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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50분 상해를 점령한 일본이 홍커우공원에서 전승기념 행사 중이던 그때 폭탄 소리가 났다. 사열대 위에 있던 일본군 간부들이 죽거나 다쳤다. 폭탄을 던진 이는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알리고자 했던 25살 청년,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이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1차적으로 반응한 것은 중국인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사변을 겪으며 일본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1931년 7월 만주 길림성 만보산 지역에서 조선인과 중국 두 나라 농민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면서, 유혈 충돌 사태가 벌어지면서, 중국과 소원했던 관계가 1932년 1월 이봉창의 동경의거와 4월 윤봉길의 상해의거로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다. 폭탄 투척 의거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계획이었음이 알려지면서, 임시정부와 중국국민당 정부 간의 우호 관계도 강화됐다. 항일의지를 국제 사회에 알렸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에 대한 당시 외신 반응은 어땠을까. 중국의 <남녕민국일보>는 의거를 보도할 때 ‘侵滬群魔被炸重傷(상하이 침략자들이 폭탄에 중상을 입다)’란 제목을 쓰기도 했다. <성민일보>는 <韓人一彈勝過雄兵十萬(한국인의 한 개의 폭탄이 10만 웅병 보다 낫다)>이라는 제목을 달았고, 윤봉길에 대해서는 <尙具熱血之靑年尹奉吉 (뜨거운 피를 가진 청년 윤봉길)>이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
그렇지만, 서구 대다수 언론의 시각은 달랐다. 영국의 <The Times>(4.30, 5.2), <The Manchester Guardian(4.30)>, <The Irish Times>(4.30) 등은 ‘상해 폭탄 만행’, 또는 ‘상해의 잔인한 폭거’, ‘상해 폭거’ 등으로 표현했다. 특히, <데일리 텔레그라프(The Daily Telegraph)>는 윤봉길 의거를 ‘反평화 범죄’로 표현하기도 했다. 프랑스와 스위스 언론은 대부분 윤봉길 의거를 ‘테러’로 규정하였고 윤봉길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보도했다. 영국 언론이 이같이 보도한 데는 당시 상해사변 이후 중국과 일본 사이에 중재를 추진 중이던 영국 정부의 계획이 무산된 때문이다.
제국주의를 지속하는 것이 ‘정상적인’ 비폭력임을 기준으로 하면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어떠한 행동도 폭력이라고 명명되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독립운동을 이해할 때 우리는 눈앞에 드러나는 물리적 폭력에 그치지 않고, 제국주의 식민지배가 가진 구조적 폭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인식한다. 그렇다면, 한국독립운동 바깥에 대해서도 그렇게 인식할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
해방 이후 새로운 나라 건설과 개혁에 대한 열망이 움트던 1946년 벌어진 10월항쟁, 지연된 토지개혁과 친일경찰 중용이라는 식민지배 트라우마 재생산에 대한 저항이었다. 대구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물리적 폭력이 동반됐다. 미군정과 권위주의 정권은 10월항쟁을 ‘폭동’으로 명명했고, 한국전쟁 전후 예비검속과 민간인 학살의 이유로 사용했다. 늦게나마 진상규명을 하고, 항쟁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어느 순간 물리적 폭력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역사적 평가를 하고자 함이다.
또 하나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한 관점이다. 참혹한 전쟁에 대해 대게 서구 언론과 국내 언론은 팔레스타인 하마스에 대한 폭력성 부각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48년 일방적인 이스라엘 건국과 이후 벌어진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라는 배경은 찾아보기 힘들다. (관련기사=홍명교, 「만약 한반도에 이스라엘이 건국됐다면」, <한겨레>, 2023.10.23.)
90년 전으로 돌아가 한인독립운동가들의 의열투쟁이 제국주의에 대항한 인류 보편적 양심과 정의를 알렸다면, 팔레스타인의 시민들이 겪는 폭력에 대해서도 한 발 더 세심하게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천용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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