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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문을 열고 경찰이 한 남성을 검문한다. 집에서 슬리퍼를 신고 나온 동남아시아계 이주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경찰은 이주민에게 불법체류자라서 체포한다며, 미란다원칙을 고지했다. 경찰이 수갑을 꺼내들자 이주민이 계단 쪽으로 도망쳤다. 이 과정을 촬영하던 유튜버가 도주하는 이주민을 막았고, 경찰과 함께 이주민을 눌러 주저앉혔다. 이주민이 손을 뿌리치고 재차 도주하려 하자 경찰은 테이저건을 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뒷수갑을 찬 채 경찰에 연행됐다. 유튜버는 이주민을 제압한 경찰에게 말한다. “제 말 믿으시겠죠 이제? 저는 이 일을 그냥 합니다. 국가가 안 하니까.”
그는 이주민을 신고하고 체포되는 과정을 촬영해 콘텐츠로 제작하는 유튜버다. 최근 올라온 위 영상과 유사한 영상이 백수십 건 이상 올라와 있다. 체류자격이 없을 것이란 추정하에 신고되고 체포당하는 이주민의 얼굴, 체포하는 경찰의 얼굴이 여과없이 담겨 있다. 영상에 등장하는 이주민의 얼굴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그들은 소리치며 눈물 흘리고, 슬퍼한다.
유사한 사태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지난 7월 경기 포천에서 청소년 3명이 베트남에서 온 이주노동자를 1시간여 집단폭행하고 금품을 뺏으려 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피해자가 번호판 없는 오토바이를 탄 것을 보고 멈추게 한 뒤 폭행하고 ‘불법체류’를 신고하겠다며 금품을 요구했다. 이들은 지난 6월 똑같은 수법으로 다른 이주노동자들을 협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이들에게 징역형을 구형했다.
대구에서도 주말 평화롭게 예배 중인 이주민 교회에 위조신분증을 소지한 자가 있다는 신고가 접수되자, 경찰이 예배당에 진입해 체류자격 없는 이주민을 체포하고 추방한 사례도 있다. 예배당에는 위조신분증을 소지한 사람은 없었다. 이주노동자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력적인 상황을 콘텐츠로 유통하는 이들의 행동은 그들에게 사적인 이익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개선되지도, 이주노동자를 쉽게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만드는 제도가 바뀌지도 않는다.
사적 제제가 금지된 현대국가에서 무엇이 이주민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나. 윤석열 정부는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칼국숫집 주인의 입을 빌어 “외국인 노동자의 임금을 내국인과 동등하게 지불해야 한다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이 문제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 이전에도 ‘반값 가사노동자 도입’이라는, 인종이나 국적을 이유로 최저임금을 지급하지 말자는 메시지도 나왔다. 대통령을 위시한 정치인들은 제 나름의 합리성을 주장하며 인종이나 국적이 다른 이들에 대한 차등이 가능하다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이것이 이주민을 향한 폭력이 자라나는 토양이 된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저서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홀로코스트가 현대성의 이름으로 반복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홀로코스트를 수행한 독일인은 현대와 무관한 야만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으며, 홀로코스트는 지극히 현대적인 관료사회의 정책으로 수행됐다.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의 핵심은 분절이다. 관료사회에서는 정책의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며, 정책으로 나타난 결과에 대해 사회 구성원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하거나, 분절된 책임감만을 느낀다. 정책 대상이 되는 사람의 눈물 흘리는 얼굴을 지우고 분절시켜, 이들에 대한 인간적·도덕적 책임을 제한한다. 그리고 인간을 특정한 성질로 분절시키고 인간이 아닌 특정한 성질(인종, 성소수자, 종교, 장애 등)에 대한 정책으로 위장해, 대상에게 미치는 정책의 총체적 결과에 대해서는 도덕적 평가를 면제받으려 한다.
바우만은 같은 논리로 ‘이주민 혐오’를 분석한다. 홀로코스트나 인종주의를 단순한 이주민 혐오로 혼동하는 것은 혐오하는 개인만 남기고 그 혐오를 가능하게 하는 ‘현대성과 현대사회’에 대한 성찰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끝으로 분절을 넘어 새로운 윤리학이 우리 시대에 불가피하다고 책을 마친다. 바우만은 새로운 윤리학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 윤리학은 유튜버에게 체포돼 눈물 흘리는 이주민의 얼굴과 그 삶의 궤적을 살필 수 있도록 하는 모습이리라 생각한다.
박중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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