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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폭력의 시대와 기억, 우리 곁의 ’제노사이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독립예술영화 근작 중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 이후 역대 최고의 ‘홀로코스트’ 영화로 손꼽히는 중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단 한 명의 유대인도 직접 죽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내내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으로 장기 재임했던 루돌프 회스 중령과 그의 가족이 생활하는 근사한 전원주택과 수용소 인근 겉보기엔 목가적인 자연만 조명될 뿐이다. 하지만 회스 가족이 수영과 카누, 낚시를 즐기는 동네 천변 바닥에는 수용소에서 흘러나온 인골이 뒹굴고, 아무리 벽을 높이 세우고 꽃과 나무로 가려도 단말마의 비명은 떠나지 않는다. 책으론 결코 느낄 수 없는 시청각 효과, 특히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온전히 체감할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해당 영화의 막판에 등장하는 지금 현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제는 전시공간이 된 그곳에서 감독이 실제 풍경을 비추는 장면은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다. 물론 해당 장면 역시 절대 전형성과는 거리가 멀다. ‘킬링 필드’의 대표 이미지, 밀림에 감춰진 어마어마한 유골의 무더기 같은 건 끝까지 인연이 없는 대신, 아이들이 신었을 신발과 노인들이 의지했던 지팡이 같은 것들이 가득 채워진 방이 등장한다. 가스실로 끌려간 이들의 마지막 유품인 셈이다. 그리고 특색이라곤 없는 회색 벽, 그곳에 푹 파인 자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지하는 순간 한 세기 전이라는 시차는 순식간에 가공할 국가폭력 전율 앞에서 무력화되고 만다.
국가폭력은 자신들의 반인륜적인 가공할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학살을 저지른 뒤에도 철두철미하다.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도의 기계적 합리성으로 대학살을 저지른 나치독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떠올리는 홀로코스트의 이미지는 실제와는 조금 차이가 난다. 뼈가 훤히 드러나는 유대인 수용자들의 이미지는 그나마 생존 가능성이 아주 조금 더 많던, ‘강제노동 수용소’의 풍경이다. 애초 노동력 착취 대상으로 부적격 판정을 받은 노약자와 여성들은 곧바로 ‘절멸 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 행이었고, 그런 수용소들은 아우슈비츠를 제외하면 철저하게 감춰져 있었다. 그래서 그곳의 자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20세기는 유독 국가폭력에 의한 ‘제노사이드’가 넘쳐났던 시대다. 나치독일의 전대미문 학살극은 다행히 그들이 패망한 덕분에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지만, 그와 유사한 무수한 사건들은 여전히 진실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승리한 권력’과 그 후예들이 여전히 강력한 기득권 세력으로 남아있거나, 어느 정도 민주화가 진전되었더라도 내전을 막기 위해 ‘침묵 협약’으로 타협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인민재판’ 등 소위 좌파의 ‘적색 테러’를 양민학살과 국가폭력 사례로 주입하지만, 실제로 늘 권력의 중심에 있던 보수우파의 ‘백색 테러’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해 왔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 주류를 차지한 그들은 과거의 만행을 공식적으로 끄집어내는 걸 극도로 터부시하며 사사건건 방해해 왔다. 왜 반세기도 넘게 지난 사건들을 한사코 덮으려 하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 당시 이념대립과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조직적으로 자행된 무수한 범죄와 수탈은 현재 기득권 세력의 든든한 기반이 되어줬기 때문이다. 과거는 그렇게 현실을 지배한다.
◆ 우리 곁의 또 다른 홀로코스트, 보도연맹 학살의 은폐된 역사
‘천만 영화’ 대열에 올라 있는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한국전쟁 참전 영웅이던 ‘진태’(장동건)는 약혼녀 ‘영신’이 ‘빨갱이’라는 이유로 반공청년단에게 끌려가 총살당하는 등 수난을 겪고 인민군으로 전향해 동생 ‘진석’(원빈)과 대립하게 된다. 그런데 ‘영신’은 딱히 공산당 활동을 한 게 아니라 그저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에 보리쌀 한 됫박 준다길래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것뿐이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그 명단은 ‘보도연맹’ 소속원을 기록하는 목록이었다. 그 명단에는 무려 33만 명이 가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는 한국전쟁 초반 극도의 혼란기 몇 달 동안 대량학살을 당했다. 총포가 날아다니는 전선이 아니라 후방에서 더 많은 인명이 사라져간 셈이다.
그런데 막상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영신’ 사례처럼 실제론 좌익과 무관한 이들이 허다했고, 정작 그 좌익 전력이란 것 역시 열성적 가담자가 아니라 그저 일가친척 중 누가 가입해서 연좌제 형식에 가까웠다. 가족 중 한 명만 좌익활동자라면 실적을 채우기 위해 온 식구가 다 보도연맹 가입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시골에선 숫자를 채우기 위해 공무원들이 곡식이나 고무신을 주면서 서명을 회유했고, 문맹자가 가득하던 당시엔 당장 살림에 보탬이 될 얼마 안 되는 물자에 혹해 보도연맹에 등록하는 경우가 무수했다. 그런데 전쟁이 터졌고, 일방적으로 전선이 밀리면서 적군에 가담할 일말의 여지를 이유로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불과 3개월 정도 동안 보도연맹에 명단이 올라간 이들 대다수가 전국 곳곳에서 살해되었다.
여기에서 당연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수십만 명이 전국 곳곳에서 집단으로 처형되었다면, 그들의 집단매장지가 허다할 테고, 그들을 죽이는데 실행한 인원도 만만찮은 숫자였을 테다. 죽임을 당한 숫자가 워낙 많으니 그런 희생자들과 한 다리 건너면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 텐데 우리는 그런 참혹한 과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전쟁 발발 초창기 가장 격렬한 싸움터였던 대구와 경북지역이 의외일 수 없는데, 현대 한국의 국가폭력 중에도 규모로는 가장 거대한 학살이던 보도연맹 관련 흔적은 왜 이렇게 찾아보기 힘든 것일까?
사실 우리 주변에서 보도연맹 관련 흔적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유적지 중 손에 꼽히는 증거로 알려진 곳이 대구 옆 경산에 소재한다. 바로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현장(경산시 평산동 652)이다. 미디어를 조금만 검색해 보면 이곳 관련 기사나 방송영상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과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괴담‘ 형태로 콘텐츠화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정작 사건의 배경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영상자료는 뉴스릴 외엔 의외로 드물다. 그런 가운데 다큐멘터리 창작집단 ’다큐창작소‘가 2019년에 제작한 19분여 단편 다큐멘터리 <수십년간 숨겨야 했던 진실! 삼천오백명이 학살된 경산코발트광산>은 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가장 수월하게 비극에 대해 간추린 작업으로 유용하게 활용되는 중이다.
◆ 무거운 내용을 리듬 넘치게 풀어내는 출중한 감각
해당 작업은 우리가 요즘 접하게 되는 독립영화 유형과는 사뭇 다른 형태를 지닌다. 일반 관객보다는 영화 관련 관계자나 이런 영화에 익숙한 ’영화마니아‘ 대상으로 작가적 태도를 선보이는데 이 영상물은 별로 흥미가 없다. 영화제에 출품하는 정해진 공식을 따르는 대신에, 이 영상물의 쓰임새에 오로지 집중하려는 태도다. 길지 않은 분량은 현실적인 제작 여건과 함께 다큐멘터리 관람에 익숙하지 않지만, 해당 소재에 관심을 가질법한 이들을 관객으로 설정하고 고심한 결과일 테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 교육목적에 충실한 만큼, 수업시간과 휴식시간 안배의 호흡을 참고해 구상한 기획 성격이 농후하다.
이런 부류의 짧은 기록영상들이 대개 취하는 전형적 구성방식을 본 작업 역시 따른다. 경산코발트광산 희생자 유족들의 증언과 배경이 되는 학살사건 유적지의 현황 및 기록사진과 자료들이 교대로 등장하는 구조다. 그런 전형성에서 오는 반복은 필연적으로 지루함을 수반한다. 그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제작진은 유튜브로 대표되는 온라인 ’쇼츠‘의 패턴을 참조한 기색이 역력하다. 크게 4부작 구성을 통해 백과사전 형태의 구조를 취하는 영상은 20분이 넘지 않는 영상을 전개에 따라 나누고, 강조하고 싶은 키워드를 마치 칠판에 필기하듯 화면 가득히 해설로 채운다. 그 리듬감이 준수한 편집으로 연속되기 때문에 내용 자체에 관심만 있다면 늘어질 여지가 거의 없는 호흡을 선보인다.
이야기는 시간 연대 순서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 만약에 이 광산이 없었으면 삼천오백명을 어디서 학살했겠노
초심자라도 접근이 수월하도록, 처음 단락에선 개괄적으로 보도연맹 사건이 무엇인지 정의한다. 한국전쟁이 1945년 해방 직후부터 현재의 남북한 교착과 대립상황이 굳어지는 1953년 휴전까지 ’해방 8년사‘의 귀결이라는 관점과 함께 ’미완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시각을 녹여낸 성격이 확연히 드러난다.
단락 안에서 또다시 소제목처럼 몇 개의 머리말이 화면을 메운다. 6하 원칙에 입각한 것처럼 차례로 경산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이 연속된다. 우선 장소의 특징이다. 학살의 현장인 ’보국광산‘은 이름에서 느껴지듯 일제강점기 시절 군수용 자원을 채굴하던 광산이다. 처음엔 금과 은을, 이후 전략물자이던 코발트를 채굴하던 광산의 구조상 대량학살과 시신 은폐에 최적지였다는 설명이다.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일본 제국주의는 패망 이후에도 한반도 역사에 악의를 가득 드리운 셈이다. 뒤를 이어 ’보도연맹‘에 대해 소개한다. 그 규모가 ’삼십만명‘에 달했다는 것, 어떻게 짧은 시기에 그렇게 ’빨갱이‘를 솎아낼 수 있었는지 그 기막힌 실상이 이어진다. 그리고 보도연맹의 뜻이 보호하고 선도한다는 것 또한 이미 그 결말을 아는 이들에겐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올 테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딱 삼개월‘ 동안, 즉 초반에 일방적으로 낙동강 전선으로 밀려나면서 패닉에 빠졌던 시기에서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에 나선 후 점령지에 남았던 양민에게 분풀이를 저질렀던 짧은 기간에 거의 모든 학살이 벌어졌다는 것과 함께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한 인원이 방대했던 이유를 설명하고자 흔히 10월 항쟁으로 표기되는 1946년 ’대구 10.1‘을 소환한다. 추정이지만 이런 편집과 표현 방법론은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시도에서 신기원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는 <주전장>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은 흔적일 것이다.
◆ 물리적 학살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된 국가폭력의 그림자
# 애비 없는 빨갱이 자식이랑 놀지 마라
이제 본격적으로 경산코발트광산으로 끌려간 3,500명으로 추산되는 보도연맹 참가자들의 학살이 묘사된다. 유가족들은 지금도 생생하게 어릴 적 어렴풋이 체험했던 그 순간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은 그 어떤 공포 괴담도 아득히 뛰어넘는 현세의 지옥도다. 좀 더 투박하고 즉흥적인 구석은 있지만, 나치독일의 홀로코스트 절멸 작전과 통하는 지점이 농후하다. 그저 광기에 휩싸여 마구 죽이는 참상에 더 인간혐오를 가미하는 건, 이해관계에 따라 벌어지는 부정부패다. 소를 바치거나 뇌물을 건네면 명단에서 빼주거나 숨기고, 돈을 내지 않으면 끌려간 뒤 소식이 없는 사례가 가득 펼쳐진다. 살기 위해 발악하던 이들의 부질없는 시도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팔거나 모함하는 세태가 그야말로 인외마경으로 그려진다. 예전에 인도네시아의 공산당원과 화교 대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 시리즈가 전 세계 영화계에 화제가 된 바 있었지만, 그 영화 속에 그려진 정치깡패와 민병대들의 학살 재연과 거의 다를 바 없게 다가온다. ’야만의 시대‘는 그리 멀지 않다.
학살은 3개월 정도로 끝났지만, 이후에도 폭력과 학대는 계속 이어진다. 하기야 한국전쟁 시절엔 불심검문에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핑계를 대고 즉결처분이 공공연히 자행되곤 했으니 이미 ’빨갱이‘로 낙인찍힌 이들은 그야말로 마구 대해도 문제가 없다는 ’살인면허‘ 대상이었을 테다. 보도연맹 학살이 차츰 진화된 것도 늦게라도 참상을 깨달은 정부 차원의 결단이 아니라 전선에 투입할 병력도 모자란 가운데 후방에서 애꿎은 양민학살 일삼을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이것 또한 전쟁 말기의 나치독일과 별반 다르지 않은 면모다.
그렇게 목숨은 건졌나 싶었다지만 ’연좌제‘가 남았다. 원래 보도연맹 가입자 상당수가 근거 없이 기록되어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인데, 일가친척 중에 처형 및 실종된 자가 있다는 죄목으로 가족 역시 연좌 대상이 되었다. 보도연맹 가입자 다수가 젊은 남성이다 보니 아내도 같이 죽거나 과부가 되어 재혼한 뒤에 어린아이들만 남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그들은 경제적으로 불우한 환경에 더해 ’빨갱이 자식‘으로 시찰 대상에 올라 숱한 사회적 차별에 시달리는 삶을 이어갔다. 공직자가 되거나 외국에 일하러 갈 수도 없었다. 반면에 가해자 진영에 속한 이들은 이후로 지역사회에서 유지로 행세했을 테다. 그런 상황을 고려하면 지금도 이어지는 지역사회의 우경화 면모도 자연스럽게 해석되는 셈이다.
# 골짜기 골짜기가 ’뼈 산‘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4.19‘ 혁명이 일어났다. 민주화 분위기를 타고 10년 만에 유족들은 단체를 결성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해 ’5.16‘ 쿠데타가 터지고 겨우 세운 위령비는 파괴된다. 유족회 간부는 끌려가 고초를 겪고, 다시 보도연맹 학살은 금기어가 된다. 다시 진상조사와 명예회복 요구를 할 수 있게 된 건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 민주정부로 정권교체가 이뤄진 훗날이 되어서다. 2000년대 들어서야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보수정권이 복귀하면서 위원회 활동은 중단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경산코발트광산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3,500여 희생자 중 불과 500명 정도만 발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렵게 찾은 유해조차 석연치 않은 이유로 여전히 분류와 공개에서 배제된 상태다.
# 이제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노
21세기 들어 보도연맹이라는 희대의 국가폭력과 양민학살 사태가 여러 노력과 정보의 공유가 수월해지면서 과거와 비교하면 비약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유가족이 바라는 해결이 아니라 그저 흥밋거리 혹은 형식적인 언급에 그치는 현실을 한탄하는 증언이 이어진다. ’귀신체험‘ 명목 아래 장난삼아 드나드는 인파 때문에 연례행사처럼 부서지는 유적지 시설물, 조회 수와 후원에 혈안이 된 ’렉카‘ 유튜버들의 무분별한 괴담 유포가 유족들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벌리는 고통으로 다가온다. 왜 악성 댓글에 시달리는 연예인들이 자살하는지 이해하겠다며 쓰라린 표정을 짓는 희생자 유가족의 표정이 착잡하다.
◆ 잊혀진 국가폭력의 기억, 혹은 망각을 기다리는 자들의 그림자
단편 다큐멘터리의 대미를 장식하는 건 유가족들이 간절히 원하는 요구안 해설이다. 그들이 과거의 상처를 최소한으로 치유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선 너무 부족한 수준에 불과한 정도다. 진상조사와 추모 및 교육용 공간 마련, 유해 발굴과 미신고자 접수, 그리고 국가책임이니만큼 배상 및 보상 조치다. 이 정도 내용인데도 여전히 해결될 기미는 요원하다.
그나마 이제는 어쨌건 정부 차원의 추모행사는 연례적으로 진행되는 중이다. 이만하면 그래도 야만의 시대보다는 분명히 나아진 것 아닌가 하며 안심할 시청자에게 영화를 만든 이들은 마지막 비수를 던진다. 추모 행사에 모인 유족들은 행사 시작을 알리는 국민의례를 위해 일어선다. 태극기와 애국가의 엄숙한 풍경은 하지만 우리가 흔히 보던 그것과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에게 바로 그 가해자인 국가를 향해 충성을 바치라는 위압이 여전히 유족을 짓누르는 기괴한 그림이 화면 가득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치유와 화해를 위한 국가 차원의 사죄와 노력이 없다면 여전히 본질적인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는, 만든 이들의 확고부동한 관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어느새 한국전쟁 발발 기념일이 또다시 다가온다.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오물풍선과 확성기가 경쟁적으로 부활하는 가운데 올해 6월 25일 역시 경산코발트광산 희생자 유가족들에겐 잔인한 계절로 여겨질 테다. 조금만 찾아보면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서 지금도 수천 구의 원혼이 안식을 취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코발트광산 수직갱도에 다 채우지 못해 장소를 옮겨 현재 가창 댐 주변에서 벌어졌다는 8천 명으로 추산되는 또 다른 학살 희생자 유해가 대구와 경북 상수원으로 이용되는 중이란 사실은 그 어떤 호러 영화보다 아찔하게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과거의 학살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생생하게 떠돌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지역사회 권력구도 역시 여전히 그 시절의 가해자 vs 피해자 역학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가 보도연맹 학살을 기억해야 할 이유다.
※ 해당 단편 다큐멘터리는 유튜브 ’다큐창작소‘ 채널에서 상시 시청 가능하다.
<작품정보>
수십년간 숨겨야 했던 진실! 삼천오백명이 학살된 경산코발트광산
| 보도연맹 민간인학살
2019│한국│다큐멘터리│19분27초
연출/편집 최아람
촬영 최아람, 김철민
그림 신혜원
제작 다큐창작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