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직업은 뭐라고 써?”
“음…그냥 노동자라고 써.”
“근데 왜 출근을 안 해?
“해고 노동자니까…”
“……”
“그냥 백수라고 써뿌라”
중학교 진학 상담 종이를 들고 온 딸이 아빠의 직업을 물었다. 아빠는 ‘해고 노동자’라고 말했지만, 종이에는 ‘백수’라고 쓰라고 했다. 6년 동안 복직 투쟁을 담임교사에게 설명하느니,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김대용 씨는 상신브레이크 해고 노동자다. 대구 달성군 달성공단에 있는 상신브레이크는 현대자동차 등 국내 완성차 업체에 제동계통 부품을 납품하는 공장이다. 총자산 2,258억 원을 보유한 대구 중견 기업. 상신브레이크는 지난 2010년 노동자 5명을 해고했다. 그 해 일어난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였다.
무직도 아니고, 노동자도 아니고…“노동계급이라고 하자”
6년째 부당해고 복직 투쟁, 부당해고 판결만 4번
대용 씨는 파업 당시 일반 조합원이었지만, 전직 노조 지회장이었기 때문에 파업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부당 해고 소송으로 2000일이 지나는 동안,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던 딸은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는 “한 번은 딸이 컴퓨터에 뭐를 적었는데, ‘우리는 아빠는 게을러서 해고됐다’고 적어 놨더라”고 말했다. 딸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내내 출근하는 아빠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내년이면 중학생인 딸은 아빠가 백수라는 말에 “그럼 우리는 흙수저야?”라고 물었다. 대용 씨는 당황했다. 요즘 초등학생 사이에서도 흙수저, 금수저 이야기를 하는구나. 금수저를 물려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는 곧 이렇게 답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흙수저다. 금수저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잘못된 사람들이야.”
직업 문항 앞에서 망설이기는 현재 금속노조 상신브레이크지회장인 정준효 씨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2010년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준효 씨는 “우리 애들은 아직 어려서 이런 경험은 없지만, 재판받을 때 직업란이 있잖아요. 근데 직업란에는 해고자가 없어요. 근데 또 우리가 무직은 아니거든. 노동조합에서 복직 투쟁을 하고 있으니까. 평상시에는 이런 생각이 안 나는데 알게 모르게 이런 순간이 좀 있어요”라고 말했다.
복직 투쟁 중인 해고노동자의 직업은 뭘까. 대용 씨와 준효 씨는 한참을 이야기했다. 노동력을 팔고 임금을 받지 않으니 노동자도 아니라는 결론까지 이르렀다. 그때 대용 씨는 “노동자도 따지면 아니고. 노동계급이네요. 노동계급”이라고 말했다.
대용 씨는 이미 4번이나 부당해고 판정을 받았다. 경북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 서울행정법원, 서울고등법원에서 모두 부당해고 판정을 받았다. 서울행정법원, 서울고등법원은 준효 씨도 부당해고라고 판정했다. 해고자 5명 중 4명이 부당해고 판정을 받은 것이다.
이 소송은 현재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해고자들은 ‘불법파업’이라고 규정한 판결에 불복했고, 사측은 5명 모두 정당한 해고라고 주장하며 불복했다.
사측은 대용 씨와 현 민주노총 대구본부 수석부본부장인 조정훈 씨가 전직 간부, 상급단체 간부로 파업 주도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했다 이유로 해고했다. 조금 황당하긴 하지만 타임오프제가 적용되면 이들이 “현장에 복귀해 일해야 하므로 영향력을 행사해 강력한 파업을 전개하도록 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4명이 복직 판결이 났으니까 소송을 그만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법원이 우리 파업이 불법파업이라고 했거든요. 사측이 자꾸 타임오프제가 쟁점인 것처럼 몰고 가는데, 우리 요구는 임금 인상과 근로조건 향상이었어요. 그 요구로 쟁의권을 얻었고요. 여기서 그만두면 우리가 불법파업했다고 인정하는 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당한 파업을 한 거거든요”-정준효
민주노조 위원장은 임기도 못 채우던 상신브레이크
“해고된 민주노조 조합원이 복직하는 선례 남기기 싫은 것”
달성공단은 1987년 논공에 자리를 잡자마자 전국적인 노동자대투쟁을 맞는다. 당시 상신브레이크에도 노조가 생겼다. 다음 해에 입사한 대용 씨는 3개월 만에 노조 대의원이 됐다. 상신브레이크의 민주노조 괴롭히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노조 위원장 임기가 3년인데, 96년도에 10대 위원장이 됐어요. 1년에 한 번씩 위원장이 바뀐 거죠. 민주노조 위원장이 들어서면 해고시키고, 그 자리에 어용노조 위원장이 들어와요. 그러면 조합원들이 불신임 투표해서 내리고, 다시 민주노조가 들어서고, 또 해고당하고 10년 동안 그랬어요.”-김대용
민주노조 성향 위원장이 임기를 채우기 시작한 건 대용 씨부터였다. 당시 한국노총 소속이던 상신브레이크노조는 1996년 김영삼 정부의 노동법 개악에 맞서 총파업에 나섰다. 97년 IMF가 터지자, 공장은 식당부터 외주화를 시도했다. 당시 위원장이던 대용 씨는 식당 노동자, 계약직, 특례병 등 공장 내 모든 노동자를 노조로 조직했다. 정규직, 계약직 할 것 없이 임금 삭감이 무섭게 시작됐기 때문이다.
사측은 노조를 점점 확대해 가는 대용 씨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대용 씨가 위원장이 될 때부터 사측과 어용노조는 대용 씨가 스스로 떠나도록 방법을 강구했다. 그중 하나가 부엌칼 협박이었다.
“사측이 조직해 놓은 어용노조 핵심 몇 명이 있었어요. 그 몇 명이 민주노조 위원장 들어서면 항상 협박했지. 부엌칼을 들고 와서 위원장 사퇴 안 하면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더라고요. 찌르라 그랬어요. 나는 사퇴 못 한다고. 대신 살인미수로 고소하겠다 그랬죠. 근데 경찰에 고소하니까 회사랑 경찰이랑 뭐가 있는지 조사를 잘 안 해. 그래서 검찰청에 고소를 했어요. 검찰청에 고소하니까 이제 회사가 없던 거로 하자면서 합의를 하자고 하더라고”-김대용
대용 씨는 회사와 합의하면서 어용노조 핵심 3명을 노조에서 제명시키고, 10년 만에 민주노총에 가입했다. 그는 “민주노총으로 오고 나서 회사가 많이 컸어요. 임금 오르고, 노동 조건이 좋아지니까 일할 사람이 모이는 거지. 그때 회장이 나한테 고맙다는 말도 했어요”라고 말했다.
민주노총에 가입한 이후, 해고자가 한 명도 없었다. 2010년 파업이 일어나자 사측은 기다렸다는 듯이 노조 간부들을 해고했다.
“김대용 위원장이 되기 전까지는 민주노조 하면 다 해고됐잖아요. 해고자들이 복직되는 경우가 한 번도 없었어요. 소송하더라도 다 지고, 소송이 워낙 기니까 그 과정에서 다 떨어져 나가는 거지. 저희도 5명 중 4명이 복직 판결을 받았는데, 사측이 복직시키고 다시 해고하겠다는 말을 해요. 민주노조 조합원이 복직하는 선례를 만들기 싫은 거지”-정준효
“복직해도 민주노조 다시 만들 수 있을까…”
끝나지 않는 고민, “살아남아야죠”
그동안 해고 노동자들은 법원에서 의미 있는 판결을 받았다. 사측이 제기한 10억 손해배상소송이 대법원에서 기각됐고, 직장폐쇄 기간 중 사측 부당노동행위도 인정됐다. 부당해고 판결이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나오면 희망적인 상황이다.
“결정적으로 파업이 정당하면 해고될 이유가 하나도 없죠. 사측이 부당노동행위한 게 밝혀졌으니까 그게 영향을 미칠 것 같아요. 사측이 노조를 파괴하려고 했던 것이 정상 참작돼서 혹여나 유리하게 판결 날 수도 있지 않을까. 노조파괴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도 진행 중입니다.”-정준효
하지만 이들은 복직된 후도 걱정이다. 2010년 파업이 끝나고, 사측이 직장폐쇄를 풀었을 때도 공장에서 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고되던 12월까지 약 2개월 동안 강제 합숙, 자택 대기 등 사측의 징벌적 명령을 따라야 했다.
“대법원에서 복직 판결이 나면 다 해결된다는 건 환상이에요. 파업 끝나고 해고되기 전에도 우리는 회사를 못 갔어요. 2주 동안 강제 합숙 교육받고, 자택 대기시키고. 복직 판결이 난다고 해서 현장에 들어갈 수 들어갈 수 있는 확신이 없는 거죠. 복직하면 회사 지시를 받아야 하는데, 자택 대기시킨다든가 사무실에 하루 종일 대기시킨다든가. 그렇게 안 하면 근무지 이탈인데, 그건 또 해고 사유가 되거든요.”-김대용
옆에서 듣고 있던 준효 씨는 “대용이 형은 불면증이 심해서 다시 일할 수 있겠냐”며 걱정 섞인 농담을 던졌다. 대용 씨는 해고 후 불면증으로 8kg이 빠졌다고 한다.
복직 후에 예상되는 문제는 이뿐 아니다. 다시 민주노조를 세울 수 있을까. 사측이 복수노조를 내세워 탄압하지는 않을까. 대용 씨와 준효 씨는 한참을 이야기했다. 다시 민주노조를 세우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민주노조 이후 노동환경이 눈에 띄게 좋아졌기 때문이다. 이직률도 줄었다. 하지만 2010년 이후, 사측은 그동안 외주화하지 못했던 식당, 청소 업무 등을 외주화하기 시작했다. 논공읍 본 공장은 규모는 줄어드는데 매출은 늘고 있다. 외주 하청 공장이 늘어난다는 의미다.
“옛날에는 ‘개브레이크’라 했어요. 현장에 냄새도 많이 나고, 먼지도 많았는데 노조가 생기고 현장 조건도 좋아졌습니다. 생산직 일자리 중에는 괜찮은 일자리가 되어 가는 과정이었어요. 올해 복직해도 제가 정년이 21년 남았거든요. 당장 민주노조를 세우겠다는 자신감은 없어요. 노조 위원장 출마한다고 해도 당장 당선도 안 될 거고. 당선돼도 노동조합이 힘이 없으면 잘릴 거잖아요. 힘이 생길 때까지 살아남아야죠. 대법원 복직 판결이 가장 큰 명분이기 때문에 그 이후에 있을 새로운 싸움을 준비할 거에요. 생계도 병행하면서 준비해야죠”-정준효
준효 씨는 해고되고 재산이 제일 많이 늘었다며 핸드폰에 저장된 영상 하나를 내밀었다. 3살인 큰 아이가 1살인 동생을 안고 섬집아기를 불러주고 있었다.
“해고되고 나서 애가 둘 생겼으니 재산이 제일 많이 늘었죠. 애가 그냥 크는 게 아니잖아요. 보통 일 아니더라고. 틈틈이 애도 보고. 우리 애가 좀 귀여워서 그 낙으로 살아요. 우리 애가 좀 더 귀엽다니까”-정준효
인터뷰가 끝난 후 돌아가는 차 안, 준효 씨는 운전하는 내내 이야기를 이어갔다. 5인승 승용차에는 이미 유아용 카시트가 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실 길어야 3년일 줄 알았어요. 소송 끝까지 하면 3심이니까 1년씩 걸린다고 해도 그렇잖아요. 부당해고 소송은 노동자들 생계가 걸린 문제인데, 법원에서 이렇게 오래 끌 줄 몰랐어요. 법이 좀 그래요. 부당노동행위를 해도 벌금 200만 원밖에 안 되는데, 노조 파괴하고 얻는 이득이 더 많은데 어떤 사업주가 법을 무서워하겠어요. 부당노동행위는 개인에 대한 게 아니라 노동조합에 대한 건데, 처벌을 더 강화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정준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