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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부터 건네져 오던 마이크가 권예지(13) 씨에게 다다랐다. 예지 씨는 웃으며 손에 쥔 마이크를 엄마 전선희(47) 씨에게 건넸다. 유일한 청소년 참가자의 수줍은 모습에 모두가 유쾌하게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4월 16일 오전 8시, 전선희, 권예지 모녀는 대구에서 경기도 안산으로 떠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모녀를 포함해 37명이 45인승 버스를 채웠다. 같은 날 오후 안산시 화랑유원지에서 열리는 ‘4.16 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대구4.16연대는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안산 기억식 참가팀’을 꾸렸다. 4.16연대에서 교통비와 식비 일부를 보탰다. 한유미 대구4.16연대 집행위원장은 “매년 4월 16일마다 안산 기억순례길을 기획해 시민을 모집했다, 대여섯 명이 갈 때, 25인승 버스를 빌려서 갈 때도 있었다. 올해 참가 인원이 가장 많다. 45인승 버스가 거의 꽉 찼다”고 말했다. 대구4.16연대 회원 뿐 아니라 전교조 조합원, 지역에서 노란리본을 만드는 노란리본공방 관계자, 진보정당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2003년 대구지하철에서 자녀를 잃은 유가족까지 다양한 시민들이 버스에 올랐다.
기억교실에 담긴 희생자들의 꿈과 이야기
월암초등학교 6학년 예지 씨는 안산 기억식에 참여하려 학교에 현장학습 신청서를 제출하고 엄마와 안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에 예지는 2살이었어요. 그땐 구미에 살고 있었는데, 뉴스를 보면서 발을 동동 굴렀죠. 뭐라도 하고 싶었는데 돌쟁이인 예지를 데리고 팽목항에 갈 엄두는 안 났어요.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도 기억이 나요. 그러다 4년 전쯤 대구에 왔고, 올해 초 달서구에서 ‘어른그림책 읽기’ 모임을 시작했어요. 거기서 만난 엄마들, 언니들 중 세월호 활동을 하는 분들이 있었죠. 같이 서명운동도 나가고, 오늘 예지와 안산에 갈 결심도 하게 됐어요” 엄마 전선희 씨가 설명했다.
‘함께 모임하는 언니’ 중 한 명인 지명희 대구여성광장 대표는 “동네에서 세월호 관련 활동을 10년 간 해왔는데, 올해는 더 특별해요. 지난 10년 간 이맘때 항상 안산을 찾은 동료도, 올해 처음 안산을 찾은 동료도 있기 때문”이라며 “10주기를 기리고 끝나는 날이 아니라, 앞으로 10년의 힘을 모으는 날이 되면 좋겠어요”라고 전했다.
안산에 도착한 직후 방문한 4.16민주시민교육원에서, 예지는 세월호 참사 직후 돌아오지 못하는 학생들의 흔적이 남은 단원고 교실을 그대로 보전한 기억교실에 들어섰다. 사고 후 2년여간 단원고에 그대로 유지되어 온 기억교실은 당시 2학년 학생들이 졸업한 2016학년도가 되면서 교실 부족을 이유로 이전 논의가 시작됐고, 장소 물색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이곳에 자리하게 됐다. 책상 위에는 학생들의 사진과 꽃, 꿈과 관련된 물품이 놓였다. “가수를 꿈꿨던 언니가 찍은 프로필 사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교실을 나온 예지 씨가 말했다.
김민지(25) 씨는 본인과 같은 이름의 세월호 희생자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었다. “항상 학교에 한두 명씩 이름이 같은 친구가 있었는데, 오늘 교실에서도 만났어요. 글 쓰는 걸 좋아했다는 정지아 친구도 마음이 쓰여요. 나중에 그 친구가 썼던 글을 모아서 낸 책이 자리에 놓여 있더라고요. ‘사월의 편지’라는 제목인데 돌아가서 읽어보려고 사진을 찍었어요”
민지 씨는 10주기를 맞아 개봉 한 세월호 다큐멘터리를 보고선 안산에 와야겠다 생각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민지 씨는 오후에 안산에서 합류했다. 친구가 대구416연대에서 안산기억식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전해온 게 계기가 됐다. 세월호 참사 당시 중학교 3학년, 희생된 학생들과 비슷한 나이대였다. 수학여행 시즌마다 친구들과 참사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성인이 되어서 10년 만에 찾아온 안산은 또 다른 무거움으로 다가왔다. 책상마다 놓여 있던 꿈과 관련된 물건들이 계속 눈에 밟혔다.
안산에서 민지 씨는 반가운 사람도 만났다. 대구에서 올라온 김동은 계명대 의대 교수다. 스승과 제자인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연차를 내고 온 김 교수는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시간을 냈습니다”고 말했다.
20여 년 전 대구지하철 참사로 딸을 잃은 윤근(77) 2.18안전문화재단 이사는 기억교실에서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윤 이사는 “대구지하철 참사도 세월호 참사만큼이나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많습니다. 세월호 참사부터 이태원 참사까지 여전히 국가는 책임지지 않고 피해자와 유가족의 시간은 느리게 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무력한 세월 속에서 함께 가는 이들이 있어 힘이 납니다”고 말했다.
대구와 2학년 3반의 인연, “지치지 말자”며 서로 위로한 10년
오후 3시, 화랑유원지 제3주차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억식’은 엄중하고도 북적였다. 세월호 유가족을 비롯해 이태원·스텔라데이지호 등 참사 유가족,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시민들이 참석했다. 강도형 해양수산부 장관과 이민근 안산시장이 참석해 추도사를 낭독했고, 윤석열 대통령, 한덕수 국무총리, 이주호 교육부장관은 참석하지 않았다.
1시간 30분가량 진행된 기억식은 참사 희생자 304명의 이름을 모두 호명하는 것으로 시작해 4,160인 시민합창단의 노래로 끝났다. 전국 곳곳에서 온 합창단원 700여 명이 무대에 오르고, 다른 시민 참가자는 영상으로 함께했다. 이다운(31) 씨는 “합창단의 노래와 주차장 밖 반대집회, 4시 16분에 울린 추모 사이렌 소리가 섞여서 마음이 복잡하더라고요. 여전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어요”라고 전했다.
안산에서 마지막 일정은 단원고 2학년 3반과 저녁식사 자리로 꾸려졌다. 승희 아빠 신현호 씨는 “대구416연대와의 인연도 벌써 10년입니다. 참사 직후 전국으로 서명운동을 다닐 때 대구를 선택한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어쩌면 형제보다도 끈끈한 관계가 됐습니다. 안산에서, 대구에서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함께 술잔을 기울여 주는 사람들”이라며 대구416연대에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박신호 대구416연대 상임대표는 “유가족과의 관계는 이웃, 친형제 이상입니다. 실제 더 자주 봐요. 2016년 만난 이래 꾸준히 서로를 도왔던 것 같아요. 아직 가야 할 길이 많기 때문에 지치지 말자고 말합니다”고 덧붙였다.
대구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전선희 씨는 딸 예지와 함께 안산을 찾은 이유를 설명했다. “잊지 않는 다음 세대가 있어야죠. 오늘 함께 왔지만 예지에게 많은 설명을 하진 않았어요. 엄마가 하는 말들이 잔소리 같을 것 같더라고요. 6학년이면 다른 것도 말하는 게 많은 나이잖아요. 다만 스며들듯, 보고 들으면서 느꼈으면 했어요. 대구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설문조사 종이에 적었더라고요. 함께 와서 즐거웠지만 언니, 오빠를 생각하면 슬프다고.”
김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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