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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와 중구청이 밀고 있는 ‘이인성 아르스 기념관(가칭)’ 건립 사업의 추가경정예산1이 지난 6월 13일 구의회를 통과했다. 해당 사업은 지난해 사업 타당성 부족 등을 이유로 35억 원이었던 예산 전액이 삭감되며 사실상 백지화됐었다.
그러나 27억 원의 축소된 예산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미 대구시와 중구청은 2003년 두류공원 인물동산에 이인성 동상을 세우고, 2015년 북구 산격동에 이인성 거리를 조성하는 등 이인성 사업에만 몰두해왔다. 또한 1999년 제정한 이인성미술상을 대구미술관에서 운영하며 매회 5천만 원에 달하는 상금을 수여하고, ‘제00회 이인성미술상 수상전’이라는 제목의 개인전 개최 기회를 주는 등 적지 않은 세금을 투입하고 있다.
이렇듯 대구시는 이인성이 본보기가 되는 한국의 근대 위인인양 그의 이름을 여기저기에 내걸고 있다. 하지만 이에 의문을 품는 이들도 존재한다. 이인성은 과거 일제강점기, 말 그대로 일제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해 출세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천재 화가’, ‘선전2 최대의 감격’, 이 모든 수식어가 이인성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인성은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에 17살의 나이로 입선했다. 이후 제10회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그는 미술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그는 1944년까지 존속된 조선미전에서 첫 입선 이후 매해 빠짐없이 출품했고 8번 당선되었으며 최고상인 조선총독상까지 받았다. 주목해야 할 점은 조선미전이 1922년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주관했다는 부분이다.
당시 일본인 심사위원들은 ‘향토색’ 짙은 작품을 요구했는데, 이는 왜곡된 조선 향촌의 풍경을 나타내는 말로 일본인의 이국 취향에 맞춘 작품을 의미했다. 예컨대 이인성의 대표작 중 하나인 <가을 어느 날>에는 조선에서 자라지 않는 열대지방 식물과 상의를 탈의한 여성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게다가 30년대 후반은 민족말살정책을 목적으로 민족운동을 하는 예술계 인사들을 본격적으로 탄압하던 시기였다.
이인성은 당대의 현실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모더니스트로 살았다. 대구는 스스로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라 칭한다. 이에 따르면 이인성과 같은 인물은 대구를 대표하는 미술가라 볼 수 없다.
‘아르스’는 1938년 이인성을 비롯한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예술가들이 모여 차를 마시고 토론하기 위해 만든 다방이었다. 이 공간을 21세기에 재현하는 것은 미술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의미를 찾기 힘들다. 대구시가 진정으로 대구문화예술계의 발전을 위한다면 이미 잘 알려진 모더니스트 예술가만 골라 집중적으로 지원해 주는 것이 아닌, 역사 속에서 지워진 예술가를 발굴하고 지원해야 한다.
대구 근대 미술계에는 모더니즘 미술가 이인성, 사실주의 화가 이쾌대, 전위 예술가 이상춘과 같이 다양한 사조의 작품을 하는 예술가들이 존재했다. 그러니 대구시와 중구청은 이인성뿐만 아니라 이상춘이나 이쾌대와 같은 시대에 저항한 예술가들을 우선적으로 발굴해 다각적으로 지원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며 민족해방에는 무관심했던 이인성을 대구 문화예술계 전면에 내세우는 짓을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는 시대를 망각한 미술가를 우리가 사는 이 도시의 얼굴로 칭송하고 싶지 않다.
글_표출지대 최령은
pyochuler@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