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계급은 억압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함께 할’ 동맹세력을 구축해야 한다. 이것이 계급동맹이다. 이는 전략적 중심을 형성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동맹을 주축으로 억압세력을 포위, 고립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세력들과 연대를 구축하는데, 이는 정세에 대응할 수 있는 전술을 중심으로 결속한다. 이것이 통일전선 즉, 전술대응을 통한 연대다.(이 글에서는 전략의 일부만 다룬다) 우리가 민중대회에서 주체를 노동자와 민중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의미이다. 계급동맹은 곧 변혁의 주축 세력이다.
통상 민중에는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노동자계급이고 또 하나는 민중이다. 노동자와 민중의 결속은 노동자의 지도성을 전제로 한다. 지도성이라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향도’라는 말을 써도 무방하다. 노동자계급이 일반 민중세력을 이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향도’와 ‘민중들과의 결속’이 변혁전략의 주체인 것이다.
이때 두 번째 민중은 누구인가? 전통적으로는 농민이다. 즉, 노·농동맹을 계급동맹의 기본 단위로 인식해왔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계급관계에 많은 변동이 일어나서 새로운 분석이 필요하다. 우선 농민은 숫자가 매우 줄어 300만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농업생산의 담당자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그 중요성은 여전하다. 그 다음은 자영업자들이다. 한국의 노동인구는 통상, 정규직 800만, 비정규직 및 불안정노동자 800만, 자영업자와 농민 등 소부르주아지 800-900만이라고 얘기된다. 2011년 대구시 발표에 의하면 자영업자 70%의 월평균 소득은 150만 원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비정규직 수준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사업의 불안정성을 고려한다면 그 이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준을 참조할 때 대략 600만 정도가 비정규직 수준의 영세자영업자인데, 이들은 소부르주아지 하층이라 할 수 있다.
영세자영업자의 처지는 이명박 정권 들어서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소위 유통선진화 정책이다. 세계화 경쟁에서 이기기 어려우니 국내 상인을 등쳐서 재벌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 핵심은 대자본에 의한 유통 장악과 중소상인 퇴출이다. 광역도시 중앙에는 재벌 백화점이 들어서고 중소도시와 대도시 주변에는 대형마트가 들어선다. 골목에는 재벌 체인점, 편의점이 실핏줄처럼 스며들어 자영식당과 슈퍼마켓을 몰아냈다.
커피점도 브랜드로 권력이양이 완료됐다. ‘스타벅스’, ‘엔젤리너스’ 등이 판을 친다. 이 과정에서 중소자영업자들은 몰락한다. 농촌에는 재래시장이 대형마트에 밀려서 정부 지원까지 받아가며 리모델링으로 상권 살리기를 하고 있지만, 성공한 사례는 드물다. 소위 ‘개미 사장님’들은 최후까지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유통 말단에 남아있거나 그조차 실패하면, 실업자가 되거나 비정규직 자리를 찾아다니는 처지가 됐다.
정부 차원에서 진행하는 유통재편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도 유통대기업을 유치하고 있다. 명분은 현대적인 유통체계를 구축하여 지방상권을 살린다는 취지다. 서울 안 가고 지방도시에서도 쇼핑할 수 있도록 하여 돈의 ‘역외유출’을 막는다는 것이다. 대구시내 교통요충지 반월당 옆 달구벌대로 앞은 현대백화점이 점령해 있다. 대구백화점을 중심으로 하는 동성로 상권을 무력화하고 대구 최고의 상권으로 떠올랐다. 대구시가 현대백화점을 인허가할 때는 대구 여론이 들끓었다. 자영하는 상인들, 경쟁 백화점들을 모두 붕괴시킬 것이라는 우려였다. 하지만 여론이 자본의 사주를 받는 공무원을 이길 수는 없었다. 현대백화점 주위 상권이 활성화하면서 약전골목 임대료가 올라 한약 상회들은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대구시가 그동안 2백억 이상 투자하여 의욕적으로 진행해온 약전골목 활성화는 공염불이 됐다.
그러면 지역경제의 총량은 확대되었는가? 자영업자가 망하더라도 지역경제는 살았는가? 천만에 말씀! 지역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현대백화점은 지역 생산품도 안 쓰며 고용도 서울 본사에서 결정한다. 은행도 지역은행을 이용하지 않으며 대구시에 내는 세금도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대백화점은 대구의 유통 피라미드의 최정점에 있으면서 그 파급효과와 이득을 모두 서울 본사로 보내는 ‘빨대’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견딜만하다. 얼마 안 있으면 초특급 태풍이 올라온다. 대구시 공무원의 비호하에, 신세계재벌이 선보일 준비를 하는 ‘동대구복합환승센터’다. 아시아 최대, 세계 최대(?)일 것 같은 ‘유통 괴물’이 등장할 준비를 하고 있다.
유통자본의 합리화는 결국 서울 집중과 지역몰락이며 대자본의 독점 강화와 자영업자들의 몰락인 것이다. 이제 이들은 대자본에 쫓겨나 영세자영업자 즉, 소부르주아 하층이 되었다.
전통적 계급분석에서는 소부르주아지는 소자산가로서 자본가를 희망하면서 노동자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로 인식했다. 그래서 중간층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오늘날 대자본의 수탈이 전면화하자 소자산가는 몰락하여 비정규직 수준의 빈곤층으로 전락한다. 이제 이들은 사회 변혁에서 더 이익을 보는 세력이 됐다. 이들은 각종 행정 끄나풀 제도의 ‘조직적’ 영향력 아래 있으며, ‘정치’에서는 대개 보수 우익정당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경우가 많다. 변변한 자기조직조차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계급적 처지를 정치적으로 대표하고 있지 못하다. 이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적 무기를 가진 것과 대조된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지배세력에 대한 지지자로, 진보적인 경우도 자유부르주아지 즉, 야당 지지자로 존재해왔다. 이러한 관성은 ‘몰락’ 이후에도 큰 변동이 없다. 특히, 이들에 대해서는 상층 소부르주아지들의 영향력이 크다. 상층의 지식인, 전문인들이 하층의 여론을 주도한다. 정치에서도 자유부르주아지(야당)들이 진보적 소부르주아지 하층의 여론을 장악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민단체는 상층의 자유부르주아지들의 여론을 대표하며 이를 하층에게로 확장시키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 이들은 하층의 경제적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지 못하고 일부 상층의 여론에 자신의 운동적 지위를 한정한다.
소부르주아지 하층을 누가 동맹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그러나 진정 이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즉, 계급동맹의 주도자인 노동자계급은 ‘소 닭 쳐다보듯’ 한다. 그들에게는 계획도 없다. 그냥 되는대로 즉자적인 연대에 머문다. 당연하다. 노동운동 내에 이를 지휘할 세력 즉, 노동주체성을 지닌 세력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운동은 사회적 정치적 행위들에 대한 ‘딱지 붙이기’가 아니다. ‘이런 행위는 개량주의 저런 행위도 개량주의’라고 심판하는 행위가 아니다. 부르주아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무조건 개량주의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레닌은 엄격한 비판을 가했다. 물론,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재생산하는 장치인 부르주아 선거에 안착하는 것은 반대하지만, 그 선거를 변혁에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활용하는 것까지도 경계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그런 태도를 ‘좌익소아병’이라고 레닌은 비판했다. 이러한 틀을 넘어설 계획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운동’인 것이다.
마찬가지 예로서 협동조합운동을 개량주의이며 불안한 자본주의를 안정화시키는데 기여한다고 ‘레테르’를 붙인다면, 우리는 현실에서 아무 운동도 성취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협동조합운동이 그런 약점에 유의하면서, 그 조직을 매개로 변혁운동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노동자계급과 연계성을 높일 거냐를 고민해야 한다. 조건이 될 때, 혁명적 협동조합운동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레닌이 제시하는 ‘혁명적 현실주의’이다.
실제, 노동자계급의 동지인 민중들은 공장이 아닌 곳에서 소규모로 혹은 개인으로 고립되어서 생산 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만큼 대자본의 수탈에 매우 취약하다. 일시적으로는 불리한 일을 당하면 저항하지만, 지속성을 가지기는 어렵다. 결국, 그들은 파편화하여 패배하고 만다. 이명박 정권 때는 재벌이 정부의 정책적, 금융적 지원을 받아 ‘슈퍼마켓’을 아예 붕괴시켜버리고 한 달 수입이 150만 원 정도인 ‘편의점’으로 대체해버렸다. 소자산가들은 영세소자산가로 전락한 것이다.
이들의 생산 공간은 주로 생활소비 공간인 지역이다. 정치적으로는 각종 행정·정당 ‘끄나풀’ 조직이 지배하고 있다. 국회의원과 지역구 선거조직, 시장, 구청장, 읍면장과 위계적으로 연관된 통장, 반장, 그리고 이들로 구성된 위원회와 각종 관변단체가 지역에 쭉 깔렸다. 국가와 자본은 이 끄나풀을 통해 이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한다. 독재 찬양, 진보운동 혐오, 반공·반노동자 사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유포한다.
이들에게는 자주성이 없다. 업종 조직이나 행정 단위 모두에서 이들은 수동적이며 고립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을 묶을 필요가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조직 중 협동조합은 아주 좋은 매개가 될 수 있다. 이를 점차 민중 자주적인 공동체 조직으로 발전시켜 지역의 끄나풀 조직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대구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는, 동구 반야월을 비롯한 지역공동체운동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운동은 영세자영업자들의 지역적 삶에 직접적 접근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우리는 이러한 조직에 개입하여 이 운동을 어떻게 하면 변혁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친구로 발전시켜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노동자계급과 그에 토대한 변혁적 주체성이 방관하는 가운데 현재로는, 아나키즘 경향을 지닌 이론들이 지역공동체 운동과 만나고 있다. 풀뿌리운동, 대안운동, 협동조합운동, 한살림운동, 종교공동체운동 등은 사실상 아나키즘에 강한 영향을 받거나, 혹은 본래 아나키즘과 친화적이다. 뿐만 아니라 생태운동도 아나키즘 경향의 지역공동체운동과 접목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운동은 민중을 주체화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민중의 저항과 권력담당 경로를 비과학적으로 사고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대안적 삶’ 등 기껏 개량적 결론으로 끝나고 만다. 여기에서 누락된 것은, 지역공동체운동의 주체인 지역의 다수 거주자는 사실상 소부르주아 하층에 속하며, 이들은 노동자와의 계급동맹을 통해 자본주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주체라는 사실이다.
‘연관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파편화한 사고, 즉 노동자 계급만 잘하면 세상이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경제주의적 사고다. 이러한 사고는 두 가지 방향에서 발생하고 있다. 먼저 민중주의적 노동운동의 태도에서 비롯한다. 과학적 변혁이론보다는 노동자의 생활개선에만 집중하면서 그들의 정치의식이 단계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태도다.
둘째로 좌파적 사고방식이다. 이는 노동자를 유일한 혁명세력으로 규정하고 그 외를 가급적 배제한다. ‘노동자계급의 민중과 대중에 대한 향도’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노동자가 지니는 ‘사회의 대표성’, ‘인민의 호민관’의 지위를 망각하는 것이다. 계급적 나르시즘이다. 양 경향은 정반대 방향에서 비롯하지만, 결국 노동운동을 파편화하고 노동주체성을 해체하는 동일한 결과를 초래한다. 즉, 좌우익 경제주의이다.
시민운동의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 노동자와 영세자영업자가 시민의 절대다수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시민운동은 이들의 이해와 요구에 기반을 둬야 할 것이다. 오늘의 시민운동을 성공시킨 그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층 시민운동을 개척해야 한다. 만약 시민운동의 ‘운동적 감수성’이 소부르주아지 상층, 즉 전문직들에 머물고, 이를 무기로 하층을 지배하는 위상을 계속 유지한다면, 우리는 친노동자, 친영세자영업자들에 토대하는 새로운 시민운동을 조직화해야 할지도 모른다.
현재, 소부르주아 하층을 조직하고 세력화하기 위해서는 노동과 시민운동, 지역공동체운동에 종사하는 활동가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의 동맹자로서의 태도와 시민운동의 시민사회를 대표해온 풍부한 경험, 그리고 지역공동체운동의 직접적인 조직화의 노력을 모두 종합해야 한다.
양극화하는 계급상황은 날이 갈수록 너무나 심각하지만, 계급투쟁은 지체되고 있다. 20세기 사회주의의 실패에서 오는 좌절감은 계급운동의 갈 길을 끊어버렸다. 우리는 패배주의에 빠졌고, 자본은 우리를 더욱 밀어붙여 우리를 반공주의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현재 상황은 특정 단체와 활동가들의 문제를 넘어서서 시대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검증되고 숙고되지 못한 ‘반성’들이 과도하게 난무하고 사실조차 왜곡된다. 부르주아 편을 직접 옹호하는 이론들과 부르주아를 비판하는 듯하면서 사실상 부르주아 체제를 불가피하게 승인하는 이론들, 자신의 계급적 이해에 몰두하는 경제주의적 이론들이 난무한다. 현재 우리 운동사회는 이러한 적-이데올로기의 홍수에 떠내려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착실하게 준비하여’ 계급투쟁을 회복해나간다면, 항상 계급 상황은 급변할 수 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면, 20세기 사회주의의 실패는 새로운 시대의 성공을 기약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상황이 오면 각 계급은 역동한다. 빈곤층으로 전락한 영세자영업자들도 역동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정의의 권력’을 탐한다면 소부르주아 하층을 자신의 편으로 이끌어 들일 계획을 세워야 한다.