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저녁 6시 30분께 대구 북구청 2층 상황실. 백발의 노신사가 1시간여 열띤 강의를 마쳤다. 이어진 질의 응답 시간. 백발의 서양인 노부부, 위르그 바움베르거(Juerg Baumberger)와 에레오노레 바움베르거(Eleonore Baumberger)에게 청중은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스위스 사람들은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는가?”
가장 앞자리에 앉은 오세광 대구 서구의원이 물었다. 부인 에레오노레 씨가 조곤조곤 ‘행복한’ 스위스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사람들, 행복합니다. 이유를 보면 물론 부자죠. 육아, 교육, 건강 대부분의 영역에서 아주 좋은 기회를 가집니다. 실업도 거의 없는 상태죠. 지금 말씀드린 것들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이에요. 저는 물질적 풍요가 우리 국민에게 만족감을 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행복’과도 관련이 있을까요? 행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내가 직접 참여할 수 있고, 내 주장을 관철할 수 있는 정치 제도에서 비롯됩니다. 갈등하고,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물질적인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진 않습니다.”
우리에겐 흔히 복지국가, 살기 좋은 국가로 알려진 스위스의 ‘행복’이 복지도, 부(富)도 아닌 정치제도에서 비롯된다는 의외의 대답이었다. 안성호 대전대 교수(스위스 학교장)가 설명을 덧붙였다.
“스위스 사람 6천 명한테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60% 이상이 정치시스템 때문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답했어요. 물질적 풍요나 아름다운 환경이 아니라 정치. 우리는 정치 때문에 살 맛이 안 나는데, 스위스는 정치 때문에 살 맛이 난다는 거예요”
스위스는 아래에서부터 결정하고 실행하는 비중앙집권적 연방국가다. 대구 북구 정도 인구 규모의 ‘캔톤(Canton⋅주⋅州)’이 26개. 그 아래로 2,324개의 ‘게마인데(Gemeinde)’로 행정단위가 나뉜다. 게마인데는 우리나라의 읍⋅면⋅동 규모의 작은 행정단위이지만, 서울시보다 더 많은 권한과 책임을 행사한다.
23일 북구청에서 열린 10회 스위스학교 연사로 대구를 찾은 위르그 바움베르거 씨는 게마인데의 선출직 공무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다. 부인은 오랫동안 언론에 몸담았다.
“여기 오신 바움베르거 부부가 사는 시르나흐(Sirnach)가 인구 7,500명 정도 됩니다. 우리나라 읍⋅면⋅동 보다도 적습니다. 읍⋅면⋅동 수준이니까 천시하고 무시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서울시도 못 갖고 있는 엄청난 권한을 갖고 있는 겁니다”
안성호 교수가 꼽은 스위스 게마인데의 가장 큰 권한은 과세권이다. 게마인데는 주민으로부터 직접 세금을 걷고, 세금 사용처도 직접 결정한다. 2,324개 게마인데의 평균 재정자립도가 86%에 달한다. 우리나라 지자체 평균 재정자립도 50.6%(2015년, 안전행정부)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중요한 의사 결정은 주민 3~5% 정도가 참석하는 주민총회나 주민 총투표를 통해서 결정한다. 주민총회 참석률이 생각보다 높지 않지만, 주민들은 총회의 결정을 신뢰한다. 의문은 있다. 직접 참여하는 정치제도가 행복의 근거라는데 참여율은 왜 이렇게 떨어질까? 오히려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것은 아닐까?
“주민총회에서 다루는 사안은 주 정부나 국회에서 다루는 것보다 갈등 수준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참여하는 수가 적더라도 직접 물어야 한다. 참여하는 수가 적다고 직접 묻지 않으면 어디에 물을 수 있겠나. 그래서 비록 적은 수가 참여하지만 국화에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높은 수준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주민총회는 중요하다.” _위르그 바움베르거
오랜 시간 다져진 제도는 깊은 신뢰로 사회에 안착했다. 내 이웃과 가족이 직접 참여해 내린 결정에 주민 대부분은 수긍한다. 그렇다고 갈등이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갈등은 스위스 사람들에게 당연한 일이다.
“스위스 정치 과정에서 갈등은 굉장히 많고, 우리는 갈등에 이미 습관이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화합하고 조정하려는 각오가 되어 있다.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 다른 사람과 결론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손을 내밀고 조정해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뭐가 문제가 됩니까?”_에레오노레 바움베르거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직접 실행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힘이 든다. 오래된 중앙집권 체제,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온 지역 갈등의 역사 때문인지 화합을 강조하는 문화가 만연하다. 청중들은 연신 부러움의 감탄사를 뱉어내며 노부부를 바라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예정된 시간이 지나갔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위르그 씨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하나의 시스템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오래 걸리며, 멀고 먼 길이고, 엄청난 인내심을 요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많은 역량을 키워야만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간에, 몇 발자국 더 나아갔든 못 갔든 간에, 한국에서 지방분권의 길이 계속해서 나아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