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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시집인 구광본의『강』(민음사,1987)은 얇다. 발문과 시인의 후기를 모두 합쳐도 70쪽 밖에 되지 않는 이 시집에는 마흔네 편의 시가 실려 있다. 요즘 나오는 시집은 하나같이 100쪽을 넘고, 수록된 시편도 예순 편 안팎이 기본이다. 하지만 현재의 기준처럼 보이는 예순 편 안팎의 편수는 시집의 절대 기준이 아니다, 서정주의 첫 시집『화사집』(南蠻書庫,1941)은 스물네 편만 수록했지만 아무도 부족한 분량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쉰다섯 편을 수록한 유치환의 첫 시집『청마시초』(靑色紙社,1939)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동년배의 다른 시집들과 비교할 때 작품량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양은 시집의 기준도 아니고 질은 더더욱 아니다.
『강』은 청년의 시집이다. 시인이 스물두 살 때 낸 시집이라서가 아니다. 젊은이의 눈에 비친 낯선 세계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아아 미치겠어요 이상한/ 수상한 공기로 가득 차 있어 우리들은/ 순장 당했어”(「꽃밭에서」), “이 수상한 포르말린 냄새/ – 나는 잠이 와 이상하다 그치”(「모래의 도시」), “나는 땅에 발을 붙이고 다닐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서울, 나는 그곳에서 죽을 수 없었다」), “이곳은 이상한 강, 늪 […] 한 발짝도 외출을 허락하지 않는다”(「이곳은 강, 늪」) 일상적인 세계를 낯설고 의심쩍게 바라보는 것은 젊은 시인만의 특권이 아니라, 막 입사(入社)한 젊은이 모두의 특성이다.「홍수」전문을 감상해보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곳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쉬지도 않고 밀려드는 저 물줄기 좀 봐/ 다 휩쓸어 버리겠다// 오래전부터 바뀌지 않는 신호등,/ 떠오르는 배 한 척 없는/ 아스팔트를 내려다본다/ 내리는 비 없이도 밀려와/ 휩쓸고 가는 물결 위로 내 방은 둥둥/ 내 방은 작은 섬이다// 물줄기의 팔뚝을 보았다./ 도시의 한복판 공원의/ 백년 묵은 나무를 뿌리째 포크레인처럼/ 들어올리는 얼굴없는 괴물을,/ 힘센 염소를 푸줏간으로 끌고가는/ 손아귀를 보았다// 나무들에게 강제로 물을 먹이기 시작했다/ …… 상수도가 터졌는지 모른다/ 장구벌레와 악취가 유리창을 덮었다/ …… 하수도가 터졌는지 모른다// 다 떠내려 간다 저 근육질의 물결에/ 방주를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짝지은 비둘기는 없었다/ 내가 준비한 흰 종이와 펜마저/ 빼앗으려드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홍수로 세상이 다 떠내려가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다 떠내려간다”라고 말하는 시인의 자의식만은 떠내려가지 않는다. 잘못된 것은 세상이지,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들이민 내가 아니다.『강』이 청년의 시집인 것은 아직 ‘내’가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듯이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에 기입되지 않은 미등록의 세계, 이런 세계는 십대들이 심취한 힙합(hip hop)의 세계다. 그 세계에서는 모든 문제가 부모와 학교와 사회에 전가된다.
그러나『강』이 힙합과 유사한 인식을 가졌다는 말은 철회되어야 한다. 이질적이고 대타적인 세계로부터 혼란과 공포를 느끼는 젊은 시인의 감각은 금세 민중민주(PD)와 민족해방(NL)에 포근히 감싸이기 때문이다. “나를 묶고 있는 것은 밥줄이다/ 먼지 투성이 소음 투성이 공장으로 내모는/ 오오 이 밥줄 끊으면 자유로울까”(「밥줄」), “두드리면 울리는 북을/ 북을 친다/ …… 너 어디 있느냐/ 두드리면 그리움으로 우는 북을/ 북을 친다/ ……우리 너무 오래 헤어져 있었다/ […]/ ……우리 이제 다시 만나자/ 북을 친다 또 한 번”(「북」) 전자에서는 당대의 충격이었던 박노해의 숨결이 맡아지고, 후자에서는 이념이 피(=민족)로 순치된 감상적 민족주의를 엿볼 수 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젊은 시인들의 시는 “되어가고 있는 시이지, 이미 되어 있는 시가 아니다.”라면서, 그들의 시는 “내가 타자라는 것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들의 시는 그들의 시이면서 타인들의 시이다.”라고 썼다. 세계를 이상하게 여기며 낯설게 마주하는『강』의 시선과 감각도 당대의 일부 문학청년들에게 영향을 준 시운동 동인의 것이다. 첫 시집은 나의 것이면서 타인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