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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S 문제점 지적되지만 제도적 통제는 다른 이야기
“미국은 응답률 10% 이상만 발표”는 사실 아냐
과거에는 전화면접/응답률 10% 넘는 한국갤럽 공격
“안 믿는다”더니 53일만에 홍준표 대세론 근거로 쓰기도
“최소한 응답율 10% 이상, 전화 면접조사만 발표하도록 해야 한다.” 10월 25일 홍준표 대구시장이 또 한번 여론조사에 대한 불신론과 통제론을 내놨다. 홍 시장은 “2017년 자유한국당 대표를 할 때부터 내세운 일관된 주장”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제20대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던 2021년 4월 24일에도 그는 “응답률 5%도 안되는 여론조사가 활개치는 나라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최근 국내 조사기관 34개가 가입한 한국조사협회(KORA)는 앞으로 ARS 여론조사를 실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ARS는 전화면접에 비해 정치 고관여층이 과다대표되고 무당층은 과소대표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전화면접은 조사원의 권유와 안내가 있지만 ARS는 시민들이 전화를 더 많이 끊어버리는 효과가 있었다. 이것은 단적으로 낮은 응답률로 나타난다.
홍 시장이 ARS보다 전화면접을 더 신뢰한다면 존중받아야 할 일이고, 합리적 근거도 갖고 있는 의견이다. 다만 ‘무엇무엇만 발표하도록 해야 한다’며 여론조사를 법과 제도로 통제하자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게다가 여기에 허위사실이나 이중잣대가 끼어 있으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뿐이다.
미국은 10% 이상만 발표한다? 여론조사 공공 규제 약한 곳
홍 시장은 이번에 미국은 여론조사 발표시 “응답률 15% 이상만 발표한다고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도 2022년 5월 24일 비슷한 주장을 한 바 있다. “미국에서 10%인가 15% 이하 응답률 여론조사는 발표를 못 하게 하고 있다. 워낙 악용이 많이 되니까.”
그러나 미국은 공공적인 여론조사 관리감독 제도를 운영하지 않는다. 한국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나 프랑스의 여론조사위원회 같은 기구가 없는 것이다. 미국 CNN이 자동녹음전화 조사를 인용 보도하지 않는 것도 철저한 자율적 결정에 따른 것이다.
미국여론조사협회(American Association for Public Opinion Research·AAPOR)가 자체적으로 마련해 권고하는 11가지 사항은 있다. 이것은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할 때 함께 공표할 사항을 정리한 것으로, 여론조사 발주처와 의뢰기관, 조사 날짜와 자료 수집 방법, 표본 크기와 가중치 부여 방식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응답률’은 빠져 있다. 미국은 여론조사 ‘제도’만이 아니라 ‘문화’와 ‘규범’까지 홍 시장의 주장과 전혀 다른 셈이다.
홍 시장은 이번에 “설계에 따라 마음대로 조작 가능한 ARS조사”, “가중치 부여라는 기발한 방법” 등의 주장도 내놨다. 자신의 호불호에 따라 기발하게 제기한 음모론이다. 여론조사는 설문 내용이나 문항 배치에 따라 특정한 답변을 유도할 수 있지만 이것은 전화면접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조사기관이 필수적으로 공개하는 자료가 있으므로 일반 시민도 접근하고 비판할 수 있다. 가중치 부여도 불가피한 일이며 여러 기관이 하고 있다. 계층에 따라 여론조사 응답율이 다르기 때문에 인구 비례에 맞게 보정해주는 것은 당연한 작업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홍 시장이 그간 공격한 여론조사는 ARS와 10% 미만 응답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홍 시장은 ‘응답률 10% 이상의 전화면접 조사’에 대해서도 이중잣대를 보여왔다.
주요 과녁은 한국갤럽이었다. 2017년 5월 9일 제19대 대선 직전 한국갤럽이 마지막으로 발표한 조사 결과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의 지지율은 16%였다. 홍 시장은 문재인, 안철수 후보와 달리 자신만 실제 지지율(약 24%)과 현격한 차이가 났다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갤럽에 불신을 늘어놓았다.
“한국갤럽 안 믿는다”더니 53일만에 홍준표 대세론 근거로 제시
그러나 19대 대선 직전 발표된 여론조사들 가운데 홍 후보 지지율이 20% 이하로 나타난 사례는 제법 있다. 심지어 EBS가 그해 5월 초 발표한 한국리서치 여론조사에서 홍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14 대 11 수준의 ‘접전’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리서치와 한국갤럽은 전화면접 조사 기관으로 이들 기관 조사는 응답률이 비교적 높다.
19대 대선 마지막 한국갤럽 조사 지지율과 홍 후보 최종 득표율 사이에 차이가 나는 것은 실제로 막판 판세가 급격하게 변했던 탓이 크다. 당시 한국갤럽 조사에서도 4월 둘째주부터 5월 첫째주까지 자기규정 보수층의 홍 후보 지지율이 22%포인트나 상승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홍준표 시장은 2021년 6월 8일 한국갤럽에게 ‘내 이름 빼달라. 빼지 않으면 소송하겠다’는 엄포를 놓은 적도 있다. 그주 발표된 대선 주자 선호도에서 홍 시장은 1%에 그치며 대선 출마 연령이 되지도 않은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3%)에게 뒤진 바 있다. 참고로 이 조사는 전화면접으로 실시되었고 응답률은 13%였다.
그해 9월 4일에도 홍 시장은 “나는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는 신뢰하지 않습니다”고 재차 밝혔다. 하지만 홍 시장의 태도는 53일만에 정반대로 뒤집힌다. “오늘 발표된 갤럽 (가상대결) 조사에서는 저는 이재명 후보와 초박빙이지만 윤석열 후보는 10.1%(포인트)나 집니다.” “대세는 홍준표입니다.”
여론조사에 대한 뷔페식 해석, 정계와 언론에 만연
여론조사에 대한 내로남불식 이중잣대는 정치권에서 일반화되고 있다. 국민의힘 강성 지지층은 문재인 정부 시기에는 정당 지지율 조사에서 ARS를 선호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ARS에서는 문 정부 때나 윤 정부 때나 야당 쪽 지지율이 높게 잡힌다. 민주당 강성 지지층은 윤석열 대통령 지지도에서는 전화면접을 신뢰하면서 정당 지지율 조사에서는 ARS를 고집한다.
정책과 이슈에 관련된 조사에서도 저 유리한 것만 쏙 빼먹으려는 풍토도 있다. 여기에는 정치권 이상으로 언론에게 책임이 있다. 한 방송 출연자는 ‘이재명 수사 찬성 우세’와 ‘김건희 특검 찬성 우세’ 중 하나만 뽑아 설명을 늘어놓다가 다른 출연자에게 되치기를 당하기도 했다. 출연자만의 책임인가. 각 언론사가 어떤 이슈의 여론조사는 보도하고 어떤 것은 하지 않는지 모니터링할 필요가 있다.
여론조사에 관련한 홍준표 시장의 발언과 태도는 한국 정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단, 사반세기 정치를 한 중진 인사사 치고는 상식이 얕고, 정치인 치고는 너무 지나치게 솔직하다. 진솔하기보다는 노골적이고, 신랄한 것이 아니라 적나라할 뿐이다.
김수민 객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