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건전재정’의 또 다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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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 음력 10월의 가을비는 단순히 겨울만 재촉하는 비가 아니었다. 봄에 왔으면 좋았을 비가 가을에 쏟아진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쏟아지는 비의 양이었다. 한양을 중심으로 도성이 넘칠 정도로 비가 오면서, 한강에 연결된 하천이란 하천이 모두 넘쳤다. 봄 가뭄으로 인해 예견된 흉작이었지만, 하필 수확 시점에 비까지 겹치니 백성들 입장에서는 헛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흉년에 쐐기를 박는 비였다.

내리는 비야 헛웃음으로 상대할 수 있다 해도, 진짜 문제는 닥쳐오는 겨울이었다. 가을걷이를 해서 추운 겨울을 나고, 봄철 힘든 보릿고개를 넘긴 후 6월 수확한 보리로 가을을 맞는 게 조선 양민들의 삶이었다. 힘든 보릿고개도 가을에 거두어 둔 관아 창고를 털어 겨우 넘어가는 게 그들의 일상이니, 이 시기 거두는 곡식은 겨울과 내년 봄을 넘길 최소한의 대비책이었다. 그런데 10월이 넘어 내리기 시작한 1809년의 가을비는 이 가능성을 모두 물에 쓸어 넣어 버렸다. 지옥보다 더한 겨울을 예고하면서.

도성의 사정도 문제였지만, 이 당시 특히 도성에서 가까운 남양(南陽)과 안성(安城) 지역 사정이 심각했다. 도성이야 전국 물산이 모이는 탓에 흉년이라 해도 얼마간 버틸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도성에서 조금 벗어나면 상황은 전혀 달랐다. 가을걷이가 없으면, 그해 겨울을 보장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로 인해 곳곳이 잠겨 버린 남양이나 안성 백성들이 처한 상황이었다. 비록 천재지변 때문이라 해도, 도성을 비롯한 인근 지역 백성들이 죽어 나갈 처지에 놓였다. 조정의 고민이 깊어진 이유였다.

다행히 고민은 직접적인 대책으로 이어졌다. 핵심은 백성들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당장 구휼미를 풀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나라 곳간의 곡식을 거저 풀 수만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을걷이는 물 건너 간 셈이니, 백성들은 빈손만 놀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대규모 준천濬川 공사였다. 하천을 준설해서 물이 잘 흐르게 하는 공사로, 원래 부역의 대상이었다. 부역은 백성들이 국가에 제공해야 하는 의무 가운데 하나였지만, 이번 준천에는 노동에 대한 대가, 즉 역가(役價)를 지불하기로 했다.

사람과 소에게 지급되는 하루 역가는 합쳐서 6전씩이었다. 소를 가지고 나온 백성들은 6전씩 받을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개별 노동력에 따른 역가를 받았다. 한달이면 1냥 80전을 벌 수 있었으니, 이 정도면 겨울을 버틸 최소한의 곡식은 마련할 수 있었다. 청계천의 가장 위에 있었던 태평교(太平橋)부터 하양교(河陽橋)까지 구간을 준설하기 시작했다. 동원된 소만 70마리가 넘었으니, 적지 않은 규모였다.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준천 공사에 동원되기를 원했고, 생활고가 급한 많은 백성들이 참여했다.

어떤 백성들은 70마리나 되는 소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소를 동원하면 사람의 힘만으로 흙을 퍼 나를 때보다 속도가 월등히 빨랐던 탓이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일의 효율성이나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일을 할 수 있는 기간이 더 필요했던 터였다. 그런데 소로 인해 공사 기간이 단축되면 그만큼 역가를 받을 수 있는 날도 줄어들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일할 수 있는 날들이 필요했지, 효율적인 청계천 준설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청계천 준설이 이때만 있었던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대규모 청계천 준설은 1760년 영조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청계천은 늘어난 도성 유민들로 인해 몸살을 앓았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유민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한양 인구가 급증했고, 1700년대가 되면 병자호란 직후 인구의 2배 이상이 되었다. 청계천 주변은 모두 채소밭이 되었고, 이로 인해 늘상 수로가 막혔다. 게다가 늘어난 유민들로 도성이 팽창하면서 도성 주위 산들은 땔감 마련 과정에서 민둥산이 되었고, 이로 인해 비가 조금만 와도 토사가 밀려들어 청계천을 메웠다.

당연히 청계천 준설이 필요했지만, 영조가 이를 시행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1760년 준설은 보릿고개가 시작하는 음력 2월 시작해서 4월까지 진행되었는데, 이 기간 먹고 살길이 없었던 도성 유민들에 대한 구휼도 중요했다. 당시 5만여 명에 달하는 인력이 고용되었고 이들에게 돈 35,000냥과 쌀 2,300석이 지급되었다. 영조 역시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도성축조나 하천준설과 같은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킨 그 전대의 전통에 따라 청계천 준설을 했다. 미국의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1930년대 루즈벨트 대통령이 시행했던 뉴딜 정책의 한 단면이 조선에서도 이루어졌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그들의 영속적 삶을 보장하는 데 있다. 정부 재정은 이를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다. 조세가 의무여도 국민들이 받아들이는 이유이다. 따라서 정부 재정은 국민들의 생명과 안정적인 삶이 위협받는 곳에 우선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건전재정’은 그 목적과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지출될 때 붙이는 이름이어야 하지 않을까?

많은 경제지표들은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을 심각한 위기라고 경고한다. 코로나19로 힘들었던 시기가 차라리 나았다는 많은 자영업자들의 말이 엄혹한 미래를 예견하는 듯해서 불안하기 이를 데 없다. 백성들이 굶으면 적극적인 재정 지출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했던 조선을 떠올리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