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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의 첫 시집 『투명한 속』(문학과지성사, 1980)은 1980년도에 출간되었다. 이 시집은 해설자 김현이 잘 정리해 놓았듯이, 철ㆍ껌종이ㆍ활주로ㆍ아스팔트ㆍ알미늄ㆍ합성 세제ㆍ나사ㆍ철모ㆍ수통ㆍ치약 껍질ㆍ타이어 조각ㆍ기름ㆍ타이프라이터ㆍ핀ㆍ은종이ㆍ병마개ㆍ비닐ㆍ수은ㆍ유리 조각ㆍ망치ㆍ빈 병ㆍ포탄(지뢰ㆍ어뢰)ㆍ방독면ㆍ총기 등의 무기물과 인공물을 시작 소재로 삼고 있다. 이것들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가공ㆍ제작되었다가 소용을 잃고 버려진 생활 쓰레기나 산업 폐기물이다.
“이하석은 특이한 감성을 가진 시인이다.”라고 해설의 말문을 연 김현은 이렇게 말을 잇는다. “그 특이함은 대체로 두 가지 현상 때문에 얻어진 것인데, 하나는 그가 다른 시인들이 시적 제재로 별로 다루지 않는 광물질을 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가 서정 시인으로서는 희귀하게 자기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확인을 위해 세 편의 시에서 한 연씩 발췌해보자.
“방독면 부서져 활주로변 풀덤불 속에/ 누워 있다. 쥐들 그 속 들락거리고/ 개스처럼 이따금 먼지 덮인다, 완강한 철조망에 싸여/ 부서진 총기와 방독면은 부패되어 간다./ 풀뿌리가 그것들 더듬고 흙 속으로 당기며./ 타임지와 팔말 담배감과 은종이들은 바래어/ 바람에 날아가기도 하고, 철조망에 걸려/ 짖어지기도 한다, 구름처럼/ 우울한 얼굴을 한 채.”(「부서진 활주로」) “나사들은 차체에서 빠져나와 이리저리/ 떠돌다가 땅 속으로 기어든다, 희고/ 섬세한 나무 뿌리에도 깃들며. 나무들은/ 잔뿌리가 감싸는 나사들을 썩히며/ 부들부들 떤다. 타이어 조각들과/ 못들, 유리 부스러기와 페인트 껍질들도/ 더러 폐차장을 빠져나와 떠돌기도 하고/ 또는 흙속으로 숨어든다.”(「폐차장」) “모든 사람들 딴 길로 가고/ 잊혀진 철길. 녹슬은 쇠들 흙 속에/ 몸이 묻히며, 풀들의 뿌리에 얽힌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하다가/ 마침내는 흙을 끌어 당기며.”(「폐선로」)
기원전 약 250만 년 전의 석기시대에 시인이 있었다면, 그들의 가장 흔한 시적 소재는 맘모스 사냥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시의 소재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나라나 민족에 따라서는 물론, 심지어는 문학 사조에 따라서도 선호하는 소재가 다르다). 서정주ㆍ박목월 류가 시단의 주류였을 때 한국 현대시의 단골 소재는 정한(情恨)과 자연이었다. 시인이라면 어떤 소재로도 시를 쓸 수 있어야하고, 시는 소재를 가리지 않는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김수영이 제1차 소재혁명을 일으켰으나, 그의 사후에 만개한 민중시는 1980년대에 이르러 상투성과 동어반복을 면치 못했다(그럴 때에 박노해ㆍ백무산이 등장해 민중시의 지평을 다시 열었다).
시 소재의 변화는 인식의 확장과 현실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성찰에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신기함 이상의 주목거리가 되지만, 인식의 확장과 현실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성찰이 누락될 때는 소재주의에 떨어지게 된다. 여태껏 여러 시인이 문명비판을 시도했으나 산업사회의 실체를 마주했다기보다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의 제기에 머물고 말았던 것도 문명비판을 소재주의로만 이용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인간을 소외시키고 정한을 배격한 『투명한 속』은 무기물과 인공물을 전면적인 소재로 채택하여 산업사회의 비인간적인 풍경을 드러냈다. 시인이 방문하기 전까지, 활주로ㆍ 폐차장ㆍ폐선로는 어느 시인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장소였다.
이하석을 김춘수와 비교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하석은 김춘수의 반서정적 태도를 공유하지만, 존재의 이면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고심만은 물려받지 않았다. 반대로 이하석은 존재가 놓여진 상태 그대로를 드러내고자 한다.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는 행위가 자칫 인간중심주의(주관)를 강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즉물적 시각은 방법적으로 길러졌는데, 그러기 위해서 먼저, ‘시인은 시혼(詩魂)이 통과해나가는 샤먼’이라는 전통적인 시인관/시작관과 결별해야 했다. 시인은 첫 시집을 낼 무렵 카메라를 들고 시의 현장을 찾아 다녔으며 인화된 사진을 보며 시를 만들었다. 이제 시인은 노래하는 샤먼이 아니라, 시를 만드는 제작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