 쫓겨나 수술을 기다리는 그의 심정을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관련 기사=임신 중인 미등록 이주여성 강제단속 중 부상까지(‘24.6.27.))
경북 칠곡 한 전봇대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던 1998년생 네팔 이주노동자의 아픔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는 26일 콘크리트 흄관 제조 작업 중 낙하한 거푸집 덮개에 맞아 죽었다. 그의 나이 26세. 고인 지원에 나선 대경이주연대회의에서는 당시 작업자 안전을 확보하지 않은 채 서두르다 일어난 산재 사망 사고로 파악하고 있다. (관련 기사=또 산재 참사···칠곡 공장서 이주노동자 1명 낙하물에 맞아 사망(‘24.6.28.))
경기 화성시 아리셀 공장 참사에서는 이주노동자 18명을 포함한 노동자 23명이 사망했다. 이주노동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공장에 불법파견돼 일했으며, 유의미한 안전 교육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리셀은 지난 5년간 정부 산업안전감독이나 점검을 한 차례도 받지 않았고 한다. 이주노동자들은 내부구조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위험한 공장에 내던져졌다. 고인들의 삶의 궤적은 다채롭게 흘러왔을 것이나 한국이라는 지옥도에 모여서는 비극적인 참사로 끝을 맺었다.
동료 기자의 배우자가 희생됐다며, 참사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의 이야기였다는 걸 몰랐다는 절절한 호소를 봤다. 그 글을 쓴 <충북인뉴스> 기자는 절망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나서자고 한다. 나는 그 시작이 아리셀 공장 참사 이후에도 곳곳에서 지금도 이어지는 산재 참사와, 참사에 희생 당한 사람의 삶을 꾸준히 감각하려 하는 것부터라고 생각한다. 7월부터 고민을 공유하는 이들과 이주민 권리 공부 모임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주민의 피와 눈물을 양분 삼아 굴러가는 세상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감각을 넓혀가야겠다고 되뇐다.
nahollow@newsmin.co.kr
박중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