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 칼럼] 스포츠계의 해묵은 정신력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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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체육회(회장 이기흥)는 12월 18일(월)부터 20일(수)까지 포항 해병대 1사단에서 국가대표 선수단을 대상으로 ‘원 팀 코리아’ 캠프를 시작했다. [사진=대한체육회]

대한체육회장의 주도로 국가대표 선수들이 매서운 한파를 뚫고 해병대 캠프에 입소했다. 이 캠프의 정식 명칭은 “국가대표 선수단 정신력 강화 및 ‘ONE TEAM KOREA’ 캠프이다. 이 캠프를 주도한 대한체육회장 이기흥은 국가대표 선수들의 정신력이 해이해져 있고, 애국심도 부족하고, 하나로 단결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국 사회는 국민소득 3만불에 이르는 경제 선진국인데다가 스포츠과학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세계적 수준의 경쟁에 임하면서 정신력이 해이해진 상태로 운동을 게을리하거나, 안일한 마음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중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확고해서 수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이 추운 날 해병대 캠프를 강행했다.

과거에도 이기흥 회장은 현실과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 대한체육회장의 자질을 의심받은 바 있다. 도쿄올림픽에서 김연경 선수가 이끈 여자배구대표팀, 높이뛰기의 우상혁, 스포츠클라이밍의 서채현, 태권도 남자 이대훈 선수 등이 목표와는 달리 4위를 차지했지만, 국가대표로서 보여준 열정과 투지는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이때, 이기흥은 “전통적 강세였던 태권도, 복싱, 레슬링. 이 부분은 우리가 한국에 가면 관계자, 전문가들과 청문회를 할 생각이다.”, “스포츠 폭력, 인권문제, 잘못된 관행 등을 고쳐오면서 엘리트 체육의 가치가 폄하됐다. 체육인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는 둥 남다른(?) 진단으로 보는 이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정신력’ 타령으로 일분일초가 아쉬운 국가대표 선수들을 데리고, 해병대 캠프에 간 것이다. 과거 자신의 ‘라떼’ 경험만으로 선수를 지도하던 구태의연한 지도자들이 아는 것이 궁색할 때, 자주 써먹던 그 레퍼토리인 ‘정신력’ 타령을 하면서 말이다.

스포츠계에는 정신력과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한국 축구에 대한 평가는 ‘정신력은 세계 최고인데, 기술이 부족하다’였다. 비록 외국인에 비해 작은 체격과 약한 체력을 가졌지만, 한민족 특유의 근성과 끈기, 즉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한국 스포츠의 주요 전략이었고, 군대식 훈련과 팀 문화를 통해 ‘이빨 꽉 깨물고 뛰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있다는 호기를 갖고 있기도 했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오랜 기간 ‘정신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선수들을 닦달하는데 좋은 핑계가 되었다. 당시에는 선수들뿐만 아니라 일반 학생들조차도 정신력을 강화한답시고, 해병대 캠프에도 가고, 공동묘지에도 가고, 겨울철 얼음물 입수도 모자라 몽둥이질까지 해댈 정도였으니, 과히 ‘정신력 판타지’의 시대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2001년 1월, 거스 히딩크라는 외국 감독이 부임하면서 국가대표 선수들을 소집해서는 다소 엉뚱하게도 체력테스트를 실시하자, 많은 축구인들이나 언론에서는 ‘한국선수들은 정신력이 강해 체력은 문제 없을텐데 시간낭비를 하고 있다’며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나온 히딩크의 진단이 “한국 선수들은 기술은 좋은데, 체력이 부족하다”에 이르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때맞춰 연이은 평가전에서 부진하자, 외국인 감독만이 능사가 아니라며, 감독의 자질 자체를 문제 삼기까지 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히딩크 감독은 뚝심있게 체력 강화 훈련을 이어갔고, 이후 선수들은 강력한 체력을 바탕으로 작전 수행 능력을 높여 나가며, 우리가 원했던 진정한 선진 축구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끈기와 근성은 개념도 모호한 ’정신력‘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를 갖고 평가된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말이다.

그리고 13년이 지났다. 이제 국가대표급 지도자 중에, 현재 한국 스포츠의 문제를 정신력 부족으로 진단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미 지도자들의 수준은 많은 연구와 학습을 통해 높은 수준으로 신장되었고, 선수들도 스스로 자신에게 닥친 과제들을 수행해 나갈 때, 멘탈 코치들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어도 구시대적 ‘정신력’에서 그 원인을 찾는 이는 없다. 또 이를 위해 타인의 강제가 필요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혹시 이 해괴한 캠프가 끝난 후 몇몇 유명 선수들이 정신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인터뷰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건 이른바 ‘직장생활’ 잘하려는 선수들의 후의이지 진심은 아닐 것이다.

2023년 12월 18일, 한국 스포츠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자, 한국올림픽위원회(KOC)의 수장인 대한체육회장 이기흥의 철 지난 ‘정신력 판타지’ 덕분에 애꿎게도 선수들이 낭패를 보고 있다. 스포츠는 세계적인 강국인데, 청소년 신체활동 지수는 꼴찌인 나라, 초등학교 장래희망 1위는 운동선수인데, 선수가 없어서 전국대회만 하는 나라, 이런 부끄러운 대한민국 스포츠의 현실에서 대한체육회장은 따로 할 일이 많다. 해병대 DNA를 심겠다며, 해병대 캠프나 기웃거릴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김현수 전 국가인권위원회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