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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검정이 女子』(청하,1985)에 대한 첫 번째 독후감에서 박정남은 불ㆍ공기ㆍ물ㆍ흙이라는 4원소 가운데 물의 상상력(이미지)에 기운 시인이라고 썼다. 그것을 재확인하고 싶다면 “바람이 맑은 물을 내놓아/ 세계를 씻어가고 있다./ 헹구어 가고 있다.”로 시작하는「秋日」을 읽어보는 것도 괜찮다. 가을은 여름의 물기가 마르는 계절이다(물기가 가을바람에 다 마르기 전에, 여름이라는 수액은 열매가 되어 가을 나무에 맺힌다). 하지만 물, 수족관, 바다, 호수가 차례대로 등장하는 저 시에서 가을은 물기가 마를 새가 없다.
박정남의 시에 물의 이미지가 아무리 많더라도, 불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시인의 질료적 상상력에 대해 반밖에 말하지 않은 거다. 시집의 표제작「숯검정이 女子」부터가 불이었다. 명사 ‘숯검정/숯검정이’의 표준어 용례는 ‘숯에서 묻은 그을음’인데, 강원도 방언으로는 그냥 ‘숯’이다.「숯검정이 女子」에서 시인은 후자의 용례로 ‘숯검정이’를 사용한다. “그렇다. 세상 女子는 숯검정이 될 일이다./ 마음에 확 불이 붙던/ 그 산속 가마의 불을 잊지 못하며/ 늘 뜨거운 불 속을 그리워한다./ 검둥이든 흰둥이든 女子의 영혼은/ 까아만 숯검정일 뿐이다.”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수학했던 시인이 강원도 방언을 쓰게 된 내력을 알 수는 없지만, ‘숯 女子’보다는 ‘숯검정이 女子’가 훨씬 울림이 있다.
물이 여성성(모성)과 순수성(정화)을 상징한다면 불은 창조(프로메테우스!)와 생명력(피닉스!)을 상징한다. 시학(詩學)에서의 질료적 상상력을 탐구했던 가스통 바슐라르는『불의 정신분석』(이학사,2007)에서 4원소 가운데 인간이 가장 먼저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불이었다면서, “선사시대의 인간에게는 모든 현상 중에서 오직 불만이 알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불은 인간의 근원적인 상상력 속에서 성본능(리비도)이나 성애(에로스)와 동일시된다. 그런 동일시는 원시인들이 불을 얻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원시인들은 나무 홈에 나무막대를 마찰시키는 것으로 불을 얻었는데, 이 과정은 성애의 과정과 다르지 않았다. 마찰과 성애는 각기 불과 자식을 얻는 신비로운 결과물을 낳는다.
시인은 여자를 묘사할 때, “女子는 울면서 흐른다./ 나뒹굴어져서 울면서 흐른다./ 울면서 소리치며 계곡을 빠져 나와 넓은 들로 적시며 흐른다.”(「커텐 드리우고」)라는 식으로 늘 수성과 여자를 연관 짓지만, 수성은 불의 철퇴를 맞는다. “파도/ 또 파도의/ 사르비아.// 하늘에 불이 탄다./ 살코기가 탄다.// 연못물이 다 마르도록/ 연못이/ 탄다.”(「중천의 태양」), “늘 시름시름 앓는 女子/ 꽃피는 女子, 죽은/ 나뭇가지에 지금 막/ 불을 당기고 있읍니다.”(「하늘에 女子」), “일렁이는 태양의 딸들/ 세차게 불타오르는 머리카락 속/ 용의 허리를 등에 업은/ 끊임없는 시작의 리듬들이/ 온다.”(「여름」), “아직 검붉은 노을인 女人은 뒤척이는/ 바다를 감고/ 검은 눈을 빤히 눈뜨고/ 사과알의 검은 씨앗으로/ 세계의 정열을 한 곳으로 모아/ 차차 붉은 햇무리 이글이글 끓어오르나니./ 밤새도록.”(「노을」)
에로티시즘 영역에서 불을 가지고 오는 켠, 불을 붙이는 쪽은 남성으로 간주된다. 여성은 아궁이처럼 불을 품고 기다리는 존재여야지 남성처럼 능동적일 수 없다. 서정주의「신부」는 성 역할을 어긴 여자가 어떤 벌을 받는지를 보여주는 교범이다. 박정남의 시에도 기다리는 여성은 있다(「오는 가을에」,「인연」,「밤」등) 하지만 여성이 누려야 할 성적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냥 수동적이지만은 않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시집에서 남자의 에로티시즘은 죽음밖에 경험할 줄 모르고(남성의 사정은 ‘작은 죽음’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행위에서 여자는 생명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박정남의 여자는 물과 불을 모두 가졌다. 그런데 긴 장맛비로 전세방 벽에 비가 스며드는 어느 곤궁한 집안을 묘사한「雨期」를 보면, 물인 여자는 물을 이기는 불이기도 하다. “어머님은 이내 탄불을 붙여/ 한 웅큼의 보리쌀을 볶으러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