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여자는 눈을 뜬다-「커텐 드리우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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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남의 첫 시집『숯검정이 女子』(청하,1985)는 1980년대의 여성시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라면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여성이 쓰는 시는 과거지향적인 내용과 단조로운 형식으로 인해 오랫동안 ‘여류시’라는 차별을 받아왔다. 최승자의『이 시대의 사랑』(문학과지성사,1981)이 나오면서부터 여성시는 ‘여자가 쓰는 시’라는 오해를 벗어나게 된다.

‘여류시’가 퇴영의 길을 걸었던 이유는 남성 중심의 사회의 제약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여성 시인은 가정과 사회에서 받는 차별이나 자신의 주체성을 솔직히 드러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여성 시인은 여성의 본성이라고 믿어져온 모성이나 아가페 사랑, 돌봄과 같은 가치를 종교적인 언어로 장식하는 시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 길로 성공한 여류시인이 김남조(1927~2023)인데, 한국 시사(詩史)는 반쯤은 여성 억압의 산물이었던 그 작업에 ‘생의 존재론적 탐구’라는 허황된 찬사를 바쳤다. 그런 뜻에서, 1970년대 중반 무렵에 발표된 박정남의「I love You 고무인형」은 여성 시인에게 둘러씌워진 제약을 뚫고 나온 시로 대접받아야 한다. 이 시는 남성 화자의 목소리로 쓰여졌다.

“가시나야./ I love You 입이 삐죽 나온 고무인형을/ 내동댕이친다./ 이리 내동댕이치고 저리 내동댕이친다./ 머리가 헝클어져 울고 있는지 말 없이/ 엎어져 있다./ 성난 입은 더욱 튀어 나오고/ 내리깐 눈두덩이는 더욱 새파랗다./ 그래도 I love You다./ 다시 엉덩이를 아리하게 내동댕이칠까./ 내동댕이치고 내동댕이치고 사랑하는/ 女子의 머리결을 빗겨 주어야 할까/ 멍이 든 가슴과 다리 두 볼 쓰다듬어 주어야 할까./ 다시 일으켜 손에 안고/ 머리를 빗겨 뒤로 모으고, 뽀뽀해 주고/ 살아나는 두 볼, 단정한 모습/ 너의 I love You 검은 몸에/ 오래 파묻힌다.” 이 시의 ‘고무인형’은 변덕스러운 남성의 폭력과 섹스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일부 여성의 노예 상태를 보여준다. 이 여성들은 ‘I love You’라는 문구가 인쇄된 크롭탑을 입은 흑인 고무인형처럼 함부로 내동댕이쳐지고, 멍이 든 가슴과 다리를 파고드는 남자 주인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노역을 바친다.

시인이 애용하는 이미지는 불ㆍ공기ㆍ물ㆍ흙이라는 4원소 가운데 어느 하나에 집중될 수 있으며, 어느 원소와 결부되느냐에 따라 시인의 개성이나 상상력의 유형을 알 수 있다.「물가에 앉아」라는 제목의 시가 시집의 첫머리에 나오는 만큼, 박정남의 경우는 두말할 것도 없이 물이다.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예순 편의 시 가운데 물이나 점액질과 상관있는 단어나 동사가 없는 시는 찾기 힘들다. 상징사전에서 물은 여성과 모성을 상징한다. “女子는 젖어 있다.”(「황혼」), “물이 많은 女子/ 젖은 물고기 같은 女子”(「하늘의 女子」) 참고로 고무나무의 수액을 고무라고 한다는 것도 써둔다.

여성과 모성의 원리를 가진 물은 또 순수성이나 정화를 상징하지만, 박정남의 물은 부패나 죽음과 연관되고는 한다. 이 시집에는 낙태를 묘사한 시가 세 편이나 있는데, 이것은 모두 물과 연관되었다. 한 대목을 보자. “잡초를 뽑아 버리듯/ 절로 생긴 아이들은 주사를 넣어/ 피로 쏟아버리거나 긁어내는 거야./ 북호텔의 이월, 추운 때에 비닐에 싸여/ 떠나니는 아가.”(「북호텔」) 물이 순수성이나 정화를 나타내주지 못하고 부패와 죽음을 떠올려주는 시인의 대표작으로 수성못 유원지를 배경으로 한 시가 있다. 호수는 육지에 있는 동굴, 생명의 샘이지만, “이 곳에 와서도 아무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수성못」)라고 시작하는 이 시의 첫 두 줄을 보면, 수성못은 촉촉한 물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황무지처럼 메마르다.

시인은 이 시집에서 여성의 주체성을 보여주기보다, 낭만적 사랑에 기운 여성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여성들이 전통적이고 수동적이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한국 시사에서 볼 수 없었던 성적 욕망을 자인하는 여성과 남성에게 생명을 나눠주는 여성의 에로스 능력이 한껏 과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