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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교사들이 최근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 여름, 교사들의 잇따른 자살은 커다란 충격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교사들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교사들이 직면한 어려움이 결코 올 한해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도 한다.
상담과 심리치료의 영역에는 ‘촉발 사건’이라는 용어가 있다. 촉발 사건은 어떤 문제의 원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용어는 내담자가 상담을 결심하기 전에도 어떠한 어려움을 상당 기간 겪어왔음을 가정한다.
가령, 몇 년에 걸쳐 우울한 기분을 경험했거나 적응의 어려움을 느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촉발 사건을 찾아내는 것은 줄곧 비가 올 것 같았던 우중충한 날씨에서 마침내 빗물이 ‘떨어지게끔’ 만든 사건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사실 현장 교사들이 직면한 어려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교권침해와 악성 민원으로 인한 교사 소진은 이미 만성화될 대로 만성화된 문제다. 그렇다면, 이렇듯 만성적 상황을 극단적 상황으로 휘몰아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현장의 사례들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몇 가지 단서들을 찾을 수 있다. 최근 교사들은 ‘이상’한 아이들과 ‘특이’한 학부모들이 많아졌다는 호소를 종종 하곤 했다. 사례별 다양성을 잠시 제쳐두고, 이러한 호소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학기 초에 유난히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증가했고, 주로 신입생(초1·중1·고1)과 그들의 부모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예를 들면, 교실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거나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초등 1학년이 눈에 띄게 많아졌고, 교사가 학부모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학부모와 마찰 또한 증가했다.
그 밖에도 발음이 다소 어눌하거나 또래 관계를 맺는 사회적 기술이 미숙한 아이들이 많이 관찰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또 다른 관찰은 아이들의 자해와 자살 시도 증가 양상과 관련되어 있다. 학교 따돌림, 성적 비관 이외에도 부모 꾸지람 혹은 가족 불화 등을 이유로 돌발적으로 자살을 시도한 사례가 다수 보고됐다. 학교폭력 사안 또한 다소 증가한 것으로 관찰됐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유추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입학’이라는 변화는 학년이 올라가는 변화보다 큰 변화고 적응을 위해 더 큰 노력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입학은 누구에게나 다소 어려운 과제이자 관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 과제가 더 심각한 난관이 되어 버린 것일까? 이 질문은 발음이 정교하지 못하고 사회적 기술이 미숙한 아이들이 많아졌다는 현장의 관찰과 연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아이들이 과거에 비해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한 가지 가설은 2020년 코로나19로 인한 초기 학교 폐쇄와 온라인 수업, 교실 내 마스크 쓰기를 비롯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단기적으로 그리고 중장기적으로 학교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질문에서 찾아질 수 있다. 학교라는 공동 학습의 장이 폐쇄 혹은 온라인화됨에 따라, 많은 아동 청소년은 과거의 아동 청소년보다 또래 관계를 맺고 사회적 기술을 익히는 기회를 덜 얻게 되었다.
학교가 정상화되었지만, 마스크는 어눌한 발음을 교정하거나 정교화하는데 방해물로 작용했을 것이고, 또래 간 미세한 표정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관계기술 발달을 저해했을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영향은 일부 학생에게는 치명적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가령, 발달상 행동 조절의 어려움이 있거나 사회적 기술이 미숙한 학생의 경우, 그들의 교실 적응은 더욱 힘들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었을 학교 적응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거치면서 더욱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가설은 과거에 비해 더 많은 신입생이 신학기 적응의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력하다. 나아가, 엄격한 사회적 거리 두기 상황에서 다소 잠잠했던 학교폭력의 피해가 최근 이러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많이 발견된다는 관찰은 이 가설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또 다른 일부 학생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 코로나19와 사회적 거리두기 시간 동안 ‘가족’은 교육과 양육 기능을 온전히 맡아야 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아이들이 가족으로부터 방치되거나 학대받았다면, 혹은 가정 내 불화를 끊임없이 경험해야만 했다면, 이들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심각한 외상을 안고서 학교로 돌아온 셈이 된다.
즉, 코로나19 이후 경제적으로 위축되고 반복된 좌절을 경험했던 가정의 아이들이 새로 입학을 했다면, 이들은 현저히 덜 준비되고 덜 지원을 받으며 적응의 관문을 넘어야 했을 것이다. 가장 심각한 어려움은 발달상의 미숙과 가족 내 어려움이 공존한 아이들에게서 발견될 것임이 틀림없다.
얼마 전부터 동네 신호등 부근에서 “일수, 삼수, 오수”라는 현수막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재수나 삼수를 말하는 것이라 여겼지만, 이내 대출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현재 국내 가계부채는 역대 최고로 약 1,794조 원에 달한다.
채무나 신용 불량에 시달리는 서민을 지원하는 통합지원센터의 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동안 약 11만 명이 상담을 신청했고 평균 17.7일을 기다려야 간신히 상담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렇듯 절박해진 사람들에게 “일수, 삼수, 오수, 대출문의”라는 현수막은 당장의 고비를 넘길 대안으로 여겨질 게 분명하다.
이 현수막의 뒤에서, 우리는 코로나19와 연이은 불황 그리고 가계부채의 늪에 빠진 가족들의 무겁고 어두운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의 암울한 실체는 유독 적응에 힘들어하는 아이와 학부모의 모습으로, 나아가 아이들의 충동적 자살 시도에서 다시금 그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교사들의 연이은 극단적 선택은 만성화된 어려움 속에서도 교육자로서의 신념을 지키며 힘들게 버텨왔던 그들이, 코로나19 이후 서서히 ‘무너져버린’ 가족과 만나면서 생긴 비극의 결과가 아닐까?
김은영 경북대학교 교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