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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년 음력 11월 중순,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 인사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특정 당파 내 사람들 중심의 인사가 이루어지면, 회전문 인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된다. 순조 즉위 이후 노론의 집권이 강화되면서, 노론이라는 한정된 인적 자원 내에서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국가의 병권을 갖는 자리인 만큼, 아무나 병조판서에 임명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전에 병조판서를 지냈던 한만유(韓晩裕)였다.
이러한 회전문 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노상추는 이번 인사에 대해 만족을 표했다. 노상추의 당색이 정조 사망 이후 노론 벽파의 권력 독점에 불만을 가졌던 영남 남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인사는 다른 당파에서 봐도 매우 적절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렇게 임명된 한만유는 오히려 제대로 공무를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병조 내에서 그의 명이 제대로 서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조직에 비해 영이 엄격해야 할 병조에서 최고 수장인 판서의 영이 서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이유가 있었다. 그가 3년 전 병조판서 자리에 있을 때 발생한 일 때문이었다.
한만유는 당시 조정에서 공정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노론 내에서 뿐만아니라, 영남 남인으로서 조정의 무관으로 근무했던 노상추가 보기에도 그랬다. 노상추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3년 전 병조판서로 재직할 당시, 영남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새롭게 출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한만유는 공정하게 정사를 처리하기 위해 인재 선발에서도 당색이나 출신지 등을 가리지 않았고, 이로 인해 능력 있는 영남 인재들이 많이 발탁되었기 때문이다. 무과 성적과 그 사람에 대한 평판, 그리고 사람 됨됨이 중심으로 인재를 선발하면서, 새로 선발되는 인물들 속에 영남 인사들의 약진이 눈에 띄었다.
한만유의 정책은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이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이러한 그의 입장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그가 속한 기호 노론 내에 불만이 나왔고, 이후 이러한 불만은 여러 곳에서 표출되었다. 특히 권력 유지를 위해 노론 중심의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는 당위를 가지고 있던 집권당 영수들의 관점에서 보면, 한만유의 정책은 노론 권력에 대한 도전이나 위기로 읽힐 수도 있었다. 노상추 같은 영남 인사가 칭찬할 정도의 인재 선발이었으니, 기호 노론 내에서의 비판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만유를 잘 아는 노론 인사들은 ‘그가 남인들 좋아한다’면서 비아냥거렸고, 병조판서의 임기가 끝나갈 즈음에는 좌우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놓고 그의 일을 방해하기도 했다. 영남 인재들이 선발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노론 집권층의 불만이 높을 것이라는 점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터진 당시 어영대장 이득제(李得悌)의 행동은 한만유의 처지가 어떠한지 그대로 보여주었다.
한만유가 병조판서 임기가 끝나갈 무렵, 병마절도사 이문철(李文喆)을 화성(華城)의 중군(中軍)으로 임명했다. 중군은 각 군영 대장이나 절도사 등에 버금가는 자리로, 무관 입장에서는 실제 군대를 지휘하는 보직이었다. 이문철은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소관 부대 내 여러 시설과 기물들을 점검하고 재정비하는 일을 했던 듯하다. 그러자 당시 수원 유수(留守)였던 이집두(李集斗)는 그의 이러한 노력을 칭찬하면서, 그에게 상을 주기를 청하는 장계(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를 받은 한만유는 장계 내용을 그대로 믿고 재가했는데, 당시 어영대장 이득제가 이를 논박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 연유는 기록이 없어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로 인해 이문철의 상은 최종적으로 취소되었다. 노상추의 기록에 따르면 대장 이득제가 사사로운 감정에 쌓여 이를 논박했다고 하는데, 아마 당색의 차이에서 오는 감정싸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병조판서는 문관으로, 전체 무관들을 통솔하는 자리이다. 지금과 달리 문관과 무관의 차별이 확실한 상황에서 무관인 이득제의 행동은 문관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병권을 가진 직속상관을 대상으로 논박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켰다는 사실은 군의 명령체계에도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 일이었다. 이득제는 정조의 측근들과 연결된 시파와 가까웠던 인물로 벽파였던 한만유와 일정 정도 정치적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정치적 행동이 관철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한만유의 공정한 정책이 노론 내에서까지 배척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곤혹스러운 사람은 이득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로로 다시 한만유가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그가 다시 병조판서로 돌아왔다고 해서, 3여 년 전의 그 공정했던 병조판서를 기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노상추가 보기에도 그의 명이 병조 내에서 먹힐 리 없을 것이라는 추측했고, 실제 당시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한만유는 그나마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있었던 듯하다. 만약 한만유가 개인이 가진 공정한 신념을 물리고 당파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했다면, 병조에서 그의 영이 먹히지 않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한만유나 이득제, 이집두 등은 당시 중앙 정계 곳곳에서 활약했던 엘리트 관료들이다. 개인으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은 매우 뛰어났으며, 그들의 다양한 관직 이력은 이러한 사실을 증언한다. 그러나 이들이 당파에 속하고, 그 당파의 이익을 우선하다 보면 상식적인 사람들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판단과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이들의 옮음과 공정함이 당파의 이익이 될 때만 용인되었고, 국가의 이익마저 당파의 이익이 담보될 때만 동의되었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공정한 개인이 모여도, 그 집단은 불공정해지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