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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멈춘 것 같이 고요하다. 대형 승용차를 몰던 홍두표(69) 씨는 어떤 생각에 잠겨있다가, 고요를 깨는 쾅-하는 소음과 충격을 듣고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우회전하면서도 좌측에서 직진 차량이 온다는 생각을 못 했다. 다행히 사람이 다치지 않아 큰 사고는 아니었다. 지난 23일 있었던 사고다. 가급적 운전을 하지 않으려다 운전대를 잡았더니 여지없이 사고가 나 버렸다.
지난해 10월 29일 이후 두표 씨의 일상은 멈췄다. 두표 씨의 정신도 그즈음을 헤집고 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다가도 갑자기 멍해졌다. 급한 일을 하다가도 잊어먹는 일이 잦았다. 아들 의성 씨가 이태원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부터, 두표 씨는 수렁에 빠진 것처럼 한 걸음 옮기기가 어려웠다.
참사 이후, 청송군에서 생업으로 하던 7,000평 사과밭을 모두 처분했다. 화물차도 팔았다. 의성 씨가 권해 작년에 산 승용차는 차마 처분하지 못했다. 다른 일을 하려 해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상을 접어둔 두표 씨는 의성 씨 영정 앞에 향을 피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의성 씨가 쓰던 방은 그대로 유품 방이자, 빈소가 됐다. 한 달 4번, 두표 씨는 서울로 향해 이태원 참사 서울시청 농성장 당번을 선다. 참사 1년이 지났지만, 두표 씨는 아직 탈상하지 못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은 여전히 상중
30일 새벽 날아든 비보
쌍둥이 형제 중 형이 참사 휘말려
“아무도 책임진다는 사람 없어, 자책하게 돼”
가난과 싸움에 평생을 썼던 두표 씨는 자식들만큼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나무해서 돈 벌어 오라는 아버지 말을 안 듣고 해양고에 진학해 원양에서 운반선을 탔다. 자본금을 모아 대구~영주에서 개인택시를 했다. 아들, 딸을 하나씩 두고 쌍둥이 의성 씨와 두성 씨까지 낳은 후 고향 바로 옆 안동에 정착했다. 사과밭은 청송에 있었지만, 안동이 교육 여건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하려 하는 것을 특별히 막아서진 않았지만, 단 한 번 반대한 일이 있다. 안동 한 병원에 간호사로 취직한 의성 씨가 아프리카에서 간호사로 일하겠다는 계획을 알렸을 때, 두표 씨는 내전, 질병 등을 우려해 만류했다. 부모 말을 잘 따르는 의성 씨는 그 대신 서울의 더 힘든 빅5 병원에서 근무하겠다고 목표를 바꿨다. 군대도 힘든 수색대를 자원해서 간 아들답다고 생각했다. 두표 씨는 그때의 만류가 잘못이었는지 자책한다.
형과 항상 붙어 다니던 두성 씨는 형과 함께 서울로 갔다. 두성 씨는 서울에서 상점을 하며, 형과 함께 살았다. 두표 씨는 두 형제가 함께 있으니 걱정을 덜었다. 서울살이 경험이 끝나면 두표 씨는 아들들에게 안동에 정착해 살 수 있도록 결혼 자금, 생활 자금도 준비했다. 그러면 어릴 적 받지 못한 가정의 지원을 두표 씨는 완수했다고 여길 수 있을 터였다.
모든 계획은 지난해 10월 30일 새벽 전화 한 통에 깨졌다. 평소처럼 아내와 새벽 사우나를 갔는데 TV에 큰 사고가 났다는 소식이 나왔다. 두표 씨는 한국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사우나실로 들어갔다. 마치고 나오니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 의성 씨에게서 온 전화였다. 다시 걸어보니 거제도에 사는 큰아들이 받았다. 왜 네가 받느냐. 아버지, 놀라지 마소. 의성이가 이태원에서 그래됐니더. 밤중 비보에 부모님 사고를 걱정한 뒤늦은 전화였다. 전화기 너머로 두성 씨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입관부터 장례까지 모두 안동에서 치렀다. 처음 두표 씨는 사건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사고는 누구의 잘못인가. 처음에는 멍하고, 먹먹할 뿐이었다. 수많은 문상객들을 마주 보면서도 먹먹했다. 사고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안동이지만, 슬퍼하는 아들 친구들을 맞이하며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아들을 나무 밑에 묻고 집에 왔다. 한 사람의 빈자리가 절절하게 다가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의성이가 잘못했나. 내가 잘못했나.
두표 씨는 우선 혼자 있을 두성 씨 걱정에 즉시 모든 짐을 처분하고 안동으로 오도록 했다. 29일 의성 씨와 함께 이태원을 찾았던 두성 씨는 눈앞에서 형의 손을 놓쳤다. 평생의 시간을 의성 씨와 공유한 두성 씨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술을 즐기지 않는 두성 씨지만 잠에 들기 위해 매일 밤 술을 마셔야 했다. 일상은 멈췄고, 술병만 쌓이는 나날이었다.
세상은 늪에 빠진 듯한 시간을 보내는 두표 씨를 위에서 짓눌렀다. 두표 씨 가족은 경북에서 단 하나뿐인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다. 친한 이들이 무심결에 하는 말도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악의는 없는 말이라고 이해하려 했지만, ‘놀러 가서 그렇게 됐다’는 식의 말은 당사자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치 미디어나 특정 정치권에서 전략적으로 만들어 낸 듯한 시각을 생각 없이 옮기는 듯했다. ‘시체팔이’ 운운하는 망언이 정치인의 입에서 나왔다. 자기 탓이라고, 죄송하다고, 책임지겠다고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온 세상이 그들 부자를 손가락질하는 듯했다.
모욕 속에서 두표 씨는 다른 유가족과 연이 닿았다. 의성 씨와 함께 목숨을 잃은 사람이 158명 더 있었다. 그제야 아픔을 이해하는 사람들, 함께 분노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처음에는 그들과 거리를 두던 두표 씨도 그들과 만나며 힘을 얻었다. 두 달여 뒤 유가족협의회에도 들어간 두표 씨는 유족들과 함께 차근차근 참사를 되짚어봤다. 사전 예방은 제대로 됐는지, 처음 신고를 받고는 어떻게 대응했는지. 정부와 치안, 구조 당국의 대응을 하나하나 뜯어본 결과, 사고 예방, 신고 접수와 대응, 출동, 구조, 참사 이후 대처까지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한 것이 없는 총체적인 국가의 실패이자 국가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사회는 다르게 여기는 듯했다. 참사 이후 1년,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길 가던 사람들 158명과 그 사고 여파로 이후 사망한 1명, 159명이 목숨을 잃어도 어느 하나 잘못한 사람이 없는 나라. 길 가다 죽지 않기 위해 누구도 믿지 말고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말고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나라. 앞으로 다른 참사가 반복되더라도 지금처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고통과 참사의 책임은 오로지 가족을, 친구를, 가까운 사람을 잃은 사람이 져야 하는 몫이 됐다.
두표 씨는 형을 잃고 힘겨워하는 두성 씨를 보면서, 이제 단 하나, 이태원 참사의 책임자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일념만 남겼다.
“참사를 겪어 보니 그 전과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살게 됐습니다. 지금은 또 다른 사고가 나면 예전에는 그냥 넘어갔겠지만 이제 유심히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또 다른 참사를 겪었습니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 그리고 우리 인근지역에서 있었던 산사태 참사. 신고를 받고 누구도 대피시키거나 제때 구조하지 않습니다. 오송 참사에서 사람들을 구조한 버스 기사님처럼 아직도 국가가 아니고 보통 시민이 사람을 살립니다. 참사가 반복되는 것은 정말 책임 있는 사람이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고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건, 어찌 보면 단순합니다. 특별법 통과시키고, 진상을 규명하는 것. 대통령이 진심으로 사과하고, 이상민은 파면하는 것. 그겁니다. 그게 없으면, 이 참사는 다시 반복되는 겁니다.” (홍두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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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성 씨는 여전히 참사 당시 기억을 떨치지 못했다. 형의 마지막 모습, 참사 당시의 상황이 눈에 선하다. 형은 인파에 휩쓸려 두성 씨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두성 씨를 크게 두 번 불렀다. 사람들 틈에 끼어 있던 두성 씨는 그 소리를 듣고도 가슴이 짓눌려 대답하지 못했다. 말이 나오지 않아 대답하지 못했는데, 두성 씨는 대답하지 못한 탓에 형이 더 많은 인파에 휘말린 건 아닐까 자책한다. 그런 두성 씨를 보는 두표 씨도 속이 탄다. 트라우마를 자극할 거 같아, 말을 아낀다.
한 날 의성 씨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의성이를 오랜만에 본다, 보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다 퍼뜩 정신을 차린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두성 씨다. 머리, 옷 스타일은 전혀 다르게 하고 다녔는데 두성 씨가 머리도 조금 길렀고, 무슨 생각에선지 그날은 형의 옷을 입고 있었다. 아직도 현실 감각이 온전하지는 않은 것 같다며, 두표 씨는 마음을 추스른다.
지난 19일은 의성 씨와 두성 씨의 생일이었다. 아들 친구들이 찾아와 영정 사진을 올리고 생일상을 차렸다. 모처럼 떠들썩하게 보낸 듯했다. 아들은 떠났지만 아들을 기억하는 친구들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1층 방에 들어서면 의성 씨가 기르던 강아지 은솔이, 사츠가 품에 안긴다. 의성 씨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다.
두표 씨는 두성 씨에게, 이태원 참사 1주기 서울에 함께 가자고 했다. 두성 씨도 가고 싶다고 했다. 서울에 가서 다른 유가족을 만나면 두표 씨도 두성 씨도 위안을 받을 테다. 30일에는 가족들과 의성 씨가 묻힌 나무를 찾아갈 생각이다. 참사 이후 자르지 않은 머리가 두표 씨 어깨까지 치렁치렁 늘어졌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여전히 탈상하지 못했다.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